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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東萊)에 서일월(徐一月)이란 여인이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고갑산(高甲山)의 꾐을 받아 몰래 왜관(倭館)에 들어가 왜인들과 교간(交奸)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동래 부사 민태혁(閔台爀)이 계문(啓聞)하였다.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여 서일월은 법전(法典)에 의거하여 장배(杖配)하고, 고갑산은 절도사로 하여금 군위(軍威)를 베풀어 놓고 관문(館門) 밖에서 효시(梟示)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정조 11년(1787년)에 있었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국제적인 포주 ‘고갑산’의 등장이다. 사건의 내용은 의외로 ‘싱겁다’.

 

동래에 살던 포주 고갑산이 옆집에 사는 서일월이란 여자를 설득해 왜관으로 데려간다. 여기서 서일월은 일본인 다섯 명에게 성매매를 한 거였다. 조사를 해 보니 서일월 말고도 4명의 여성을 더 모아서 왜관에 보냈고, 이들 모두 일본인들에게 몸을 팔았다.

 

조선의 법체계 안에서 외국인과의 ‘성교’는 불법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불법이다. 바로 범월잠간(犯越潛奸 : 조선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이다. 중종시절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성매매였다.

 

당시 왜관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조선인 포주들이 데려온 ‘전문여성’들과 합의하에(대가를 주고) 성매매를 했는데, 이게 적발이 됐다. 이때 조선 조정은 성매수를 한 일본인을 잡아다가 머리채를 노끈에 묶어 나무에 매달고, 활로 노끈을 쏴 떨어뜨려 죽였다. 이후에도 일본인과의 섹스는 엄금했다.

 

그 뒤 200여년이 흘러 고갑산이란 국제적 포주가 전문직 여성 5명을 고용해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을 한 거다. 정조는 분노했다. 즉시 고갑산을 체포해 처형했고, 몸을 판 5명의 여성들을 섬으로 유배 보냈다.

 

문제는 왜관에 대한 외교적 항의였다. 당시 동래부사였던 민태혁은 왜관 측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일본측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정조는 화가나 민태혁을 파직 시키고, 후임으로 도총관(都摠管 : 정2품으로 5위도총부를 총괄하던 군직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합참의장의 위치였다) 이계(李溎)를 그 자리에 보냈다. 무력시위라고 보는 게 옳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민족적 자존심이란 게 있었는데, 불과 100년이 흐른 뒤 조선의 영토에는 집창촌이 생겨났고, 또 거기서 60여년이 흐른 뒤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몸을 팔라고 권장하는 시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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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에 등장한 집창촌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집창촌’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지금도 우리의 뇌리 속에 박혀 있거나, 볼 수 있는 유명한 집창촌들을 떠올려 보라. 부산 완월동(한때 동아시아 최고(最古), 최대의 집창촌이라 불렸던 곳), 인천 옐로우 하우스, 대전의 중동, 대구 자갈마당 등등 성매매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명들의 연원은 일제 강점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지도를 펴 보면 알겠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집창촌의 기억들은 구한말 일본에게 내준 개항지나 일본이 건설한 ‘철길’을 따라 만들어졌다. 개항지 집창촌, 철도 집창촌의 시작이다.

 

처음으로 이 땅에 ‘근대적인’ 집창촌이 만들어 진 건 1879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빗장이 열리게 된다. 1879년이 되면 일본 상인 한 명이 부산에 유곽을 만들겠다며, 오사카에 있는 ‘전문여성’을 모집하러 간 기록이 있다. 이때 이미 일본 여인들이 들어와 ‘영업’을 뛰고 있었다.

