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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 역에서 바라본 노트르담 성당 - 우리가 아는 노트르담의 꼽추는 파리를 배경으로 빅토르 위고가 썼으나 배경이 노트르담 드 파리다. 뮤지컬 노트르담드 파리가 나왔을 때, 원작과 꼭 같은 제목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주인공 중에 하나인 콰지모도의 신체장애를 부각해 '꼽추'라고 바꾸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다. 모든 성당에 노트르담이 들어가는 이유다. 옛날 옛적에, 비틀즈가 부른 노래를 해석하며 영어 공부를 할 때 마더 메리가 우리에게 와 말씀하시기를... 정도로 해석하면서 마리 엄마를 왜 가사에 넣었을까 미스터리한 가사가 불어로 노트르담이다. 즉, 성모 마리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때, 이단으로 배격된 아리우스 파가 주장한 창조된 존재로써 성모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신학이다.

 

탈락자들이 도착한 마르세유역은 슬픔의 역이다. 적막의 역이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별의 역이다. 누구든, 어떤 사연을 품고 자원했던 간에 돌아갈 땐 마르세유 역에서 자신이 돌아온 곳, 혹은 잠적할 곳을 향해 어딘가로 떠날 기차를 타야 한다. 나는 이곳을 벌써 두 번 경험했었다. 95년, 96년 탈락했을 때다. 다행히 97년엔 의사전달이 가능해 남아 있게 되었지만 시간이 흘러, 대테러 경비 때문에 왔었고, 프랑스 월드컵 때도 왔으며 프랑스 육군 병원이 마르세유에 있어 탈락자로써가 아닌 외인부대원으로써, 여러 번 마르세유를 방문했었다. 제대 말년엔, 한 달에 한 번, 사령부에 보고를 위해 들렀었고 역에서 내려가면 보이는 구 항구에서 갖 잡아온 생선을 사서 호텔에서 회를 쳐 먹기도 했다. 마르세유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 도시였으나 리옹과 보르도의 발전으로 점차 경쟁에서 밀려났다.

 

역에서 구 항구까지 가는 길은, 프랑스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 베르베르인들이 산다. 그들은 알제리, 모로코, 혹은 튀니지 등등의 국가들이 섞여 살아가지만 크게는 두 종족, 즉, 토속 민족인 베르베르인들이 프랑스 식민지를 거치며 양차 대전까지 프랑스를 위해 싸운 덕에 고향을 떠나와 장착을 하게 된 경우와 7세기 아랍 정복자들이 역시,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며 프랑스로 들어와 주로 정착한 곳이 마르세유였다. 그들은 질이 아주 나빴다. 내 프랑스 인생을 통털어 어울리고 싶지 않은 언행의 소유자들로 거짓말을 밥 먹듯 했고 눈 깜빡할 때 도둑질을 했다. 그들을 따로 마그렙이라 불렀다.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족은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그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네딘 지단이 베르베르이고 언어도 아랍어가 아니었는데 매부리코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꼭 같이 생겨 보여 차이점을 나는 발견할 수 없었다.

 

탈락자들이 그렇게 떠나고 나는 남았다.

 

지원병 대기 중대로 돌아오니 같이 있던 한국인 동료들이 신기해했다. 명백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저녁이 되자 남미의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제3외인보병연대(3eme REI) 2년 근무를 마치고 본토 자대 배치를 위해 사령부로 와 있던 '안 병장; CPL AHN'이 찾아왔다. 자기가 전화해서 아까운 인재이니 탈락을 막았다고 말했다. 자기 말을 잘 들으라 했다. 그 이후로 안 선배를 나는 믿지 않았다. 병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럴 경우의 수는 있었다. 내가 독일인 게쉬타포 상사와 열변을 토하며 내가 외인부대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할 때, 그가 행정중대로 전화를 했고 병장 출신의 한국인이 있다는 알고 전화를 받은 안 선배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경우의 수, 그러려면 통역을 하러 현장으로 왔어야 했다.

 

탈락자와 선택 되어지는 자!

 

기준점은 나도 모른다. 오랜 전통에 따른 군 기밀인지, 기준점이 있기는 한지 의문투성이이지만 나는 모른다. 제대 말년에 물어보러 들어갔다가 40일 영창을 살기도 했다. 여튼, 나는 그 이유를 아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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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 사령부는 알제리에 있었다. 알제리 전투에서 패하던 1962년, 샤를드골의 철수 명령에 따라 1962년 10월 26일 오바뉴로 옮겨왔다.

연병장 한가운데 외인부대원 추모비에는 '명예와 충성'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남았다.

