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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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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다."


다소 촌스러운 대사로 시작하는 영화 <두사부일체>는 학교로 간 조폭 계두식의 이야기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에서 임금 대신 두목을 집어넣어 만든 두사부일체(頭師父一體)라는 제목은 그 유치함과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관통하는 뛰어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두목과 스승, 조폭과 학교라니. 무슨 조화일까.


이 황당한 스토리의 시작은 계두식이 큰 형님의 명령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가 택한 학교는 강남 8학군에 위치한 명문 사립 상춘고등학교. 허나, 졸업장만 손에 쥐면 되는 계두식에게 ‘8학군’, ‘명문’은 의미 없는 수식이었다. 그가 상춘고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사립학교’이기 때문이다.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조폭 계두식에게 기부입학을, 그것도 돈만 내면 바로 3학년으로 보내주는 사립학교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때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입학할 수 있는 학교라면 제대로 된 학교일 리가 없다는 것을.


학교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학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 비뇨기과가 적자라며 남학생 전체를 포경수술 시키는가 하면, 온갖 이유를 들먹여 돈을 걷어가기도 한다. 자업자득, 계두식이 돈의 힘으로 입학한 상춘고는 교육의 터전이 아니라 돈만 밝히는 비리학교였다. 심지어 어느 학생은 학교에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단란주점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모든 사태의 배경에는 제왕처럼 군림하는 교장 겸 이사장 상춘만이 있었다. 그는 교사들에게 성적 조작을 강요하고, 돈을 요구한다. 이사장 앞에서 무너진 교권은 교실에서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재단의 비호를 받는 학생은 교사에게 욕설을 뱉고, 돈 많은 학부모는 교사를 폭행하는 아사리판이 벌어진다.

 

결국 비리를 참다못한 교사들이 양심선언에 나서지만, 상춘만은 오히려 조폭을 동원해 이들을 폭행한다. 이를 목격한 두사부일체 계두식. 두목과 부모와 같은 선생님이 눈앞에서 맞고 있는 장면을 그냥 넘길 리 없다. 결국 학교를 구하기 위해 상대 조폭과 패싸움이 벌이게 되는데... 뭐 이런 스토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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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개봉한 이 영화의 전국 관객수는 330만 명. 당시로서는 꽤나 좋은 성적이었다. 무의미한 폭력과 욕설이 난무한다는 비판과 B급 조폭 코미디 영화의 전형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이런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사부일체>의 힘은 그 소재에 있다. 과도한 폭력으로 눈살 찌푸리게 만들고 구성도 섬세하지도 않지만, 영화는 학창시절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추악한 학교의 기억을 건드리고 있다. 학교의 부조리를 전면에 드러내고, 이를 무식한 조폭이 때려 부숨으로써 거칠게나마 가려움을 긁어주어 쾌감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두사부일체>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응징하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분들과는 별개로, 소재가 너무 자극적이고 과장된 것 아니냐 항변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어떻게 저 따위의 학교가 있을 수 있겠나.

 

그런데 어쩐다, 정말 그런 학교가 있었다. <두사부일체>의 모티브가 된 학교의 이름은 상춘고가 아닌 '상문고'. 문제의 교장은 상춘만이 아니라 '상춘식'이었다.

 

 

2.

 

때는 1994년 3월 14일. 강남경찰서 기자실로 7명의 교사가 들이닥쳤다. 상문고 교사들이었다. 그들의 손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양심선언문’이 들려있었다.


 

"세관 간부의 아들 박 군의 영어성적을 31점에서 수를 받을 수 있는 점수인 34점으로 고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재단 최 이사의 아들 윤리점수가 우로 나오자 교감이 직접 수로 고쳤어요."


“표창 수여자들에게 1인당 1백만 원씩 기부금을 강요해 가로챘으며, 졸업생들에게 1인당 5천~2만 원씩 거둬 착복했습니다.”


“보충수업비도 규정을 어기고 1만 4천원~2만 5천 원씩 불법적으로 거둬들였습니다.”


“학교 자체에서 보충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강매했습니다.”



내신성적 조작, 강매, 갈취까지. 교사들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온갖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거둬들였는데 그 돈은 모두 상문고 교장인 상춘식이 착복했고, 교사인 바로 자신들이 그 일에 가담했었다는 눈물의 양심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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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인 3월 15일, 28명의 상문고 교사가 합세하여 도합 35명의 교사가 2차 기자회견에 나섰다.



