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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정래
주연: 강하나, 최리, 손숙, 백수련, 서미지, 오지혜, 정인기, 김민수, 이승현, 박근수, 홍세나, 남상지, 차순형, 김시은, 박충환, 지윤재, 노지용, 윤정로, 정무성, 류신, 임성철
음악: 함현상
촬영: 강상협
15세 관람가 / Color / 127분


감독: 토마스 맥카시
주연: 레이첼 맥아담스, 마크 러팔로, 마이클 키튼, 리브 슈라이버, 존 슬래터리, 스탠리 투치, 빌리 크루덥, 닐 허프, 폴 가일포일, 엘레나 올, 라나 안토노바, 페이스 페이
음악: 하워드 쇼어
촬영: 타카야나기 마사노부
R (17세 미만은 부모 동반 하에 관람) / Color / 128분
원제: Spotlight





지난달, 한국 극장가에서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조정래 감독의 <귀향>이 1주일의 기간차를 두고 개봉했다. 이 끄적임을 완료해놓고 생각해보니, 두 작품을 연달아 봤다면 뭔가 다른 끄적임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두 작품을 같은 날에 연달아 보지 못했다. 대신 <귀향>을 외국 작품인 토마스 맥카시의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관람했다. 두 작품을 보니 뭔가 '동주와 귀향'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것 같았다.


<스포트라이트>는 60년대부터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서 90여 명의 보스턴 가톨릭 교구 성직자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아동 성추행과 강간을 몇십 년간 자행했던 실화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하여 세상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던 보스턴 글로브 신문의 기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조정래 감독의 <귀향>은 1940년대 한국에서 일본군이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명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성적 학대와 강간, 살인을 저질렀던 실화를 영화화했다. 작품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 중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지옥 같았던 과거 기억을 관객에게 오롯이 공유하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두 작품은 비슷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긴 시간 동안 미성년자들에게 성폭행을 가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두 작품 모두 동서양에서 아동 성폭행을 일삼는 최악의 변태 범죄자 집단이 보여주는 만행을 고발한다는 전개를 보이고 있고. 그러나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각자 영화적으로 취하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 두 작품을 감상하면 영화적인 부분에서 좀 더 적절한 방법은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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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 역시 어렸을 적부터 남의 집 애는 어떻느니 저떻느니 소리 들으며 컸으니, '비교'라는 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짓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딱히 비교 때문에 한쪽이 불쌍하게 손해를 입는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각자 나름대로 다른 영역에서 굉장히 주목할만한 성취를 거두고 있어서다. <스포트라이트>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다양성 영화'로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30만 명 가까운 흥행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귀향> 역시 펀딩을 통해 겨우겨우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현재 어지간한 규모의 작품들을 앞지르면서 330만 명이 넘는 상당한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다. 한쪽은 자국 내에서 저예산 개봉의 한계를 벗어나 제대로 흥행성공 하는 중이고, 다른 한쪽은 자국 내의 권위 있는 영화시상식에서 굵직한 개봉작들을 제치고 인정을 받았다. 두 작품이 주는 이미지가 '작은 영화'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둘 다 일종의 작은 '거인'처럼 보인다.


두 작은 거인들 중 아무래도 좀 더 신경이 쓰이는 쪽은 조정래 감독의 <귀향>이다.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일본군에 의해 중국 길림성의 위안소로 끌려간 소녀들의 고난을 보여준다. 손숙이 연기하는 영옥의 시점으로 그녀의 과거 기억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그녀는 주인공처럼 나오지만, 실질적으로는 '생존자들의 대표'에 가깝다. 그래서 과거로 넘어가는 순간, 위안부 피해 생존자였던 그녀는 다시 '소녀 중 하나'가 된다. 영옥뿐만 아니라 다른 소녀들의 이야기도 함께 보여준다는 얘기다. 위안소 이야기다 보니 성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어야 할 문제였다. 이것을 어디까지 묘사할지가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고민이었으리라. 결국 15세 관람가라는 등급을 받긴 했지만, 작품의 성폭생 시퀀스 연출은 깜짝 놀랄 정도로 직접적이다. 일본군이 주먹과 발로 끌려온 소녀들을 폭행하거나, 총으로 쏴 죽이는 순간들이 빈번하며 벨트를 채찍 삼아 때리는 가학적인 순간들도 등장한다. <귀향>은 당시 위안소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본군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듯 보인다. 전쟁물은 흔히 '전쟁의 참사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아래,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지 않아도 팔이 잘리거나 창자가 튀어나오는 고어 연출이 허용되곤 한다. 아마도 비슷한 기준으로 정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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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다룬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등은 여럿 있지만, '극영화'는 당장 떠오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2014년에 만들어진 임선 감독의 <마지막 위안부>가 있으나, 음. 어이가 없어서 언급은 따로 하지 않는 걸로..) 이런 상황에서 <귀향>이 만들어진 의의는 크다. 도전해 볼법도 한데, 예상보다 작품이 별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분야에 도전한 셈이니까. 그래서인지 작품의 꿈이 꽤 커 보인다. 시대를 재현하여 일본군의 잔악한 만행을 생생하게 보여주고도 싶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시스템이 피해자들의 상처를 곪게 만들어 죽이려 드는 현실도 포착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물론 비중은 전자가 더 크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이런 의의나 작품 자체의 사명감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잘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가 않더라. 아니.. 당연한 건가.


