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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추천8 비추천-1






좌파와 우파, 좌익과 우익이라는 개념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 이후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 전까지는 왕당파와 공화파가 대립했고 왕이 사라진 이후에는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지롱드당과 급진 개혁을 선호라는 쟈코뱅이 맞서게 되는데 대체로 전자가 오른쪽, 후자가 왼쪽 의석에 주로 앉았다 하여 우파와 좌파라는 개념이 형성됐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이 좌우익이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찬반을 나누는 기준으로 즐겨 사용됐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면 우익, 공산주의자이거나 그에 동조하면 좌익이었던 셈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수천 리 길을 헤매 임시정부를 찾아 우익의 거두라 할 백범 김구를 따랐고, “공산주의자들은 어떠한 협약이든 한 장의 휴지로밖에 보지 않는다.”며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낸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위에서 언급한 한국적 기준대로라면 마땅히 우익적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우익’이 장악한 독재 정권에 격렬하게 맞섰고 역시 독재에 맞서 투쟁을 벌여 ‘좌익’으로 곧잘 낙인찍히던 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지금도 오른쪽보다는 왼쪽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더 추앙을 받는 특이한 우익이었다. 이 기이한 인물의 이름은 장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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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평안북도 의주생이지만 삭주에서 자랐다.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한의사로서 한학(漢學)에도 밝았으나 일찌감치 개화에 눈을 뜬 사람이었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장로가 돼 아들을 목사로 길러냈다.


평안도는 조선 왕조 5백년 내내 중앙 정부로부터 심각한 차별과 냉대를 받은 지역으로서 타 지역에 비해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였고 현대사를 주도하는 인물들을 부지기수로 배출한 곳이었다. 도산 안창호를 위시하여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춘원 이광수, 함석헌 등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굵직한 이름들 중 상당수가 평안도 출신이고, 대한민국 초대 학술원 회원은 15명이었는데 그 중 13명이 평안도 사람들이며 전쟁 후 한국 기독교의 주류도 이 ‘서북’ 출신들이 이끌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평안도에서는 꽤 큰 도시라 할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가 산골인 삭주에서 자라게 된 것도 아버지 장석인이 3.1 운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가 일본 경찰에 '찍히게' 된 때문이었다. 장석인은 뒤늦게 공부에 뜻을 두어 나이 서른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고 기독교 전도사, 목사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민족 의식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장준하는 그런 아버지를 눈에 담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교목, 즉 학교 목사로 일하던 신성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장준하는 처음으로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성중학교 교장 장리욱이 ‘수양동우회 사건’에 휘말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이광수 등 서북 출신 인사들이 주동하여 조직한 사회 계몽 운동 단체으나 일본 경찰의 눈에는 심히 불온한 '불령선인' 즉 불순분자들의 집단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던 교장 선생님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격분했다.


“일본어 교과서를 다 찢어 버리라우!” “교장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수업은 없는 기야 알아듣갔나” “전 학년 다 나오라! 교장 선생님을 석방하라.” 수업이 거부됐고 시위가 이어졌다. 때는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직전이었다. 전쟁을 앞두고 일본 제국주의의 살기가 시퍼렇던 무렵, 일본 경찰은 당연히 총출동하여 신성중학교로 달려갔다. 학생들은 교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경찰과 충돌했고 일부는 산쪽으로 이동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빈틈없이 포위한 가운데 경찰은 이런 말을 한다. “주동자만 나오면 나머지는 방면한다.”


역사 속에서 이런 모습은 흔하다. 저 유명한 노예 반란의 지도자 스팔타카스를 그린 영화 <스팔타카스> 중에서 노예 군대를 격파한 로마 장군은 스팔타카스만 나오면 나머지는 살려 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지도자와 일반 대중을 격리시키고 생존의 욕구를 자극하여 자신들을 이끈 지도자의 희생을 스스로 요구하게 만드는 이간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노예들은 사방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 외친다. “내가 스팔타카스다.” 그리고 모두 비참하지만 고귀한 죽음을 맞는다. 일본 경찰 역시 비슷하게 외친 것이다 . “주동자만 나오면 나머지는 별 일 없다.” 


그때 일어선 것이 장준하였다. “내가 주동자다.” 그러자 영화 스팔타카스와 비슷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여기 저기에서 “내가 주동자다!” 소리가 들리며 일본 경찰 앞에 학생들이 성큼성큼 걸어나왔던 것이다.


각 학년 대표들과 함께 장준하는 일본 경찰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힌다. 평생 동안 툭하면 들락날락했던 감옥살이의 ‘개시’(開始)였다고나 할까. 훗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원로가 되는 계훈제도 당시 동맹파업에 가담했던 장준하의 1년 후배였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독립군의 손 자국이 가득한 유치장에는 일본 식민지교육을 갈기갈기 찢은 학생 우두머리 장준하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철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치장에의 첫 나들이길이 트인 것이다.”