“아버지가 버스운전을 하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이어서 학교 측에 모금을 면제시켜주자고 건의했으나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1백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찬조금 문제로 교장과 심하게 싸운 뒤 밤늦게 귀가하다 테러 의혹이 가는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상문고 교사들은 학교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며 오열했고, 그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겨 TV로 전해졌다. 그 서러움이 보는 이도 울컥하게 만들 정도였다.


<중앙일보>를 필두로 모든 언론이 이 사태를 집중 조명했다. 여론의 성토가 이어지고, 서울교육청에서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바로 다음 날 감사위원들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근 소각장에서 타다 남은 시험지가 발견되는가 하면, 직원들이 학교 서류를 빼돌리는 걸 봤다는 증언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런 비리를 저지른 위인이 순순히 감사에 응할 리가 없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안에도 검찰은 태연히 뒷짐을 쥐고 있었다. “몇 사람이 모여 양심선언을 했다고 즉시 달려드는 수사는 있을 수 없다.”며 교육청 감사 결과를 보고 수사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때는 1994년. 물불 안 가리고 마이웨이를 가는 혈기왕성한 YS가 청와대에서 조깅하던 시절이었다. 지지율 90%를 너끈히 찍던 그는 모든 일에 거침이 없었다. “상문고 쌔리삐라~” 한마디에 딱딱하게 굴었던 검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엄벌하겠다며 수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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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리삐라~~"


수사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학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돈을 갈취했는데, 양심선언에서 폭로된 보충수업비, 교재비, 기부금뿐 아니라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전기세까지 알뜰하게 받아 챙겼다. 이런 상황이니, 교사들 점심을 매점에서만 먹을 수 있게 하고 매점 밥값을 올려서 폭리를 취했다는 것 정도의 깜찍한 이야기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상문고는 사회적 지휘가 높은 부모의 자녀들을 VIP 리스트로 만들어 따로 관리할 정도로 철저한 가정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리스트의 용도는 따로 있었고, 형편(?)에 맞게 돈을 걷는 일에는 쓰이지 않았다. 상문고의 불법 찬조금 앞에서는 모든 학생이 평등했다. 빈부를 따지지 않았고, 예외도 없었다. 누구나 학교가 요구하는 돈을 내야 했고, 금액도 같았다.


상춘식은 교사에게 돈을 뜯고, 교사는 그 돈을 학생에게 받아 메우도록 함으로써 교사를 공범으로 만들고, 학생-교사-상춘식으로 이어지는 상납 구조를 구축하고 있었다. 88년에는 1학급당 300만 원을 기준으로 삼아 1억 7천, 89년에는 기준을 400만 원으로 올려 2억 3천, 92년에는 당 500만 원으로 2억 8천을 착복했다. 그렇게 6년간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불법 찬조금만 12억.


상문고의 성적조작도 사실로 드러났다. K 군의 경우 93년 1학기와 2학기에 걸쳐 생물, 물리, 세계사, 과학, 영어 등의 성적이 '우', '미'에서 '수'로 고쳐졌고, L 군의 90년 사회, 지리, 세계사 등의 성적이 '미', '양'에서 '우'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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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재판에서 교장 상춘식은 성적조작 혐의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며 무죄를 인정받고, 교감이 유죄를 받았으나, "학생 잘 봐달라."는 상춘식의 발언이 상문고와 같은 환경에서 어찌 작용할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터. 그가 성적조작에 관한 한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상춘식의 십장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했던 ‘일부’ 교사는 갖은 압박과 모욕을 견뎌야 했다. 스승이 되고자 했던 교사들은 사회의 가장 추악한 면부터 손수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누르고 눌렀던 교사들의 모욕감과 울분이 양심 고백으로 터진 것이다. 상문고를 뚫고 나온 '송곳들'이었다.

 

학교는 비리로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그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교장 상춘식에게 학생 한 명 한 명이 돈이요, 교사는 돈을 배달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곳은 교육현장이 아니었다. 상춘식 왕국이었다.

