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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를_한일관계로_바꿔도_말이_통해>


눈치 없고, 판단력도 없고, 애국심도 없고, 지 밖에 모르는 대통령이 청와대에 시즈모드 상태로 버티기에 돌입한 가운데, 검찰은 청와대 주위만 빙빙 돌며 끈 풀린 동네 강아지 마냥 헥헥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는 지난 50년간 북한에게 당해온 화전양면전술을 청와대와 합작하여 국민에게 펼치고 있으니, 딴지의 사훈이 비록 '명랑사회 건설' 이지만 국민들의 웃음에도 슬슬 한계가 오는 듯하다. 길라임이 다시 소생시키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디테일한 전문 해석과 유불리에 대한 글은 다른 훌륭한 필진 분들이 써주실 것이라 믿고 필자는 다른 측면을 읽고자 한다.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50주년, 그동안 우리 사회에 이 조약이 야기한 긍정적, 부정적인 결과들이 꽤 적지 않다. <한일기본조약>은 이후에 있었던 일종의 한일 간 외교적 '관례'를 만드는 교과서적인 조약이 되어버렸고, <군사보호협정> 또한 이 선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외교야 뭐 쥐뿔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직감이란 게 있다. 강남아줌마도 국정에 오지랖을 펼치는데 나라고 예측하면 안 되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대다수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결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급전이 필요해서 발을 동동 굴렀고, 그들이 손을 내민 곳은 일본이었다. 51년 1차 한일회담 이후 이승만 정부와 일본은 어업권, 청구권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계속 도루묵이 되었지만, 장면 총리는 '배상금'을 '경제 협력' 방식으로 받는 가능성을 피력하였고 이 아이디어는 박정희 정권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여전히 '청구권 협정'은 한일조약의 가장 큰 문젯거리였고,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통해 이를 '해결'하여 한국은 대략 6억 달러 이상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1965년 일본은 갱제가 폭풍 성장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나름대로 일본으로서도 꽤 큰 지출이었기에 일본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이것 외에도 박정희 정부는 61년부터 65년까지 6개의 일본기업으로부터 6,600만 달러를 인마이포켓하고, 김종필도 쌀 수출 과정에서 상당한 돈을 인마이포켓했다. 어쨌든 6억달러의 큰 목돈이 들어온 박정희 정부는 소양강댐, 포항제철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 투입했다. 땅 파서 돈 나올 데 없던 박정희 정부가 판 것은 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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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도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은 기본조약 제2조와 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이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는 조항,


제2조 1항 양 체약국은 양 체약 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서명된 일본 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조약이 체결된 1965년 시점에서 한국정부는 "한일합방조약은 체결부터 불법이었으니 당연히 식민지배도 불법이고 조약도 무효야!" 라고 해석했지만, 일본정부는 "식민지배 자체는 합법적이지만 1965년 시점으로 이미 한국정부가 잘 돌아가고 있으니 그거 무효로 하지 뭐 ㅇㅇ" 로 해석했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한일담화 때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합법이자, 오히려 한국에게 유리했던 시기" 라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있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청구권 협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고, 한국정부는 "일본놈들이 우리한테서 불법적으로 뺏어간 재산 돌려받는 거야. 이거 식민지배 대가로 받는거 ㄴㄴ" 라고 해석했고, 일본은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으니 너네한테 줘야 할 거 이것저것 다 넣고 이걸로 식민지배에 대한 대가까지 포함해서 줄게 이걸로 퉁치는 거야" 로 해석했다. 동상이몽이란 바로 이럴 때 쓰이는 말이다. 다만 여러 정황상, 한국정부의 관계자들이 이러한 조항의 문제점들을 몰랐을 리 없다. 이른바, 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문구 자체가 양면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일 양국 정부는 일부러 전략적 모호성을 택함으로써 그 시점에서의 갈등을 봉합했다. 김종필-오하라 메모도 이러한 인식의 공유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구체적인 액수에 대한 문제의 합의라 할 수 있다. 이 선택은 1965년 당시의 당국자와 권력자들에게는 신의 한수였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미래 세대에게 짐을 떠넘기는 일이었다. 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란 문구는 지금까지도 일본이 꼿꼿할 수 있는 방패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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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참여정부의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는 "한일 청구권 협정 그거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아니라니까~ 그런데 강제동원 문제는 한일협상 때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 사실'을 주장하면서 받은 게 있어서 그건 무상자금 산정에 '포괄적으로' 들어갔다고 봐야 함.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주도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였으니 그건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일이야. 그래서 위안부 배상 요구는 타당해" 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화 하진 않았다.


