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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구를 찾은 게 아니라 친구가 생겼다. 파문 당한 후 라인 강변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기까지의 4년간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추적하기가 어렵다. 라틴어 수업의 조교 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추정될 뿐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스피노자는 히브리어 이름 '바뤼흐'를 버리고 같은 뜻의 라틴어 '베네틱투스'로 이름을 바꿨지만 그게 그거다. '베네딕툼'이란 필명을 쓴 적도 있지만 마찬가지다. 촉각을 곤두세우면 소문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철학적 소신을 지키기 위해 파문과 추방을 감수한 유대인 청년이 있다는 소식은 네덜란드의 젊은 인텔리들에게 강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대체 누구이기에? 이 질문은 곧 다음의 단계로 이어진다. 얼마나 대단한 신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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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좀 한다는 젊은이들은 입소문을 공유하며 스피노자를 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기세 좋게 토론을 신청한 이들도 있었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스피노자의 천재성과 혁명성에 탄복했다. 그들은 엷은 미소를 잃지 않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미남자를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빌헬름 바이셰델은 그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철학의 뒤안길>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지 않아도 고독에 젖어드는 성향이 있던 스피노자는 더욱 깊이 고독 속으로 젖어들었다. (중략) 그는 '흡사 그의 서재에 매장되어 있는' 듯했다. (중략) 그에게는 몇 안 되는 친구가 있을 뿐이었으며 편지 왕래도 매우 드물었다."

 

바이셰델의 해석이 일반적이다. 반면 스피노자가 고독한 은둔자라는 평가는 전혀 사실과 다르며, 다양한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했다는 설명도 있다. 심지어 자유주의 성향의 공화정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중심적 인물이었다고도 한다. 진실은 어느 쪽인가?

 

둘 다 맞다.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는 까닭은 스피노자는 고양이였고 그의 팬들은 개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고독 속에서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먼저 편지를 보내오는 것도, 의견을 묻는 것도, 찾아오는 것도 지인들이었다. 스피노자가 먼저 연통이라도 넣어줄까 수개월 기다려봐야, 먼저 기별을 넣는 건 이쪽이었다.

 

지인들은 스피노자가 자리를 잡고 렌즈세공으로 먹고 살기 시작한 때부터 가끔씩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그를 찾아왔다. 여럿이 찾아올 때는 스피노자에게 직접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스피노자는 친구들의 요청에 철학적 견해를 편지 써 주곤 했다. 친구들은 그의 편지로 세미나를 열었다. 그러다 결국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직접 가르쳐주십사 방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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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공화정 지지자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설명도 이래서 가능하다. 소박한 성격의 스피노자는 낮에는 렌즈를 깎았고 밤에는 철학을 했다. 다만 정치 담론에 대해 물어보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답장을 써 주었을 뿐이다. 공화파 엘리트들이 이 답장에 달려들어 해답을 갈구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스피노자가 화제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야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렌즈깎이에 몰두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스피노자의 철학적, 정치적 견해를 떠들고 다닐 수 없었다. 무신론자로 소문난 스피노자의 친구임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스피노자와 그의 지지자 겸 친구들은 자기들만의 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해 교류했다. 첫 책을 내기도 전에 이미 물밑에서 컬트적인 팬덤을 거느렸다.

 

스피노자처럼 자기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고초를 당하고 미움받으면 어쩔 수 없이 유치해진다. 누구나 이럴 때만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되어 자신을 이렇게나 괴롭히는 세상에 대해 억하심정을 가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진리를 추구한 죄로 저주받는 이가 다름아닌 나 자신일지라도 그들은 그저 인간일 뿐 악마나 짐승이 아니다. 분노를 정당화하는 결론을 내린다면 인간과 우주를 음미하는 데 방해가 된다.

 

"자기 감정의 먹잇감이 되는 사람은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해보려는 참을성이 없음은 대중의 인간적 흠결일 뿐이다. 흠결이 있기에 더 나아질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슬퍼하지 마라. 분노를 키우지도 마라. 이해하라."

 

"이해하려는 노력은 미덕의 처음이자 전부다."

 

스피노자는 아무리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세상은 살 만한 곳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자신을 저주하는 이들의 지성이 그만 못하다는 이유로 낮잡아 보지도 않았다. 그도 다른 이들도 다 같은 인간일 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심리에 대해 그는 냉소적이다.

 

"자존심이란 인간이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데서 피어나는 쾌락이다."