 

이렇게 꼼꼼하게 모아 횡령한 돈이 17억. 94년도에 17억(!)이었다. 이 많은 돈이 어디로 흘러갔을까? 재판기록에 따르면 상춘식은 횡령한 돈을 토지매매, 빌딩 신축, 보석상 인수 등에 사용했다. 그러고도 남은 금액은 그의 생활비 혹은 품위유지비로 사용했는데, 그가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 엿볼 수 있는 기사를 살펴보자.



상 씨의 집은 대지 2백 50평, 건평 1백 50평 크기의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소유주는 86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간 부인 이 씨로 돼 있다. 잘 손질된 향나무와 너른 잔디밭에 둘러싸인 집 곳곳에는 대리석 바닥에 이탈리아제 수입가구, 대형 샹들리에 등 값비싼 장식품이 즐비했고 지하에는 연회장까지 마련돼 있었는데, 이웃 주민들은 이집의 시가가 20억 원 이상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1994년 3월 18일



과연 갈취의 꼭대기에 있던 비리의 수장다운 생활이다. 그러니까 학생들을 쥐어짜 모은 거대한 자금은 상춘식 교장의 재산을 불리거나 고급스런 생활을 유지하는 데 쓰여졌던 것이다. 여기서 그가 그토록 돈에 집착했던 이유가 드러난다. 그는, 단지 돈을 좋아했다. 돈이 좋아서, 돈을 벌다보 많은 돈을 갖고 싶었고, 그 순수한 열망으로 교사와 학생들을 갈취해 학교를 망가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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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비리를 밝히려는 기자를 격하게 반겨주는 상문고 학생들


망가진 교육현장의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이런 환경에서 사제간의 끈끈한 정이니 학창시절의 추억이니 하는 것은 사치와 같았다. 상문고를 다닌 학생들은 과거를 이렇게 회상했다.

 


담임에게서 전화가 온 거다. 학교 쪽에 기부 좀 해달라는 거다. 그것도 무려 30만원을. 반에서 성적과 재력을 기준으로 10명을 뽑아 전화를 한 거다.

 

소지품 검사를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멀쩡한 수업 도중에 체육 교련 교사들로 이루어진 검열단이 느닷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수업하는 선생님은 아랑곳없이 이들이 학생들을 교실 뒤에 서 있으라고 지시를 한다. 그리고는 책상과 가방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이다.

 

어떤 선생님이 교내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급발진을 해서 "붕~"하는 소리가 크게 난 적이 있었다. 문제는 마침 그때 상춘X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상춘X이는 차를 세우게 하더니 등교하던 학생들이 뻔히 쳐다보는 앞에서 그 교사의 뒤통수를 빡 때리면서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야이 십새X야, 여기가 고속도로야?”


<딴지일보> [분노] 상문고등학교를 말한다

 


20년 전의 학교가 으레 그랬겠지마는 상문고는 특히나 심했다. 학생 인권의 'ㅎ'자도 찾을 수 없었고, 교권도 상춘식 앞에 고꾸라진지 오래였다. 학교는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고, 봉투가 넘어가지 않으면 차별과 폭력이 넘어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학부모들은 ‘잘 봐주십시오’ 의미의 촌지가 아니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절규가 담긴 돈을 건네야 했다.

 

교장이 교사에게 가한 폭력은,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방식으로 전해졌고, 이는 다시 학생들 간의 폭력으로 이어졌다. 폭력이 난무한 상황 앞에 위축된 학생들은 겁먹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더 거칠고, 폭력적으로 행동했다. 일상화된 폭력은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이됐다.

 


“옛날 일기장을 보니 ‘매일 학교 가는 게 죽는 거보다 싫다’고 써 있었다. ‘덩치 큰 놈이 소심하긴’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을 했다가 아버지가 학교에 와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늘 걸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그걸 영화로 구현했다.” 


<한국일보> [영화세상]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


 


<말죽거리 잔혹사>를 제작한 유하 감독의 말이다. 상문고를 졸업한 그는 학교를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곳’으로 회상하며, 그때의 경험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학교를 구현하게 됐다고 한다. 실제로 상문고에서는 악날한 교사들이 영화처럼 선도부에게 완장을 채워주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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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상문고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꽤나 유명한 가수인 그는 학창시절 잊고 싶은 기억을 담아 노래를 만들었고, <말죽거리 잔혹사>에 OST로 참여했다. 학창시절은 비참한 기억으로 가득하다는 그는 이런 가사를 썼다.