가령 나는 <귀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묘사한 일본군의 만행보다, 나이 든 영옥이 국가의 정책으로 생겨난 '정신대 문제 피해신고'를 하러 동사무소를 찾는 시퀀스가 훨씬 인상적이었다. 해당 시퀀스에서 그녀는 과거부터 앓아 온 무지막지한 트라우마를, 낯선 직원 면전에서 '인증'을 해야 한다. 작품은 여기서 피해자들을 보듬어줘야 할 조국이 전범 국가만큼 잔악하게 굴어대는 모습을 감상자에게 마주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영옥은 조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동사무소 직원이 생각 없이 '미치지 않고서야..'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외친다. 자신이 그 미친년이라고 말이다. 작품의 동사무소 시퀀스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는커녕, 묻어버리려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현재의 모습을 고발한다.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시퀀스는 지금 현재가 그 때의 과거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되묻는 순간이기도 하다. 거기서 오는 섬뜩함을 잊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귀향>의 동사무소 시퀀스는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흥미롭게 그 차이를 거론해볼만 하다. <스포트라이트>에서는 가톨릭 신부들에게 성추행과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이 보스턴 글로브 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는 전개가 초반부에 펼쳐진다. 작품은 그들이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응하는 모습들을 얼마간 보여준다. 피해자들은 고백하는 동시에 심한 심적 고통을 받게 되고, 때때로 말을 잇지 못하거나 결국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것이 피해자들의 울분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현재'에서 그 때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트라우마를 꺼내는 처절한 노력에 가깝다. 이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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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퀀스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포트라이트>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은 후, 그 때의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지금 현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노력한다. 작품의 주인공들 직업군이 기자니까 그렇지 않겠냐고 물을 수 있다. 그 말도 맞겠지만, 이는 결국 해당 작품이 소재에 접근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일게다. 과거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당시 바로잡지 못한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얘기다. <귀향>에서 묘사된 과거는 현재에 와서는 무의미하다시피 되어버린 상태이며, <스포트라이트>의 과거는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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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스포트라이트>에서 잊을 수 없는 시퀀스가 하나 있다. 바로 레이첼 맥아담스가 연기하는 샤샤 파이퍼가 한 카톨릭 성직자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보스턴 글로브 지의 기자 중 한 명인 그녀는 성직자를 만나자, 과거에 아이들을 성추행했느냐며 단도직입적 으로 묻는다. 그녀의 말을 듣는 로날드 파퀸이라는 이름의 신부는 아동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90여 명의 성직자들 중 한 사람. 그런데 파퀸 신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너무나 당연한 듯이 추행을 인정하면서 덧붙인다. 



"그치만 즐기지는 않았어요. 그걸 이해하셔야 해요. 확실히 해둡시다. 난 그 애들과 장난을 좀 쳤지만 최소한 강간을 하지 않았어요. 난 그 차이를 알아요." 샤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자, 신부의 대답은 머리를 둔기로 치듯, 일순간 모든 것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내가 강간을 당했으니까요." 



