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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지만 총궐기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한국에 온 지 8년이 넘었고, 한국여자와 결혼해 아이가 둘 있는 아빠다. 투표권은 없지만 한국사람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외국인이 한국 사회문제에 나선다는 것은 민족주의와 관련된 문제며 한국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을 만한 주제라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만, 지금 이 시국에, 나는, 나서고 싶었다. 한국인이 아닌 내가 화가 나는 데 자격이 필요할까? 지금 화가 나는 건 한국에서 살면서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국정원이 2012년 대선에 개입했다는 사실에 코웃음 쳤다. 


‘어이 없네..’


김기춘이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유신헌법이랑 관련된 사람들이 아직도 정치를 한다니...’ 


역시 코웃음이 나왔다.


유우성씨 간첩 조작 사건이 있을 때는 


‘설마 아직도 이런 짓을...?’


복지 공약이 하나씩 파기될 때는 


‘이건 진작에 예상했지’.


통합진보당을 강제해산 시켰을 때도


‘역시... 가만둘 리가 없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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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충격을 받았다. 왜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7시간의 행방은 어떻게 된 건가. 유가족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는 한 건가. 왜 유민아빠가 46일 동안 단식을 감행했는지 궁금하지도 않단 말인가. 그동안의 코웃음은 눈물이 되었다. 실제로 세월호 사건 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생 어머니와 인터뷰하면서 울기도 했다(편집부 주: 필자인 크리스님은 세월호 사건 때 정부에서 한국인 기자의 취재를 막았을 당시 딴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동법 개혁...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개악이지 개악.’ 이라 생각했다. 정부는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더 힘든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다. 왜 국민들은 더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는 건가. 국가의 목적은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것 아닌가? 대기업은 배불리고 국민들을 굶게 만드는 정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한상균이 범죄자라니... 감옥에 간다니...? 세월호 때 나온 눈물은 어느새 분노가 돼 버렸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다고 했을 때 또 분노했고, 테러방지법, 사드배치, 백남기씨의 죽음으로 나의 분노 게이지는 상승했다. 한국의 역사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의 결과, 최순실의 존재가 나타나면서 터져버렸다. 박근혜, 최순실, 차은택, 고영태, 문고리 3인방, 안종범, 우병우, 그리고 전경련과 대기업의 총수들, 등등... 그동안 한국은 그들의 장난감이었고 청와대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최순실 사건은 분노를 넘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국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복잡할까? 논리적으로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위로가 필요했다. 해서 불어로 이번 사태에 대한 글을 썼고 벨기에 공영방송 기자인 친구에게 보냈다. 


"야 이건 퍼트려야 돼, 엄청 큰 사건이 한국에서 터졌어" 


하지만 친구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곧 미국대선인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리고 시리아 상황은 봤냐, 러시아 폭격때문에 난리났어. 이게 먼저야." 


그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나에겐 한국 상황이 더 중요했다. 미국대선이나 시리아와 같은 국제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나에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단순한 국제 문제가 아니라 마치 내 나라인 것처럼 사랑하는 한국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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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썼던 칼럼(링크)이 벨기에 신문에 나오긴 했으나 부족한 느낌이었다. 칼럼을 통해 벨기에 사람들이 한국상황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수준이었지만 내 분노까지 전달할 수 없었다. 한국 상황에 대한 분노는 혼자서만 느끼는 외로운 감정이었다. 


벨기에 가족은?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어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직장은? 난 학교에서 불어 회화 수업을 재미있게 하는 편인데 갑자기 학생들한테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분위기가 썰렁해질 것 같았다. 친구는? 있긴 있지만 내가 한국 정치에 대한 분노를 전달할 만한 친구는 거의 없다. 남은 것은 SNS이다. SNS는 취향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는 사람과 연결해주는 매체로 나 역시 SNS를 통해서 나와 같은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로 위로가 되었으나 혼자 컴퓨터 앞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데에 한계도 느꼈다.


결국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했다. 내 아이들이 살아야 할 미래의 한국이 좀 더 나은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공간이 필요했고 위로도 받으려고 경남 진주에서 서울까지 올라갔다.




11월 12일, 현장에서


12일 2시쯤에 딴지일보 죽지않는돌고래 부편집장과 현장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정청래 전 의원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 국민들이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노래를 모르는 내가 불편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사실 모르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건데도 말이다.


부편집장은 시위모습을 딴지일보 SNS로 중계 하느라 바빴고 나는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들었다. 노동자들이 다같이 노래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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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돼서 헤어졌던 부편집장과 다시 만났다. 촛불시위가 시작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마음으로 한 군데에 모인 모습을 직접 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감동이, 벅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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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다 쉬었다 반복하다가 부편집장이 갑자기 대열에서 빠져 청와대로 가자고 했다. 경복궁 서쪽을 따라 효자로로 올라갔다. 갈 수록 시민들 수는 줄어들었고 청와대로 가는 길을 막아놓은 경찰 버스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버스가 많아 셀 수도 없었고 지나다니는 주민 몇 명만이 눈에 띄었다. 경찰 차벽과 청와대 사이에 대기하던 의무경찰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경찰버스로 세밀하게 막아 놓았지만 그 안쪽에는 정말 셀 수도 없는 경찰이 대기 중이었다. 


종종 신분증을 검사하는 경찰이 눈에 띄었다. 경찰버스가 끝나는 지점까지 걷고 또 걸어 올라갔지만 모든 길을 막아 놓아 청와대로 가는 계획은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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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편집장은 할 일을 하러 갔고 나는 다시 군중 속으로 끼어 들어갔다.


국민들과 함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특히 마음에 들었던 구호는 


"평화시위 보장하자" 


"경찰들도 같이하자" 


였다. 


나와 같은 분노를 느낀 군중 속에서 내 작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커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청와대를 향해 목이 터지도록 외치기 시작했다. 같이 구호를 외치며 3년 동안 쌓아왔던 분노를 드디어 표출할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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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 지하철도 끊기고 택시를 잡을 수도 없어 부편집장 집까지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도중 우연히 미디어몽구를 만났다. 다른 사람과 열심히 이야기하는 중이었지만 끼어들어 인사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기자니까. 미디어몽구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친절하게도 행복한 내 모습을 찍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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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진을 찍어준 사람은 뉴스타파 기자였다고 한다.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오다니... 아쉽다.


아직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나는 이제 시작이다. 조금씩이라도 나서고 싶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분노하고 싶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도 끼워주세요. 


같이 합시다.



추신: 저녁에 다시 대열로 돌아가던 중, 정치인 손학규가 혼자 거리를 걷고 있는 걸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했다.  









 

 K리S (교정 : KIMA)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