 

중대엔 나 외에도 5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더 있었다. HID 출신이 둘이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 출신들로 내놓으라 하는 한국 군대 경험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즐겁고 우애 좋게 미지의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한국인으로써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군대 경험이 없었지만 한국인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28세였다. 많은 나이에 이뤄 놓은 것 없이 미래가 없다고 자책하던 시기에 외인부대는 나 같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는 두 가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저격 기술을 배워 일왕을 저격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외인부대 책을 쓰는 것이었다. 돈을 벌겠다거나 영주권이나 국적을 취득하겠다거나 프랑스에서 살겠다는 미래에 대한 계획 따위는 없이 단지 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빨간 견장을 단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30명이었다. 다음 기수로 30명이 합격하면 한 개 소대가 완성되었다.

 

사령부에서는 부대원의 신체에 대해 완벽하게 관리했다. 모든 옷들은 정확하게 치수를 맞추었다. 여분이 필요하면 바꾸거나 직접 PX에서 파는 사제품을 사 입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엑스에선 술도 팔았고 포르노 잡지뿐만 아니라 지방 특산물, 음식까지... 병사들을 위한 휴식 공간까지, 나에게는 별천지였다. 사령부에는 전 세계로 공연을 다니기도 하는 너무도 유명한 '외인부대 군악대'를 보유했고 월간 잡지 '케피블랑'을 발간하는 중대까지 따로 있다. 프랑스령 가이아나나 아프리카 파병한 13여단 등등의 파병지에서 본토로 돌아오는 부대원들의 행정을 담당하는 CAPLE까지 포함해 3개 중대가 사령부를 지켰다.

 

180년의 전통을 가진 외인부대의 유서 깊은 역사만큼이나 전통은 물론, 제복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행사 때 입는 제복 2벌, 전투복, 훈련복, 군화 각각 두 벌씩, 체육복과 가죽 장갑까지 수령받았다. 모든 행정적인 문제가 처리되자 내일 훈련소를 향한다는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소대에 한국인은 나 혼자. 5살 때 프랑스로 온 입양아가 있었다.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얼굴로 성장했으나 프랑스 의식을 가진 그 녀석 이름이 광수였다. 5살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꼬추를 내놓고 찍은 사진 뒤편에 '이광수'라고 적혀 있었다. 25세였는데 프랑스 육군을 제대했다고 했다. 작지만 다부지고 똑똑해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을 살았다. 오늘을 사는 나는 카스텔노다리 훈련소까지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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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의 오장육부, 제4외인연대는 1976년 코르시카 섬에서 Castelnaudary로 이사를 왔다. 오른쪽엔 '외인부대 당주 대위 병영'이라 적혀 있다.

정문 양쪽으로 하얀 바탕에 들어가 있는 문양은 왼쪽이 프랑스 육군, 오른쪽이 4 RE를 뜻한다. 4연대는 전투부대가 아니다.

6개 중대로 구성된 교육대는 신병 교육을 위한 3개 중대(CEV), 사령부, 하사관 교육 중대(CIC), 특수 교육 중대(CIS)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3중대 1소대로 배치받았다. 노란색  중대 색깔의 어깨 견장을 수령했다.

 

9월, 가을의 향기가 드높았다. 상큼한 내음이 진동하는 듯했다. 아침이면 잔디 위에 이슬이 가득 맺혔다. 낯선 세계의 신비한 건물과 개인 침대와 관물함, 이불을 개는 법, 청소를 하고 관리하는 법, 연대의 곳곳을 다니며 명칭과 그 역할을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맑은 공기, 신비한 분위기, 그 분위기엔 그만의 향기를 가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맑은 하늘, 프랑스는 정말 복받았구나... 감탄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새로운 소대원들이 올 때까지 군가를 배우거나 제식 훈련, 외인부대 명예 훈령 7가지를 외우며 체력 훈련을 했다 구보를 하는 코스가 다양했다. 최소 10km를 소대장 뒤를 따라 뛰다가 마지막 스퍼트 2,3km를 남겨두곤 자유 구보를 했다. 외인부대의 최고의 전투력은 체력이었다.

 

2주가 흘러, 30명이 도착했다.

 

병장들이 군기를 잡았다. 각 방에 6명씩 배정받았다. 한 개 소대는 소대장을 위한 한 팀, 전투 단위 4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교육대는 모두 훈련병이므로 6개의 팀이 10여 명, 각 팀에 병장 교육을 받으러 온 진급자가 팀을 맡고 하사관 교육을 받으러 온 중사나 하사가 한 개 팀을 맡았다. 모두 교육생으로 구성되었다. 소대장, 상사나 중위, 대위가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원사가 있었다. 원사는 병으로 시작해 산전수전을 거쳐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모두들 인자한 삼촌 같기도 해서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인상 좋고 인성 좋으며 체력도 좋았다.

