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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 할 때가 있었습니다. 나쁜 짓을 즐겨 했다는 건 아니고, 각종 범죄나 사건들의 뒤를 경찰과 함께 추적하는 프로그램으로 날을 지새우던 무렵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어떤 경찰서든 캐비넷 하나 그득하도록 사건들은 쌓여 있었지만, 그 중에서 방송 아이템 하나를 끄집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울 남쪽의 한 동네에서 흥미로운 사건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한 동네 전체가 쑥밭이 됐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가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기극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동네에서 돈놀이를 해 오다가 돈이 웬만큼 모이자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었지요.

 

화려한 수법으로 수백 억을 감쪽같이 챙겨 종적을 감추는 사기꾼들도 수두룩 빽빽한 판에 그런 가벼운(?) 사기를 방송 아이템으로 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때 우리 시야에 한 사람이 혜성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동네 파출소 순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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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피해 동네를 다시 한 번 찾았을 때, 문제의 사기꾼이 정말이지 못할 짓을 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의 분들, 독거 노인들, 노점상들, 행상 등등으로 구성된 동네 주민들은 은행 이자보다 훨씬 높게 이자를 쳐주는 범인에게 돈을 맡겼고, 범인은 '귀신보다 더 정확히' 이자를 미리 건네면서 신용을 쌓아 갔습니다.

 

'국회의원 나와도 그 사람은 될 거다.'라는 신망 속에 쌈짓돈을 긁어낼 대로 긁어낸 다음 그는 어느 날 새벽,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린 겁니다.

 

성이 박씨라서 옛날 드라마의 제목 마냥 촬영 내내 ‘박 순경’이라 불린 우리의 박 순경은 참으로 악착같이 범인의 뒤를 추적하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파출소에서 밤새며 취객들과 싸우고, 하루는 경기도 일대를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니며 범인의 뒤를 쫓는 추적 과정에서 하나 얻어낸 성과는 범인의 핸드폰 번호였습니다.

 

위치 추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라 별반 도움이 될 일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 번호는 꽁꽁 숨어 버린 범인과 선이 닿을 수 있는 가느다란 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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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순경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그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몇 번 대기음이 들린 후 딸칵 소리가 났을 때 우리 모두의 귀는 팽팽한 긴장으로 바짝 당겨졌지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진귀한 대화였습니다.

 

“여보세요. ”

 

느물느물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를 침착한 박 순경이 받았습니다.


“XXX 씨? 나는 XXX 씨 쫓아다니는 경찰관입니다.”


일순 당황스런 침묵을 예상했건만 수화기 저편의 상대는 보통을 넘어선 인물이었습니다.

 

“아이고 수고하시네요.”

 

수고? 이 자식 봐라. 옆에 앉았던 카메라 감독이 뿌드득 이를 갈았습니다만 박 순경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습니다.

 

“그런 짓할 때 양심이 허락을 하던가요?”

 

그러자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두 배로 높아졌습니다.

 

“시건방진 소리 하고 있어.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당신 직분이 뭐야?”

 

그리고 전화는 딸칵 소리를 내며 끊겼지요. 전화가 끊긴 뒤에도 전화기를 들고 있던 박 순경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내 직분이 있으니까 당신을 잡으려는 거 아니오.”

 

전화를 끊은 뒤 박 순경은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인광이 나올 정도로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지요. 잘못 건드렸다가 폭발해 버릴 듯한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어서 우리는 한동안 봉고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지요.

 

시간이 11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다음 날 새벽 그는 파출소 근무였으므로 촬영을 접어야 했습니다. 어제 밤을 꼴딱 새우고, 오늘 우리와 함께 녹초가 되도록 인천, 서울, 경기 3개의 시 도를 누비고 다녔고, 내일 새벽 다시 파출소 근무... 아니할 말로 범인이 훈계한 대로 그의 '직분'은 기소중지자를 쫓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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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조사계나 강력계나 수사계의 진짜 '형사'들이 해야 할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파출소 순경과는 해당 사항이 별로 없다는 쪽이 차라리 맞았습니다. 그는 적잖이 주위의 눈총도 받은 모양이었고, 특히나 촬영의 대상까지 되자 이런저런 견제와 타박도 들었던 모양입니다.