모호한 정부의 태도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지면서부터 입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헌법재판소는 일본 정부에 의해 불법적으로 저질러진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한일 양국 정부의 법적 해석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주문을 했다.


청구권 협상, 특히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배상 문제에 대해서 가장 명확한 판결을 내려준 곳은 대법원이었다. 2012년 5월 24일에 내려진 선고를 보자.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 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 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청구권 협정 제1조에 의해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 점,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원고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요약하자면,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면 강제징용도 위안부도 모두 불법이고, 따라서 불법으로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는 기존 청구권협상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한국정부는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정도가 되겠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결은 수년간 모호했던 한국정부의 논리를 완결시켜준 판결이었다. 50년이 지나서야 정부가 싼 똥을 대법원이 치워줬다 하겠다. 한국정부의 내부적인 입장이 2012년에 와서야 대법원 판결로 정리되었으니, 일본정부의 인식에 변화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너무 많은 기대를 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노 담화', '나오토 담화' 등 때론 일본 정부의 과거사 인식이 진일보할 때도 있었지만 아베의 장기집권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 정부의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일본의 인식은 더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쭉 퇴보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어업 협정 과정에서 이승만이 설정한 평화선은 국방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구권 협상 때 일본에 내주는 카드로 사용되었고(물론 과거사 인식의 변화가 조건이 아닌 금전의 액수를 높이기 위해서), 문화재 협정 또한 당초 일본 정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한국의 요구를 들어줄 입장이었으나, 문부성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일본 내 조선 문화재를 한국이 준비하는 것보다 철저히 조사하여 대응했고 오히려 "식민지 시기 총독부가 발굴한 문화재를 돌려받고 싶다"는 주장까지 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도 일본이 줄기차게 지켜온 "식민지배의 합법성"의 논리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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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기본조약> 이후 일본과 맺은 두 가지의 협상이 더 있다. 1998년 체결된 <신한일어업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그것이다. <신한일어업협정>은 IMF로 완전히 망가진 한국의 갱제를 볼모로 잡고 일본은 일방적인 영해 확장으로 한국 선원들을 무차별적으로 나포해갔을 뿐 아니라, 외교적 관례는 개나 줘버리는 '일방적인 협정파기'까지 저질렀다. IMF 위기만 아니었어도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잘 막아냈겠지만, 위기란 늘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신한일어업협정>이 독도 영유권에 대한 배타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1965년의 어업협정과 1998년의 신어업협정 모두 한국정부는 독도에 관해서 만큼은 원칙적으로 타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은 일본의 요구사항 중 상당수를 들어줘야만 했다. 이는 협상 상대국으로써 일본의 행동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위안부 합의>는 <한일기본조약>의 축소판이다. 50년 전에 써먹은 '전략적 모호함'을 이용해 서로 다른 말을 자신들의 국민에게 해대는 모습을 우리는 또 볼 수 있었다. 50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과거사 인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줬고, 또한 그 모든 것을 퉁쳐서 돈으로 해결하려는 일본의 자세도 다시 볼 수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최종적 및 불가역적'이라는 문구를 삽입 함으로써 더 이상의 반성과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세 요소 모두 <한일기본조약>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것들이었고, <위안부합의>는 어쩌면 우리 세대 역시 미래 세대에게 짐을 떠넘겨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일기본조약>은 경제개발의 초석을 위한 급전이라고 쉴드를 쳐줘도, <위안부합의>는 이득이 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는 최악의 협상이었다. 또한, 이 둘은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50년간 일본과의 외교적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과거사 인식은 50년 전에도, 지금에도, 아마도 최소 향 후 몇 년간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2. 일본은 우리에게 위기가 오면 언제든지 무리한 요구와 일방적 파기를 할 수 있다.