 


내게 상처가 된 당신의 거짓말 /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던 지난 날 / 그럼에도 존경 받기를 원하셨던 그 모습에 / 내가 배운 것은 보잘 것도 없는 일할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 타인과 날 끊임없이 비교해대는 법 / 시기와 질툴, 키우는 법과 /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까지

 

나의 추억을 되돌려 놔줘 uh / 산산히 부서져 버린 꿈들과 yo / 닫혀진 내 입과 억눌린 감정과 / 네게 짓밟혀 숨어버린 웃음까지 모두 다


김진표 <학교에서 배운 것>


 


어느 졸업생에서 유하, 김진표에 이르기까지 상문고 졸업생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기억은 ‘폭력과 비리’로 점철된 학교의 모습이었다. 상춘식이 사리사욕을 채우던 그때 학생들은 학교와 교육에 대한 경멸을 키웠고, 나아가 그 현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다시 상춘식 이야기로 돌아와서, 양심 고백 이후 한 달이 지난 4월 14일. 서울시교육청이 재단 이사장이자 상춘식의 부인인 이우자 등 이사진의 임원승인을 취소하고, 상문고에 관선이사를 파견하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재벌 회장님들께서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나오듯, 사학재벌 상춘식은 들것에 실려 법원에 출두했다. 그는 횡령, 업무상 배임, 뇌물 공여 등으로 1심에서 징역 4년,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그렇게 상춘식 왕국은 무너졌다, 라고 사건이 해피하게 끝났다면, 그가 사학비리 끝판대장으로 이리도 오래 회자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문고에 관선 이사가 파견되고 학교가 차즘 자리를 잡아가던 사이, 상춘식은 칼을 갈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밀레니엄 맞이로 분주하던 1999년 12월, 5년 가까이 와신상담하던 상춘식이 다시 학교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는 부인 이 씨의 명의로 "횡령금을 변제하고 교직원과 화합해 학교를 잘 이끌어나가겠다."는 내용의 '학교 정상화 계획서'를 이미 정상화된 학교 앞으로 제출했다. 깊이 반성하고 죄값을 치루겠으니 이제 학교를 돌려달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상문고 사태 2라운드는 길고 지난한 싸움을 통해 2001년에서야 대법원 판결로 마무리됐다. 상 씨의 부인이 학교재단의 이사장으로 복귀하고, 성적조작을 주도했던 교감이 교장으로 복귀하는 등 상춘식의 복귀는 성공한 듯 보였으나, 구성원들의 거센 저항이 학교를 지켜냈다. 학생들은 법원이 비리재단의 복귀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을 때에는 법원 앞으로, 개교한 학교에 비리 교감이 근엄한 교장으로 서 있을 때는 학교 운동장으로 나가 시위, 무기한 수업거부 등으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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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교사들이 스크럼을 짜고 막아야 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시위에 나섰던 상문고 학생들

출처 - <오마이뉴스>


학부모들은 등록금 납입 거부로, 교사들은 농성으로 비리 재단의 복귀를 막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교사 몇몇은 상미교(상문의 미래를 연구하는 교사)를 조직해 상춘식의 복귀에 힘을 실어주는 코미디 영화보다 더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3.

 

20여 년 전에 일어난 상문고 사태는 당시 세태를 감안하더라도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라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그 비리는 1973년 상춘식이 교장으로 취임하고 그의 부인이 이사장에, 측근들이 이사회를 장악하여 ‘상춘식 왕국’을 구축한 이래 상문고의 일상이었다. 아주 보수적으로 그의 횡령이 증명되어 처벌받은 시기만 따지더라도 88년부터 94년까지 6년 이상 지속돼 온 것이다.

 

여기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토록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상문고가 어떻게 붕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정확하게는 비리와 폭력을 일삼는 상춘식 왕국이 붕괴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는 교사들에게는 불이익을 주고, 폭행을 행사할 정도로 곪아 터지고 있었음에도 94년에 이르러서야 상문고의 맨 얼굴이 외부로 알려졌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상춘식이 돈이 많아서일까? 교장이라서? 학생들이 교장을 좋아했었나? 그럴 리가. 이 끔찍한 체제의 탄생과 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춘식 왕국’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강남의 신흥 명문 상문고

 

상문고는 강남 8학군에 위치한 떠오르는 ‘명문’ 고등학교였다. 1973년 서초구에서 개교하여 강남 학생들을 입학시키며 입시 명문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상문고는 입시 노하우로 교과서 위주의 수업과 예습, 복습을 철저하게, 했을, 리가 없다. 이 학교의 전매특허는 '스파르타식 교육'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교육보다는 '훈련'에 가까웠다.