철창 앞에서도 일 점 두려움 없던 장준하는 학교를 졸업한 뒤 짧은 시간 소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는다. 하지만 학교 교사란 식민지 교육의 최전방에서 일제 당국의 지시를 받아 일장기를 내걸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장준하로서는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고 장준하는 못다 한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더욱 거세게 젊은 장준하를 덮쳐 왔다. 중국과의 끝 모를 전쟁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일본은 1941년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전선은 남태평양 뉴기니에서 북만주까지, 북동태평양에서 인도양까지 확대됐다. 물자와 인력은 무한대로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만으로는 도저히 전선을 유지할 수 없던 일제는 ‘학병’(學兵)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준하는 뜻밖에도 이 학병에 지원한다. 주변 친구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준하가 학병에 지원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교사 직을 집어던진 뒤 일제가 이를 갈고 노리던 아버지 등의 방파제가 되고자 함이었다.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 (장준하의 자서전 <돌베개> 중) 그리고 하나 더 학병으로 나아갔다가 탈출하여 독립 투쟁에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학병 지원 후 급하게 결혼한 아내이자 옛 제자 김희숙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편지 속에 '돌베개'라는 말이 있거든 탈출한 줄 아시오.” 그리고 머지않아 아내는 ‘돌베개’라는 말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것이다.


중국 대륙은 넓었다.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그것도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의 격전이 수시로 전개되던 전쟁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먹을 것 마실 것 구하기도 쉽지 않던 험한 길을 헤매며 장준하는 오로지 임시정부를 찾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서북방 어딘가를 떠돌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태극기를 내걸고 있다는 정부라기엔 너무나 초라한 정부. 그러나 장준하에겐 등대와도 같았을 이름. 임시정부를 찾아. 그 기나긴 여정은 이후 장준하의 생애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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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 OSS 특수 훈련을 받던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선생


해방이 왔다. 그는 광복군 선발대로서 일본군이 아직 지배하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 그러나 그건 성급한 의식이었다. 일본을 패망시킨 미국과 소련 양 강대국은 한국을 한국인들의 손에 맡겨 놓을 생각이 없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기타 조선인들의 자치 권력을 인정할 의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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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고 38선 이남과 이북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시작됐다. 공산주의를 격렬히 혐오하던 장준하의 활동 무대는 당연히 남쪽이었다. 고향에 남아 있던 아내는 가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남편을 찾아 시부모를 모시고 ‘소를 타고’ 내려와 38선을 넘는다. 바야흐로 달콤한 신혼 생활을 시작해야 했지만 장준하와 아내는 그럴 운명이· 아니었다. 장준하는 해방된 새 나라에서 자신의 사명을 찾고자 했고 그를 위해 이전보다 더한 돌베개와 가시방석을 마다하지 않았고 아내는 그 뜻에 동참해야 했다.


“한번은 저도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어요. 너무 좋아서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어제 준 것 있잖아요’ 해요.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어요.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거예요. 제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어요.” (아내의 증언)


1953년 4월 아직 전쟁의 포화가 계속되던 즈음, 임시수도 부산에서 역사적이라는 형용사에 손색이 없는 한 잡지가 탄생했다. <사상계>라는 잡지였다. 장준하 자신이 관여하여 발행하던 문교부 기관지 <사상>이 폐간에 다다르자 아예 인수해 버리고 <사상계>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전쟁통에 장준하는 이 잡지에 사활을 건다. 


필자들이야 장준하의 얼굴과 이름값으로 대충 끌어들였고, 조판, 인쇄 모두 외상으로 처리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사진 등의 동판대(銅版代)였다. 이것만은 외상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고심하던 장준하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나는 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내의 겨울 외투와 그런대로 값나가는 옷가지 몇 벌. 장준하는 그걸 몽땅 팔아치워 동판대를 마련한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아내는 생전 처음 교정 작업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장준하는 이렇게 회고했다.


“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빠져 일의 템포가 늦고 그나마 가르쳐 준 대로도 못할 때면 슬며시 울화도 났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보는 남들의 사무실에서 핀잔을 주어 부부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가 <브니엘>에 쓴 글) 아내에게 생판 해 보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맡겨 놓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은커녕 그 서툼을 고발(?)하면서 자신의 인내력(?)을 자랑하고 있는 이 간 큰 남자. 그게 장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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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장준하 본인과 아내 모두의 심혈을 쏟아부은 <사상계>는 대한민국을 진동했다. 초판 3천부가 순식간에 팔려나간 것은 물론 그 이후로도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는, 폭 넓고도 깊이가 다른 잡지의 반열에 올랐다. <사상계>가 태어나는 과정 또한 장준하로서는 여러 번의 돌베개를 베는 과정이었지만 이 또한 그의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작이었다. 그 고난의 원천은 바로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악연이었다.