3.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일본정부는 금전적 보상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 할 것이며, 우리 정부도 받을 게 없다면 이것으로 퉁칠 수밖에 없다.

4. 양국 모두 크게 이득이 없는 협상의 배후에는 늘 미국의 압박이 있다.

 

물론, 외교는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태도는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 지난 50년간 일본의 태도로 인해 여전히 생존한 일제강점기 시기 반인도적 행위의 직접적 피해자, 그들의 자손들, 이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 밖에 가질 수 없던 우리 세대의 한계는 한국 정부의 협상 실패가 야기한 것도 일정 부분 있다. <군사보호협정>이 크게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있으나, 우리는 여전히 전범기를 꽂고 입항하는 일본의 군함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북한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헛짓거리하고 있는 국정원과 국방부부터 정상화하길 바란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을의 위치에 설 경우, 별문제 없어 보이는 협정이 언젠가 미래 세대의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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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745360.html>

 

끝으로, 조선 최고의 일본전문가였던 신숙주의 글을 소개하겠다.


삼가 보건대 동해의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하나만이 아니나, 그 중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크다. 그 지역이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비롯하여 우리 제주 남쪽에까지 이르고, 유구(琉球)와 더불어 서로 맞대어 그 지형이 매우 길다. ...그들은 습성이 강하고 사나워 칼 쓰기에 능하고 배 타기에 익숙하며, 우리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잘 어루만져 주면 예로써 조빙하고 잘못하면 번번이 강탈을 자행하였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국정이 문란하여 어루만짐을 잘못하니 드디어 변방에서 난리를 일으켜 연해 수천 리의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 우리 태조께서 분연히 일어서서 지리산 동정(東亭), 인월(引月), 토동(兎洞)에서 수십 차례를 싸우고서야 왜적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쪽에서 오면 어루만져서 선물을 넉넉히 주며 대우를 후히 하는데도 그들이 보통으로 여기고, 진위를 마구 속이며 곳곳에서 머물러 시일만을 지체하여 변명을 갖가지로 부리고 있으니, 그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곧바로 화를 낸다. 그래도 땅이 멀고 바다가 가로막혀서 그 실상을 파악하고 그 정세를 살필 수가 없으니, 대우는 선왕의 옛 규례에 의거하여 진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정세가 각기 경중이 있어서 또한 후하고 박함이 없을 수 없다.

- <해동제국기> 서문 중



신숙주는 "일본과의 화평은 유지하되, 늘 경계는 잃지 마소서"라고 말했다. 때론 우리가 받는 것이 적을지라도, 군사적인 경계만큼은 결코 잃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결과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군사보호협정>은 과연,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일일까. 2012년 당시 일본자위대가 한반도 유사시 자국민(일본인) 보호를 위해 한반도에 발을 디딜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도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는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정말로 이것이 필요한 것인가? 요리조리 따박따박 야무지게 계산기를 두드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정부의 태도불량까지 겹치니 괘씸하기 그지 없을 뿐이다.




* 참고


<한일협정 연구> - 최희식, 동북아역사재단

<협상과 재협상 : 1998년 한.일어업협상을 중심으로> - 이범우

<[한일협정과 일본의 전후처리] '국익'으로 동원된 개인의 권리> - 김영미, 동북아역사재단






빵꾼


편집: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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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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