특정적인 시퀀스만으로 작품 전체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작품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 수 있을 여지는 보인다. <스포트라이트>는 이 때 강간을 당했다던 파퀸 신부의 이야기를 수수께끼처럼 남겨둔 채, 그를 이야기에서 재빨리 퇴장시켜 버린다. 보통 이 정도의 폭탄 고백이라면 고백한 신부에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범행과 관련된 가톨릭교 관계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들의 과거 이야기는 아예 없다. 이런 시퀀스를 보여줄 뿐이다. 샤샤가 나올 때, 아무렇지 않게 추행을 고백했던 파퀸 신부의 집 앞으로 남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어디론가 가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방금 전까지 존재했던 경악스러운 정서를 일상의 풍경 속에다 스며들게 한다. 덕분에 작품의 주 배경이 되는 보스턴은 뭔지 모를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가 되어 있다. 화면 프레임에 어떤 식으로든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면 더더욱. 그 아이들이 놀고 있거나 살고 있는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회, 혹은 성당 건물이 있음을 확인시켜 줄 때는 더더더욱 스산함이 강해진다. 한 번도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위협의 존재가 있는 것 같이 보였던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1976년 작, <대통령의 음모> 급 경지가 펼쳐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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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도 <귀향> 수준으로 센 소재를 다룬다. 하지만 비참한 상황을 굳이 재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의 감정을 갖게 하지 않는다.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직접적인 단어를 쓰면서 대사로만 들려주는 것으로도 영화적 효과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긴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보다 그 충격이 덜 하다 보니 분노보다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쪽으로 감상의 방향이 흐른다. 작품은 추행이란 단어 앞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합리화할 수 있는 가해자 역시 성추행과 강간의 피해자였기에 저리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여기서 관심은 자연스레 카톨릭이란 종교의 '시스템'으로 옮겨간다. 작품 속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 관계는 '몇 세기'에 걸쳐서 이어져 왔는데, 그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경직된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져야만 참혹한 피해의 연쇄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기만 할 것인가. 혹은 과거가 잔향이 남아서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범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적혀진 핵심 증거가 나오는데도, 미리 공개하면 개인만 처벌을 받을 뿐 '시스템'을 고발할 수 없게 된다고 막아설 정도다. <스포트라이트>는 이런 전환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설득해내며. 그 의도 또한 무척 명확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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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귀향>은 <스포트라이트>에 비해 모호해 보인다. 작품은 과거든 현재든 그 당시의 '현실'을 감정적으로 보여주려 노력은 한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점을 논하는 순간은 위에서 언급한 동사무소 시퀀스 이후로 흐지부지되어버린다. '내가 그 미친년'이라며 소리치는 영옥의 모습은, 곧 자신의 외침을 들어달라는 절규다. 하지만 그 시퀀스의 방점은 결국 피해자의 외침을 제대로 들어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국가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데에 찍혀 있지 않은가. 사실 그 시퀀스마저도 어설프게 현실을 지적하려다 호소의 의미로 끝나는 것에 가깝다.


작품은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영옥의 현재 이야기를 함께 교차시키지만, 여기서는 무속과 혼령에 관한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영옥의 친구가 성폭행당한 적이 있는 아이를 거두어 신딸로 키우려 한다는 설정이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기본 설정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다뤄진다. 작품 감상하다 보면 그런 설정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현대의 이야기도 실질적으로는 그 시간과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가 된 셈이다.


<귀향>은 결국 고통의 주체인 일본군의 존재와 전쟁의 피해자들을 대하는 국가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다룰지에 대한 판단이 명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감상하다 보면 머리 속에는 소녀들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는 구체적인 일본군 악역들 일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왜냐면 이들은 작품의 결말부까지 핵심 악역으로 등장하며 끊임없이 소녀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그들의 성폭행 시퀀스다. 그래서 감상하면 결국 '작품 속의 일본군 악역'에게 한정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는 몇몇 시퀀스를 삭제하면서까지 이 감정의 효과에 집중한 듯한데, 이 시도가 작품의 완성도에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흥행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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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귀향>의 연출방향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특정 시퀀스'는, 시작된 지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무렵에 보여진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부감으로 조망하듯 찍어낸 시퀀스가 그것이다. 작품은 원래 2.35:1의 화면비율로 찍혔다. 그러나 이 순간 화면비가 잠시 위, 아래로 넓어지는 1.85:1로 바뀐다. 조정래 감독의 의도이며, (그러므로 좌, 우 마스킹이 된 극장에서 감상해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전체에서 구도나 미학적인 면으로 볼 때 가장 신경을 쓴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귀향>은 부감 시퀀스에서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열중한 탓에,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만다. 작품 자체가 날을 겨누고 있는 대상이 '일본군 개개인'인지, '위안소라는 것을 고안해낸 일본의 시스템'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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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당 시퀀스에 와서 부감으로 찍힌 카메라가 도대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봐 주기를 원하는지 다소 헷갈리는 상황에 처했다. 관객으로서 위안소의 전체적인 면모와 분위기를 조망하는 모습을 봐야하나? 아니면 조망 중에 개미들 마냥 조그맣게 보이는 일본군의 강간, 그걸 당하고 있는 소녀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봐야하는 걸까?