 

카시트에 파묻혀 작은 눈만 빛내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놈 잡으면 그래도 박 순경 승진하겠죠?"

 

거리에는 '기소중지자 일제 검거 기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박 순경이 그 눈빛만큼이나 열띤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러고 다니는가 하면요. 제가 왜 이놈을 잡으려고 애를 쓰냐 하면요. 밑바닥 사람들이 평생 모은 돈, 한 푼 두 푼 장판 아래 모아 놓은 돈을 들고 튄 놈이기 때문이에요. 수십 억, 수백 억 사기를 치는 놈들도 많지만, 그 사람들을 쫓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하지만 이런 놈은 아무래도... ”

 

열기를 뿜으며 말하던 박 순경의 입이 갑자기 닫혔습니다. 경찰서 캐비넷 그득한 사건 속에서 이 사건은 그야말로 '소소한' 사건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더 덩어리 크고 굵직한 사건들의 홍수 속에서 그리 큰 주목의 대상이 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1억 가진 사람 5천만 원 해먹은 것보다 백만 원 가진 사람한테 십만 원 해먹은 놈이 더 나쁜 놈일 수도 있었기에(박순경 본인의 멘트였죠)" 동네 파출소 순경 박 순경은 몸이 부서져라 범인의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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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나간 뒤 범인은 시청자 제보를 통해 1주일 만에 체포되었습니다. 박 순경도 체포 현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직접 그 뒷덜미를 잡아채지는 못했고 다른 형사들이 가스총을 쏘며 저항하는 범인을 가까스로 체포할 수 있었다지요. 이후 저는 박 순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함께 촬영했던 카메라 감독이 박 순경은 이제 순경이 아니라 형사로 임무를 바꿔 활약하고 있으며 (범죄자들에게) 악명이 높은 악바리 형사로 이름이 드높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저는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가 왜 악명(?)이 높은지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나 할까요.

 

'내 직분을 아니까 당신을 잡으려는 거 아니오.'라고 입술 깨물며 말하던 예전의 박 순경을 떠올리면서 '박 형사 파이팅!'을 되뇌며 괜히 비실비실 웃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시절 핸드폰은 무척 귀할 때였습니다. 통화 요금도 장난 아니게 비쌌고요. 그런데 박순경 외에도 제가 만났던 형사들은 서울 강남 경찰서건 부산 영도 경찰서건 땅끝마을 해남 경찰서건 죄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통화비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휴대전화의 유혹을 억지로 참고 있던 저로서는 감탄이 일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경찰들은 휴대전화를 다 지급받았군요.”

 

돌아온 어이없는 대답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준 거 아니에요. 범인들이 죄다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서로서로 연락하면서 도망 다니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사야지. 이거 다 우리 개인 돈으로 샀어요. 통화비도 개인이 내요.”

 

한국 현대사에서 경찰의 역사는 그리 명예롭지만은 않습니다. 악질 친일 경찰의 인맥을 청산하지 못했고 독재의 주구 노릇도 했습니다.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적잖은 횡포도 부렸고 부정부패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눌러야 하는 번호는 112였고, 왜 빨리 오지 않느냐고 안달을 부려야 할 대상이었으며,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몸을 던지고 제 돈 써 가며 꽁꽁 숨어버린 머리카락들을 찾아다닌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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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별안간 던져진 ‘미친 개’의 모욕은 그래서 황망합니다. 더구나 그들을 ‘독재의 주구’로 만들었던 세력의 후신들 입에서 그 소리가 튀어나오는 건 더욱 어이가 없습니다. 경찰의 명예 회복을 기원합니다. 그러려면 오늘의 모욕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각오 모두 필요하겠죠.

 

개인적으로 만났던 수많은 경찰관의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을 떠올립니다. 얼굴은 이미 가물가물하나 목소리는 상당히 쟁쟁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중 하나입니다.

 

“PD나 우리나 비슷한게... 여러분들도 특종 하나 잡으면 그 짜릿한 맛 때문에 계속 하는 거 아냐? 우리도 그래요. 너 아무개지? 하면서 뒷덜미 딱 잡고 수갑 딱 채울 때 그 맛... 그 손맛 때문에 이 일 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