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3. 02. 월요일

K리S








 


"외국어는 잘 해야 된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TOEIC 800점 이상 못 받으면 취직은 생각조차 못한다. 영어를 못 하더라도 일본어나 중국어를 어느 정도로 할 줄 아는 것은 기본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외국어를 하나라도 못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다 개소리다. 외국어는 연애다. 일단 관심이 생기면 접근한다. 관심이 없어도 상관없다. 접근해서 차이면 다른 관심사를 찾거나 사귀게 되면 열정을 쏟아 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정이 들어 같이 살 수도 있고 권태를 느껴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도 있다. 끝. 외국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외국어와의 내 인연


벨기에 땅은 대한민국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쥐똥만한 나라인 데도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네덜란드어를 하는 북쪽과 프랑스어를 하는 남쪽(더 자세히 - 북쪽에는 네덜란드어:총 인구의 57.6%, 남쪽과 브뤼셀에는 프랑스어:41.7%, 동쪽에 작은 지역에는 독일어:0.7% 이렇게 세 가지 공용어가 쓰인다). 각 지역의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면서 다른 지역의 언어를 익히려고 애쓴다.


W34-00-62-02-벨기에 언어구성.png


난 초등학교에서부터 네덜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에서는 영어도 네덜란드어 못지않게 필수과목이었다. 그렇다고 "우아! 벨기에사람들은 3개 국어를 할 수 있겠다!"하고 감탄할 바가 아니다. 난 대학교 졸업까지 네덜란드어는 15년, 영어는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여전히 못 했다. 몇 년 동안 노력했지만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말을 더듬거리면서 엉터리 영어밖에 못했다. 내 머릿속에는 어휘와 문법 규칙으로 꽉 찼는데, 내 입에서는 이상한 영어밖에 안 나왔다. 나도 영어 울렁증은 심했단 말이다.



왜 그랬을까?



처음에는 그냥 교육제도의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책임을 떠넘겼다. 게으른 선생님들이 쓸데없는 어휘나 문법을 가르치는 대신 실용적인 대화를 재미있게 가르쳤으면 외국인을 만날 때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2살 때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 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 돌이켜 생각했다. 스페인어는 정식 언어수업으로 듣지 않았지만 6개월 만에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문제없이 충분히 잘 할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외국어 교육제도의 문제니 뭐니 해도 제일 큰 변수는 언어 환경과 학생의 의욕이라는 깨달음. 학창시절에 네덜란드어나 영어는 그냥 시험 때문에 해야 하는 의무적인 고역이었다.


반면에 스페인어는 유학생활을 재미있게 보내려고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시험이나 취직과 같은 목적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스페인 친구들의 웃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거나 나도 그들한테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공부했다. 낮에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저녁은 친구들과 ‘타파스(스페인에서 먹는 안주거리)’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새벽까지 밖에서 놀곤 했다. 내 작은 원룸에서는 잠만 잤다. 원룸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조차 안 날만큼 바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긴, 매일 술에 찌든 상태로 새벽에 방에 들어와 자고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허겁지겁 준비하고 대학교로 뛰어나갔는데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릴 법도 하지. 하여튼, 스페인에서는 난생 처음 외국어에 대한 의욕이 느껴졌다.


Most_Attractive_Spanish_Female_Fans_in_Euro_2012.jpg


물론 스페인어는 프랑스어와 같이 라틴계 언어라서 쉽게 배웠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제일 결정적인 요소는 의욕과 환경이었다. 참고로 중국어도 영어보다 빨리 배웠다. 라틴계나 게르만계 언어도 아니고, 나와 같은 서양사람한테는 아주 난해한 중국어말이다!