본편에서 끊임없이 생각나게 만드는 '소녀'들의 고통의 이미지. 그것은 결국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을 동정심으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 이상의 효과를 창출해내지는 못한다는 인상만을 준다. 그들은 지금까지 계속 두려움과 눈물만을 머금은 소녀로서 계속 지금까지 살아오지도 않았다. 실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동정심 따위는 거부한 채, 고령의 몸에도 오래전부터 직접 일본대사관 앞에서 격렬하게 집회에 참여해 왔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품의 이해는 상당히 한정적인 부분에서 머물고 있다. 구도를 한껏 살린 미학적인 카메라워크로 영화를 찍고 고통을 통한 동정심을 유발한다고 해서 그것을 위로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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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 성당이) 지켜보고 있다


<스포트라이트>에서 타카야나기 마사노부 촬영감독이 보스턴의 가정집과 뒤에 우뚝 서 있는 교회나 성당을 한 프레임에 잡을 때, 그 쇼트는 1.85:1의 화면비의 미학을 잘 살린 순간에 속한다. 그러나 구도뿐만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든든한 위안이 되는,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종교 건물이 마치 감시하는 존재마냥 내려다보고, 지켜본다는 생각이 함께 든다. 어쩌다 교회나 성당으로부터 이런 인상을 받게 되었을까? 작품은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대상의 또 다른 인상을 보여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맹신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미학적으로 정돈된 쇼트나 시퀀스는, 곧 감독이나 관객에게 깊게 각인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런 미학을 추구할 때는 명확한 의도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잘 전달해야 한다. (물론 의도를 불명확하게 처리해서 논쟁을 즐길 수도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이런 미학적인 시퀀스를 통해 사유하게끔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귀향>의 경우, 결과물로 따지면 이게 피해 생존자를 위로하려고 만든 건지, 아니면 되려 아픈 기억만 되살려주려 한 건지 헷갈린다. 작품을 향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있으면 제작진들의 진심이 통한 것이라고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 눈에 <귀향>은 의도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피해 생존자들의 끔찍한 '과거'만을 보여주며, 그 고통을 체감하게만 하려는 결과물로 보인다. '현실'을 보여주고 위로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지만, 과거의 잔향이 현재의 시간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는 부분조차도 미미하다. 그리고 솔직히 피해 생존자들이 위로받고 싶어서 본다 쳐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 못 볼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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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은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는데, 

희한하게도 네X버 영화에서 이 사진 보려면 성인인증 해야 한다. 


<귀향>은 차라리 극장이 아니라 일본대사관이나 일본 정부 등에서 상영하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많이 알려진 덕에 최소한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를 가장 보편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한 거인 같은 존재감이 있으니 말이다. 일종의 확성기 같은? 아니면 관객들이 과거에 나온 비슷한 소재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져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이나,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같은 좋은 다큐멘터리들을 찾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게 한다든가. 그러면 가치 있을 것이다. 내게 <귀향>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영화'가 아니라 확성기 같은 '도구'다. <마지막 위안부> 같은 것보다야 기특한 구석은 있겠지만, 자랑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한 편의 영화로서는 좋아하기 힘들다. 이는 <스포트라이트>가 소재를 다루고 또 배려하는 방식을 봤기에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p.s.


1) 그렇다고 <귀향>이라는 '도구'의 흥행 성공을 지켜보며 '아! 한국영화 산업도 망했구나. 이게 흥행 성공을 하다니..'라는 식으로 절망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다. 내겐 도구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끝내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무지해서 그 매력을 몰라봤을 수도 있다. 정부나 사회가 전체적으로 무능하여 위안부 피해 협상을 그 꼬라지로 했을 때, 피해 생존자들의 편을 자처하는 (누군가에게는) 작품이 존재한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영화산업은 결국 돈이 관련되는 문제다. <귀향>의 흥행 성공 덕에 '이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도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겠구나'란 의식이 심어진다면, 다양한 감독들로부터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더 민망한 작품과 더 잘 만든 작품들이 나올 것이고, 그 사이에서 이 작품의 완성도와 영화적 입지에 관해 제대로 '재평가'가 이뤄질지도 모른다. 


사실 진짜 절망스러운 상황은 <귀향>의 성공보다, <귀향>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이 소재를 다루고 있는 '극영화'들이 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만들어질 작품들의 완성도에 대한 걱정은 제쳐두고서라도, 그냥 누구보다도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개발되어야 할 소재인데 그러지 못하고 한 철 유행으로 끝난다면 그거야말로 걱정이리라.






홍준호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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