 

일례로 서울 인근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머리가 심하게 짧은 학생이 지나가면, "상문고인가?" 생각할 만큼 상문고 학생들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녀야 했다. 성적으로 학생들 줄빠따(?) 때리는 것은 기본, 오로지 입시에 필요한 과목만 가르쳤고, 교육청에는 실제 시간표가 아닌 가짜 시간표를 제출했다. 입시와 관계없는 특별활동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생회장도 없었다. 학교는 오로지 입시를 위한 장소였고, 학생들은 성적 향상을 위해 '사랑의 매'라 쓰인 채찍을 맞고 견뎌내야 했다.

 

강남 학생들을 입학생으로 받아서인지, 학생들을 쥐어짰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상문고는 입시명문으로 거듭났다. 1992년에 42명을, 93년에는 무려 60명을 서울대에 보내는 기염을 토해내며 입시 명문고 전국 6위에 이르게 된다. 학부모들은 이 놀라운 결과의 영광을 전권을 휘두르던 교장 상춘식에게 돌렸고, 수전노 상춘식은 순식간에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유능한 교장'으로 탈바꿈한다. 당시에 상문고가 부모가 가장 보내고 싶어 하는 학교, 학생은 가장 가기 싫은 학교로 공공연하게 회자됐던 이유다.

 

압축적 성장과 유능한 지도자 그리고 억압. 상문고의 성장 과정은 일면 한국의 현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 한국의 어느 지도자가 눈부신 발전의 영광을 독차지하며 신격화되었듯 상춘식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대학에 붙게 해주는 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맹종하게 되었고, 어느 지도자가 그러했듯 상춘식도 권력에 취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학부모들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던 탄압과 폭력을 묵인하고 방조했다. 상춘식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한 셈이다. 이를 몇몇 학부모의 문제라 할 수 있을까? 전혀. 이는 사회 전반에 깔린 입시 몰입의 교육 풍토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을 뿐이었다.

 

 ② 카르텔

 

상춘식의 상상할 수 없는 비리 행각이나 뻔뻔한 대처 등을 돌이켜 보면, 그를 지켜줄 든든한 카르텔이 있었거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간 큰 행동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이와 관련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교사들이 양심 선언을 준비하던 즈음,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양심선언을 한다 해도 상춘식이 끄떡이나 할까.' 이러한 교사들의 의문은 아주 합리적인 생각이었는데, 이미 몇 년 전 상춘식이 비리로 언론에 보도된 전력이 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사들의 우려를 덜어준 데에는 <중앙일보> 기자의 웃지 못할 희생(?)이 있었다.

 

상춘고 사건을 접한 <중앙일보>는 취재팀을 꾸리고 대대적인 조사에 나선다. 졸업생과 학부모 등을 만나 정황과 증언을 확보하는 한편, 재단의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 등의 증거를 폭넓게 수집해 나갔다. 하지만 상춘식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아주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했고, 취재팀의 막내 Y 기자가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경찰서를 출입하던 그가 열정이 과한 나머지 검찰 수사관을 사칭하여 상문고 서무과장의 집에 들어가 관련 서류를 몽땅 챙겨 나온 것이다. 결국 그는 주거 침입과 사문서 절취 등으로 기소됐다. 이후에 선고유예를 받긴 했지만 취재윤리 차원에서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는 방법이었음은 명백했다. 불법을 저질러 내부문서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상문고 비리의 카르텔을 뚫을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에서 나온 해프닝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상문고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모를 둔 학생을 파악해 VIP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당시 리스트에 들었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회의원, 육군참모총장, 병무청장, 건설사 사장, 장관, 전 부총리, 서울시 교육감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 모두가 상 교장과 친분을 유지하고 성적조작에 가담했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몇몇은 그런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춘식은 금은방을 분양받을 때 모 학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 있고, 성북동 자택 구입에서도 도움을 받았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었다. 상춘식의 개인적 용도 외에도 이 리스트는 교육청에서 상문고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거나 감사가 있을 때 공무원 겁주기 용으로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실제 상춘식의 카르텔은 어느 정도였을까? 답은 알 수 없다. 94년 양심고백 직후에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상춘식의 돈봉투가 살포됐다는 민주당 이철, 장영달 의원의 폭로가 이어지긴 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결과는 유야무야 돼버렸다. 이미 공소시효는 지났으니, 봉투 받은 사람 있으면 좀 알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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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BC>