뜬금없이 웬 중국어? 졸업 후 2년 동안 경영학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지루한 일상생활에서 도망가고 싶어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6개월 동안 중국에서 배낭여행을 하다 보니 벨기에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맛을 보고 중독돼버렸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종일 자기 동네를 안내해주는 학생, 기차에서 과일을 나눠주는 할머니, 자기 마을을 지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집으로 초대해주는 농부, 광활한 고원에서 마주쳐 자신을 따라오라고 권하는 순례자, 심한 변비에 걸린 나를 전통 요법으로 풀어주는 소림사 스님, 정글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는 나를 다음 마을까지 인솔해주는 나무꾼, 외딴 산골에 버스가 없어서 수레에 태워주는 할아버지, 등등 6개월 동안 그런 식으로 지내다 보니 중국인과 그들의 언어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내 새로운 목적이 되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당분간 중국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2년 동안 난징에서 머물렀다. 수 천 가지의 한자를 외우기는 골치가 아픈 일이었고 성조 때문에 발음이 난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어는 비교적 빨리 배우게 됐다. 그 이유는 의욕과 환경이었음에 틀림없다.


chinese_girl__by_kizysem-d6ncs6j.jpg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듣는 중국어 중급 반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설픈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일부러 그런가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겉으로 순진해 보였지만 속에는 숨어 있는 야성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미묘한 매력에 난 첫 눈에 반해버렸다. 그 여자의 언어는 한국어였다.


내 서툰 중국어로 그녀를 꼬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 나한테 추천했던 한국 영화, 드라마까지 보게 됐다. 하루아침에 중국 음식이 지겨워졌고 한국 음식은 입에서 녹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 여자의 나라가 창출한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중국에서의 내 체류 말기에는 한국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중국어를 점점 소홀히 하고 한글을 익히기 시작했다. 몸만 중국에 있었고 정신은 이미 한국에 간 뒤였다. 한국에 대한 관심의 촉매제가 됐던 그 여자한테는 몇 번이나 고백했고 거절 당하기가 일쑤였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듯이 결국에 우린 사귀게 됐다. 그녀는 10개월의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다. 나는 당연한 것처럼 그녀를 따라 한국으로 왔다.


20130621123432_7060.jpg


2008년부터 한국에서 살아왔다. 그 여자의 남편이 됐고 아들 하나 딸 하나의 아빠가 됐다. 즉 한국에서 가정을 이뤄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릴 수록 한국어, 한국에 대한 모든 관심 또한 생겨났다. 한국어는 내가 공부한 외국어 중에 제일 어렵다. 한자를 안 외워도 되는 것과 성조가 없다는 것은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수백 가지의 관용표현과 접속사, 의성어, 사자성어, 어색한 어순, 외워도 외워도 모르는 단어가 계속 생기는 무한 어휘의 범위, 자주 생겨나는 인터넷 신조어나 유행어, 문어체와 구어체의 커다란 차이, 등등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나한테 무한도전이 됐다. 그러나 좌절은커녕 공부할수록 한국어에 대한 관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를 거절했던 여자에 대한 관심처럼 말이다.


그런데 뭣보다도 한국어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언어이기 때문에 열정이 생겼던 것이다. 우리 가족의 잠재적인 의사소통 문제의 싹을 없애기 위해서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게 됐다. 처음에 아내와 중국어로 소통을 했을 때는 자주 부딪히고 싸웠지만 한국어로 제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사이가 좋아졌다. 그리고 내가 애들한테 아무리 프랑스어만 말해도 그들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엄마를 비롯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한국어는 아빠만 하는 프랑스어보다 당연히 먼저 나온다. 그러나 내가 만약 애들의 모국어를 못했다면 아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생긴다. 한국어는 나에게 사랑의 언어가 됐다.



외국어는 연애다

 

외국어와의 내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자랑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 5개 국어나 해서 좋겠다. 너 잘났다’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5개 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5개 국어를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는 연애와 같다. 인연이라 생각해서 가까워지다가도 인연을 끊게 되면 금새 잊어버린다.