 

지식과 지성은 다르다. 지성은 앎에 더해 태도까지를 포함한다. 이런 면에서 철학자 스피노자의 지성은 압도적이다.

 

개인의 인격과 욕망, 그리고 한계까지도 그 자체로 존중의 대상이 되게끔 하려는 집단적 행위.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치다. 모든 인간에 대한 전적인 존중을 토대로 삼지 않은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통치이며 지배에 불과하다.

 

인간은 버려도 되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서로를 끝없이 붙잡아야 하는 존재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사회에 받은 탄압에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의 정치학을 펼친다. 스피노자에게 사회란 인간이 인간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곳이다.

 

"증오는 주고받음 속에 자라난다(증오가 증오를 낳고 키운다.). 다른 한편으로 증오는 사랑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다. 사랑에 의해 완전히 소멸된 증오는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러하기에 사랑이 보다 위대하며, 증오의 충동이 사랑보다 우월했던 적은 없다."

 

이상하다. 스피노자는 혼자서 신과 우주를 음미하는 차가운 개인주의자가 아니었던가? 철학사에서 그에 대한 표현은 이렇다. '신에 취한 사나이', '은둔의 철학자'. 이제 보니 공존과 형제애를 부르짖은 온화한 감성의 소유자인 것 같지 않은가?

 

스피노자에게 있어 개인주의와 사회공동체주의는 한 몸이다.

 

개인의 사상과 자유는 그 자체로 무한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각 개인이 권력을 공평히 나눠 가진 사회여야만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공화정을 지지했으며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공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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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윤리학>

 

스피노자는 국가의 미래는 공화국임을 예견했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윤리학>은 근대시민윤리이자 민주주의 법철학의 근간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말했다.

 

"윤리학에 있어 스피노자보다 뛰어난 철학자는 없다."

 

이는 천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의 기대를 배신하고 인격살해를 감수한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이다. 위대한 개인주의자만이 선량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다. 이기적인 인간이어야 타인의 이기심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인스뷔르흐에 정착한 스피노자는 먼저 철학적 메모의 모음인 <소고(小考)>를 정리한 후, 1661년 <지성개선론>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은 끝까지 미완결로 남았다. 영화 용어로 말하자면 <지성개선론>은 필생의 대작인 <윤리학>의 플롯에 해당한다. 사상을 완성하기 전에 결론을 미리 내릴 수는 없다. 정작 시나리오인 <윤리학>을 완성하고 나니 제작 과정인 플롯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완성될 수가 없는 책이었다.

 

스피노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해인 1662년 서른 살의 나이로 <윤리학>에 도전했다. 그리고 반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1부를 완성했다. 원래 3부 구성으로 구상한 책이었으니 1/3을 뚝딱 해치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완성하는 데는 결국 1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5년 동안 책 하나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당연히 다른 일도 해야 한다. 무슨 일일까. 철학의 순서다. 윤리학으로 먼저 점프할 수는 없다. 철학의 토대가 있어야 한다. 인간과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밝히는 존재론이 먼저다. 그 위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장하는 윤리학의 차례다. 마지막 단계가 아름다움과 추함, 쾌와 불쾌를 다루는 미학이다. (그래서 학부 과정에 미학이 있는 대학은 서울대를 포함해 전 세계에 둘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은둔 생활을 잠시 포기하고 1663년 잠시 가정교사 생활을 한다. <윤리학> 집필 완성을 위한 단계였다. 자신을 철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데카르트를 자신의 분석으로 명료하게 정리해야 했다. 가정교사를 부를 만한 집안에는 장서가 많다. 수업료를 기꺼이 지불할 만하다면 없는 책도 금방 조달해줄 수 있다. 가정교사 생활은 자료를 빨리 얻기 위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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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이렇게 데카르트 해설서인 <기하학적 방식에 근거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를 집필했다. 책은 스피노자의 친구들 즉 컬트적 팬덤의 돈과 인맥으로 출판되었다. 이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사상적 제자였고 그를 지지하는 친구들 역시 데카르트 신봉자였다. 이 책은 스피노자가 생전에 유일하게 본명을 숨기지 않고 출간한 작업물이다.

 

데카르트를 졸업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넘어서고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나가는 여정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1차 목표지점은 1670년 출간되는 <신학 정치 논고>였다. 이 책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데카르트보다 불편한 지식인이 출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데카르트는 일반 커피였으니.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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