 

 ③ 사립학교법

 

상춘식 체제가 오래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기둥으로 입시 몰입 풍토, 카르텔을 꼽았다. 그리고 세 번째 사립학교법이다. 어쩌면 이 마지막 기둥이 체제를 가장 묵직하게 받쳐 온 기둥이지 않을까 싶다. 상춘식 교장이 학교에서 전권을 휘두르고 멋대로 주물럭거렸던 이유는,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다.

 

94년 당시 상문 재단의 이사장은 이우자 씨였다. 그녀는 상춘식의 부인. 상춘식은 상문고 학교장으로 모든 권력을 주무르며, 부인을 허수아비 이사장으로 세워 재단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교감은 그의 측근인 정방언 씨가 맡았고, 이사도 이우자 씨의 사촌오빠, 당숙 등의 친인척과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는 수사로써 왕국이 아니라, 정말로 왕국을 구축하고 있었던 셈이다.

 

놀라운 점은 그가 이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립학교법으로는 학교재단의 이사회가 이사장의 친족 혹은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가득 채워 학교를 좌지우지해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재단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이사회는 이렇듯 상춘식의 입맛에 맞게 차려져 있었다. 이런 이사회에 비판과 견제를 바라는 것은 소에게 소갈비찜을 끓여달라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2000년에 다시 촉발된 상문고 사태 2라운드 역시 사립학교법이 제대로 돼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94년 이래 상문고는 교육청에서 파견한 관선 이사들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9년 8월, 사립학교법이 '개악'되어 임시이사의 재임 기한을 2년으로 줄어들었다. 임시로 파견된 관선 이사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틈을 노려 상춘식의 측근들이 이사로 복귀할 수 있었고, 그의 부인 이 씨가 다시 이사장 자리로 오르며 구성원들의 반발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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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돌아오려는 장방언 교장(전 교감)과

이를 저지하려는 교사, 학부모, 학생

출처 - <오마이뉴스>

 

즉, 이 모든 사단은 사립학교의 중흥과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사립학교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지금 다시 상문고 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무려 20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다. 그간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전교조, 진보교육감 등의 노력으로 학교도 예전의 불합리를 꽤 많이 떨쳐 냈다. 하여 사립학교 문제를 논하며 상문고 사태를 인용하는 것은 과거의 극단적인 사례를 자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비판은 정당하다. 하지만 상문고 사태를 과거에 국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사태를 박제된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하고자 한다면, 사학비리의 고리를 잘라냈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태는 이후에도,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충암고는 불과 얼마 전 이사장이 급식 비리로 물러났고, 그 비리를 생생히 목격하고 직접 겪은 학생들이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명여고, 양천고 등의 비리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다.


이 같은 세태가 이어지는 이유는 상춘식이 최악의 비리를 저지를 수 있었던 토대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상문고 사태와 같은 사학비리는 어느 수전노의 일탈로 규정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패가 발생할 수 있었던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구조가 지속되는 한 학교를 재산보존 및 증식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다음 스텝이 가능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교육의 최전선에 선 학교가 가장 반 교육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이 지난 사립학교의 현실이다. 세간에 사립학교는 당연히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는 자조적인 인식이 생겨났을 정도다. 대체 이 단추는 어디서부터 잘 못 끼워진 걸까?


그 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립학교가 싹을 틔우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참고자료]


상춘식 판결문(1심, 항소심, 대법원).

2000년도 국정감사 속기록(교육위원회).

창작과 비평. 2001년 여름, 통권 112호 : 상문고 사태의 '가족 로망스', 김도훈.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딴지일보>, <오마이뉴스>.

목천 상씨 종친회.







지난 기사


사립학교 탐구 보고서 1 : 이명박근혜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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