 

나는 신기한 이 분위기에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러나 한국인 출신으로 한자리를 차지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말을 했고 '전우'라는 공통된 의식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랬다. 병아리 신병으로써 우리가 배우거나 외워야 할 것들을 인지하면서 특별난 체력 훈련을 하나 진행했는데 300미터 장애물 통과였다. 인원이 채워지고 모든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농장'으로 간다고 했다.

 

"복도로!"

 

모로코 출신 하비 병장이 게슴츠레하고 기분 나쁜 눈빛으로 복도에서 외쳤다. 당직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지원병들이 복도로 모였다.

 

"점호!"

 

복도에 선 순서대로 숫자를 외치기 시작했다. 희한한 프랑스어 숫자의 나열이 각국 지원병들의 입에서 나왔다. 러시아 친구들이 9가 들어가는 숫자가 들어갈 때는 더더욱 기가 막힌 프랑스 숫자가 튀어나왔다. 러시아 친구들이 원체 많이 지원해서 제일 많이 탈락하기도 했고 소대의 구성원이 되었다. 다음으로 폴란드나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아프리카 본토 한 두어 명,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한 두어 명, 영국 애들이 두 명, 우크라이나도 세 명, 슬로바키아나 세르비아도 있었다. 뭐, 죄다 동유럽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한두 번씩 미국에서도 오고 일본 애들도 왔다. 중국 애들도 여럿 있었는데... 정말 의식이 밥맛 떨어지는 애들이었다. 잘하는 거 없이 업신여기거나 존중이나 철학 없이 잘난 체를 하는 이해 못 할 종족들이었다. 걔네들은 정말 볼품없었고 형편없는 불어 발음에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다행히 우리 소대엔 없었다. 일본 애도 없이 내가 아시아를 대표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애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국적은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외인부대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출신이 존재하지 않고 프랑코폰, 즉 프랑스어를 하는 국가 애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이름도 그랬다. 내 성은 한국에서 '전 씨'이지만 여기선 '준'이고 나머지는 익명이었다. 이름은 모두 바뀌었고 3년 근무 때가 되어야 되찾을 것인지 완전히 바꿀 것인지에 대한 행정 절차를 밟아야 했다.

 

소대의 구성원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동료들이 제일 많았다. 그렇게 '비놈'이라고 불어를 못하는 애들과 짝을 지어 불어를 배우게 하고 내려오는 명령들을 이해할 때까지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불어할 줄 아는 친구들을 프랑코폰이라 했고 불어권을 뜻한다. 그들 중엔 북아프리카 마그렙 출신들이 있었다. 하비 병장이 모로코 출신, 소대에 '께발리'라는 애가 있었다. 나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알지 못했고 아랍 애들을 처음 봤다. 신기했지만 하는 짓과 생김새가 아시안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는 사랑과 희생이 기본 바탕이다. 사랑과 희생은 없이 오만한 자부심은 도대체 뭔가! 중국 애들과 붙여 놓으면 상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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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외인부대의 행군은 빠르기로 유명하다. 나는 177cm로 소대에서 중간 정도 키인데 행군할 때 거의 뛰다시피 한다. 아름다운 광경들을 많이 본다.

남의 나라에서 행군이라니. 아름다운 자연과 건물, 잘 정리되고 정돈된 땅, 몸과 의식은 힘들어도 정신은 '프랑스는 참 아름다운 나라구나'라고 말한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소대장, 중대장 면담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했던 얘기들을 그들이 묻고 너희는 대답한다. 프랑스어를 하든 못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규정이며 규정에 따라 중대장은 너희들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자기소개를 숙지하고 들어가서 실수 없이 소개를 한다. 이해 못 한 사람? 질문? 오케이, 질문 없는 것이 최고의 질문이다!"

 

하비가 시범을 보였다. 우리는 그가 하는 말을 수도 없이 연습했고 이제 그 첫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외운 프랑스어로 하는 소개이긴 하나 시간이 지나 제대할 때까지 대령인 연대장에게도 장군에게도 한다. 간단하지만 소개와 더불어 베레모를 벗는 순간이 있고 내려오는 명령도 있어서 실수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오늘이 그 첫날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긴장감도 없이 노크를 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대장이 잘 보이는 곳에 차렷 자세를 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베레모를 벗었다.

 

"지원병 준! 2개월 근무, 3중대 상사 알브레슛 소대, 특기; 소총수! 명령만 내리십시오!"

 

"열중 쉬엇!"

 

"열중 쉬엇 하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좋아 욘! 외인부대에 왜 지원했나?"