 

이후 국제정세가 요동치면서, 집창촌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뒤이어 일본군도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등 국내외 정세가 요동친다.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었다. 일본군이 자리를 잡자, 스물스물 일본민간인들도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부산, 인천, 원산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됐다. 그리고 공창(公娼)이 시작된다. 1902년에 부산 부평동의 아미산하(峨媚山下)유곽이 조성됐고(열자마자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렸고, 대성공을 하게 된다), 뒤이어 인천 선화동에 시키시마(敷島) 유곽이, 다음해인 1903년에는 원산에 신정 유곽이 등장한다.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용산은 임진왜란 시절부터 타국 군대의 주둔지로 낙인 찍힌 땅 같다)에는 대좌부업(貸座敷業 : 식당에서 성매매를 위해 방을 빌려주는 것. 방만 빌려주는 건 아니다)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 둘 생기게 된 유곽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게 된 건 러일전쟁 덕분이다.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일본군이 물밀 듯이 몰려들어오게 된다. 군인들이 몰리고(당시 서울에 몰려든 일본군의 숫자는 청일전쟁 때의 4배가 넘어갔다), 그 뒤를 쫓아 군인을 상대로 한 민간인들이 달려왔다. 남자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황.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달리게 된다.

 

1904년 마침내 서울에 유곽이 등장한다. 신마치(新町) 유곽이다(1904년 10월 25일 ‘제일루’가 등장하면서 한반도 집창촌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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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를 바라보는 당시 조선인들의 반응이다.

 

조선 사람들도 성매매를 했다. 기생이 있었고, 노비도 있었고, 술집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대단위’ 집창촌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제 조선의 ‘성풍속’도 변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조선보다 앞서 개항을 했던 청나라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청나라는 그 인구에 비해 성매매의 비율이 낮았다.

 

“성매매 보다는 첩”

 

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개항을 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성매매 업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1930년대가 되면 상하이에서만 10만 명의 창녀들이 활동하게 된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일본인 여성들로 그 수요를 채웠지만, 곧 ‘조선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기생과 창기들이 일본인을 상대하게 됐다. 문제는 조선의 ‘성매매 규모’와 ‘성매매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조선시대 ‘기생’이란 존재는 어찌 보면, 제도권 내. 특권계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그 수도 적었지만, 명목상이나마 이들은 ‘예능인’ 대우였다. 이들은 몸을 팔기도 하지만, 춤과 노래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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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넘어선 매춘에 대해서 조선은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여성의 정조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였기에 공권력을 동원해 양인 여성들의(설마 양반 여성들이 매춘을 꿈꿨을까? 어우동, 유감동이 있었지만 이건 극히 일부의 일탈이다) 성매매를 막았다.

 

성매매는 고사하고, 정조를 잃은 것 만으로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게 어려웠다. 만약 이 위험부담을 떠 안고 성매매 업에 뛰어들다 걸리면, 노비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집창촌을 접하게 된 조선인의 반응은 어땠을까? 알음알음 기생집을 드나들거나 주모와 관계하던 조선인은 압도적 규모의 ‘집창촌’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실질적으로 ‘불편’해졌다.

 

대규모 집창촌이 아니라 주택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조선의 성매매 여성들(기생들과 유녀들)을 찾아서 일본인들이 알음알음 찾아오게 된다. 이러다 보니 멀쩡한 가정집에 들어가 여자를 내놓으라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주소를 착각한 경우).

 

결국 대한제국 경무청에서는 기생들의 기둥서방들을 불러 모아 지금의 명동 근처에 기생들을 집결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대한제국 최초의 집창촌이 등장한 거였다.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뒤 ‘전문여성’의 거주지를 지금의 을지로 3가로 제한한다.

 

(이때 대한제국은 외국인을 상대하는 ‘전문여성’의 집을 매음가, 국내인을 상대하는 집을 ‘상화가’로 구분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데, 집창촌을 형성하고 일본인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민족감정의 폭발해 감정적인 대응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감정적 대응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요’ 덕분에 성매매 여성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었고, 이로 인한 폐해가 만연했다. 매독과 같은 성병 발병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덩달아 성폭력 사건도 폭증했다. 게다가 난생 처음 보는 집창촌에 눈이 돌아간 조선인들의 발길도 점점 증가하면서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터졌다.

 

결국 이들을 집단적으로 관리하는 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단 생각에 집창촌을 만들게 됐다.

 

대한제국은 그렇게 또 한 번,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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