“6.25가 일어났다. 당연히 받을 채찍이 이 땅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백성들을 공산역도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았다.”고 외치던 반공주의자 장준하가 “반공을 제 일의 국시로 삼는” 5.16 군사정변에 호의적 눈길을 보낸 것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 


군사정변 직후 발행된 사상계 권두언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그러나 정권의 발길이 장준하가 기대했던 혁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뺨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자 장준하는 다시 한 번 돌베개를 자청하게 된다. 가장 맹렬한 야당의 투사로 변신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밀수 왕초’라는 창날같은 표현을 꽂아 감옥 신세를 진 것은 얘깃거리도 못되었다.


장준하는 정말로 우리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계급투쟁을 논하는 이들을 배격했고, 웬만한 허물은 동족으로서 함께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겼다. 그랬기에 군사 정변도 긍정할 수 있었고 최남선 등의 친일파에게도 관대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 권력을 쥔 이들의 불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를 용납할만큼 녹녹한 사람이 못되었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집권자가 국정을 전횡하고 공산독재에 맞서 싸워야 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며 굴욕적 한일 회담을 추진하고 기업의 밀수를 묵인하고 그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아 챙기는 세상을 눈 뜨고 보아줄 수 없는 광복군 장교였다. 결국 그는 진정한 우익이었기에 이 땅의 주류 우익과는 안드로메다처럼 멀어져 가게 된다.


장준하가 거침없는 필봉과 사심 없는 마음으로 권력 앞에 맞서는 와중에 한때 그 가난한 50년대에 수만 부를 팔았던 사상계 사장의 다섯 아이는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고 부인은 장례식에 쓰는 조화를 접는 ‘알바’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의한 정권을 쳐부수기 위해 게릴라전까지 불사하겠다.”고 했다는 광복군 장교, 항상 몽둥이를 차에 두고 다니다가 미행하는 차량이 있으면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가 미행 차량이 혼비백산 도망가게 만들었던 담대한 재야 인사 장준하는 글자 그대로 암울한 시대의 촛불이었고 얼어붙은 세상의 온기로, ‘재야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는 항상 이렇게 외쳤다.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독재를, 분단을, 불의를, 부패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그는 포천 약사봉에서 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실족사라고 발표됐으나 미심쩍은 점은 많았고 후일 이장을 위해 발굴된 그의 유해에는 아령이나큰 돌멩이로 타격을 입은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워낙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칼날 위를 걷듯 살아온 삶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한 듯한 행동을 거듭한다. 윤봉길 의사가 홍코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전 맹세했던 태극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뒤 평생 소중히 간직해 온 그 태극기를 이화여대에 기증하는 한편, 아내의 평생 숙원을 풀어 준 것이다.


장준하는 평생 개신교인으로 살았고 아내는 일생을 가톨릭 신자로 보냈기에 아내는 혼배성사를 올리지 못했다. 가톨릭 차원에서는 정식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할 만큼의 의미있는 행사였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장준하는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 열 이틀 전, 그러니까 1975년 8월 5일, 별안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아내에게 혼배성사를 베풀어 준다. 무려 31년만의 혼배성사. 목사의 아들이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골수 개신교인 그가 신부 앞에 서서 혼배성사를 올린 것이다.


나이 쉰에 면사포를 쓰고 신부(神父) 앞에 선 신부(新婦)의 심경은 어땠을까. 열 일곱 철없는 나이에 아홉 살 위의 한때 선생님에게 시집와서 별의 별 고생을 다 해야 했던 아내를 바라보는 신랑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열흘 남짓 뒤 시신으로 돌아온 신랑을 마주했을 때 그 신부의 가슴은 대관절 얼마나 큰 소리 내며 무너졌을까. 창졸간에 맞은 장준하의 죽음 앞에 많은 이들이 통곡했다. 장준하의 평생 동지였던 함석헌은 이렇게 쓰고 있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빈 침대만 놓여 있고 미소를 띤 사진이 벌써 내놔져 있었습니다. 늘 보던 ‘일주명창(一炷明窓)’이라 쓴 액자만이 여전히 걸려 있지만, 그 타서 밝히던 한 자루 초는 어디를 갔을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되어진 사실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믿어지지를 않아 밤새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진상을 확인해보려 했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씨알의 소리 1975년 7,8월 합본호 중) 


한국 여성 변호사의 효시라 할 이태영 변호사가 이제 어떻게 사느냐며 부인을 잡고 울부짖었을 때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한 번 가져온 적이 있었어야지요.”


장준하의 방 벽에 걸려 있었다는 액자 일주명창(一炷明窓)은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힌다.”는 뜻이다. 장준하라는 심지는 평생 자신을 태우고 자신의 가족의 일상적인 행복마저 불살라 가며 전 세계적으로 어둡던 동방의 한 나라의 창을 밝혔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私)가 없이 공의(公義)를 위해 산 사람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장준하의 등불만큼 특별하게 영롱하며 세월이 가도 이지러짐이 없는 빛은 흔하지 않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의 추모 강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 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 뿐입니다.” 


그 ‘잠시’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으른 술래가 된 우리는 역사 속으로 숨어 버린 그의 모습을 짐짓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꼭꼭 숨은 그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찾아 외롭게 의롭게 세상을 밝히다 간 한 사람의 생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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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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