 

예리한 눈빛의 알브레슛 상사는 미소를 지으면 질문을 했다.

 

사령부에서 했던 얘기들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하도 똑같은 질문을 해서 '왜 똑같은 질문을 하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주고받는 눈빛과 반복된 언어들은 하나씩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신변 보고는 사병 평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기본 신상명세 다음에 항상 신병 소개 때의 자세와 반듯함, 목소리에 실려 있는 힘, 무엇을 배울 것이며 얼마 동안 근무할 것인지, 애로사항이 있는지 등등을 물었다. 특히 훈련소 끝난 후, 어느 연대에 지원할 것인지와 보직에 대해 세심하게 물었다. 그가 독일인이라서 그런지 내 이름을 '준'이라고 했음에도 '욘'이라고 불렀다.

 

"좋아 욘! 우리 소대는 내일 중대장 면담을 끝내고 모레부터 농장에 들어가서 4개월 동안 기본 훈련을 하게 된다. 무사히 마쳐야 외인부대원으로서의 제일 중요한 케피블랑 수여식을 하게 된다. 열심히 해서 최고의 외인부대원이 되길 바란다. 돌아가도 좋다!"

 

"돌아가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외인부대의 '뒤로 돌아'는 우리나라와 많이 달라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을 열고 나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다음 군번이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안에서 '들어와' 하면 들어간다. 나머지는 모두 복도에서 기다리며 연습을 한다.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식당까지 군가를 부르며 걸어가 식사를 하고 청소당번 몇몇이 남고 나머지는 돌아와 청소를 한다. 저녁엔 다시 밖으로 나와 행진하며 군가를 배우고 당직 병장의 지시에 따라 명예 헌장을 외우거나 소일했다. 쓸데없이 트집 잡거나 을차례가 없었다. 깔끔했다.

 

개인적으론 졸린 게 문제였지만 다들 졸려 했다. 담배를 못 피게 했지만 들켜도 뭐라 하지 않았다. 때때로 복도에 불려 나와 당직 병장의 잔소리를 들었다. 저녁 점호 때, 복도에 신병을 집결시킨 술 한잔 한 당직 하사들은, 한 명씩 병사들 앞을 지나가며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뱃살이 흘러내린 허리춤을 쥐어잡고 고함을 질렀다.

 

"이 비곗덩어리를 없애라 병사들이여!"

 

우리 소대원들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다. 안되는 불어로 조금씩 대화를 하고 누가 뛰어난지, 누가 모자란지 누가 못됐는지 혹은 교활한지를 조금씩 알아갔다. 각 국별로 담소를 나누는 것은 여전했다. 누구도 내일 일어날 일을 염려하거나 현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친한 애도 생겼다. 광수와 나는 단짝이 되었지만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았다. 나의 비놈은 딱 보기에도 프랑스 애처럼 생겼는데 군인하고 어울리지 않는 뭐랄까... 양치기 소년처럼 순박하게 생겼다. 28세, 소대에서 내 나이가 제일 많았다. 프랑스 애 중에 나랑 같은 나이대가 한 명 있었고 18세의 계집애같이 곱상하게 생긴 애도 있었다. 소대의 중간 나이가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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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cours du Combattant: 전투 장애물 통과

 

기상나팔 소리가 들렸다. 교육대의 새벽이 깨어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침상을 정리하고 점호를 받으러 연병장으로 향한다. 오와 열을 맞춰 빵과 커피를 먹으러 간다. 오늘은 3중대 농장으로 훈련을 받으러 간다. 농장이라니... 외인부대원을 양성하는 농장인가? 처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빵과 커피를 마셨고 소대로 복귀해 청소를 끝냈다. 중대 집합 전에 꽁초를 줍고 농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군장을 챙겨 연병장으로 모였다. 트럭과 지프차(P4)가 대기 중에 있었다. 중대장이 소대 보고를 받고 지원병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지원병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부터 농장으로 향하게 됩니다. 케피블랑을 착용하는 순간까지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건강하게 돌아와 외인부대의 명예를 높여주길 바랍니다. 중대 차렷!"

 

"상사 알브레슛에게 명령권을 인계한다!"

 

중대장의 명령을 하달 받은 알브레슛이 같은 말을 했고 당직 중사에게, 중사는 다시 병장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일사불란하게 군장을 챙겨 트럭으로 향했다. 각 팀별로 일제히 트럭에 올라탔다.

 

"목적지를 향하여 시동을 켜라!"

 

상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차량이 시동이 켜지며 정적을 깼다.

 

처음으로 나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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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애묘, 40대를 위한 딴지미팅 목적으로 가입! 2018년 초 2개월간 탈퇴 후 재가입. 딴지 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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