언어와의 관계를 맺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 의무적으로 만날 수도 있고 길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다. 동호회에서 술을 마시면서 가까워지거나, 학원에서 돈을 주고 억지로 만나도 된다. 아무리 배워도 머리에 안 들어가면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고, 여기저기 썸만 타는 가벼운 관계도 있다. 모국어에 정조를 지키는 안전지상주의자도 있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자기와 좀 더 맞는 언어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험가도 있다. 외국어 한 개에만 몰두하는 낭만주의자도 있고, 수집을 하는 바람둥이도 있다.



leonilda-casanova-et-donna-lucrezia.jpg



어떻게 하든 간에 외국어를 배우려면 관계부터 맺어야 한다. 그러나 연애는 환경과 의욕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환경 때문에 의욕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어떤 때는 의욕 때문에 환경을 접하게 된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라는 부차적인 문제의 정도다. 중요한 것은 연애를 제대로 하려면 의욕도 필요하고 환경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5개 국어와 관계를 맺었지만 2번만 제대로 연애했다. 딱딱한 네덜란드어는 초등학교 때부터 억지로 만나서 부담스러운 관계였기 때문에 15년 동안 만났는데도 다 잊어버렸다. 영어 이 녀석은 사랑해본 적이 없는데 여행 할 때마다 우연히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아름다운 스페인어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만났다. 우리는 6개월 동안 막 놀면서 즐기고 나서 사이 좋게 헤어졌다. 그리고 중국어는 내 첫사랑이었다. 배낭여행을 하다가 마주쳤고 거침없이 사귀었다. 여행 막바지에 다다를 수록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벨기에로 가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우린 2년 동안 난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매력이 철철 넘치는 한국어가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에 홀딱 빠졌고 바람 피우게 됐다. 결국 첫 사랑과 헤어지고 한국어와 정식으로 사귀었다. 7년이나 됐지만 열정은 그대로다. 외국어는 연애다.



의욕이 없다면 헤어져도 좋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그 언어와의 관계에 대해서 좀 생각해봐야겠다. 보통 학교에서 의무적인 관계로 시작하겠지만 정이 안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의무적인 관계는 피할 수 없지만 대신에 가볍게 만나도 된다. 의욕도 없는데 왜 자꾸 억지로 만나려고 하는가? 집에서는 부모님의 억압, 학교에서는 학생끼리의 경쟁, 사회에서는 취직 준비의 스트레스, 등등 마지못해 외국어를 공부하게 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의욕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된다. 억지로 연애하는 것과 다름 없다. 애정이 없는데도 억지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선물하는 것도 돈이 아깝고, 시간을 내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봐야 되고, 심지어 스킨십까지 의무적으로 해야 된다. 어쨌거나 의욕이 없어도 관계는 맺을 수 있지만 유지하는 것은 문제다. 난 낭만주의자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관계는 아예 끊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끊는 게 쉽지 않다면 최소한의 예의 정도만 보여줘도 좋다.


한국사람들과 영어의 관계를 좀 살펴보자. 의욕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도 분명 있지만 대부분은 억지로 관계유지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가볍게 만나기만 하면 괜찮지만 식상할 정도로 영어를 병적으로 과식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국어도 아직 소화시키지 못한 3,4살짜리 어린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억지로 영어를 밀어 넣고, 초등학교부터는 밖에서 축구공을 차고 뛰어 놀고 싶지만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원어민 앞에서 멍 때리고 앉아있기도 한다. 학부모들은 학원비에 과외비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들을 유학보내기 위해 기러기 아빠도 불사한다. 대학생들은 영어를 못하면 취직이 어렵기에 영어관련 직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관심사는 뒷전으로 두고 영어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이야기가 됐다.


영어교육.jpg



외국어를 의욕 없이 의무적으로 공부하면 머릿속에도 잘 안 들어가고 스트레스와 혐오감까지 생기기 마련이다. 영어를 아예 포기하란 뜻이 아니고 의욕이 없으면 시간과 노력을 아껴 부담 없이 가볍게 만나는 게 좋지, 억지로 연애하려고 애쓸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미다. ‘울면서 후회하기 전에 웃으면서 포기하자’라는 말은 한국 웹툰에서 봤던 말인데 이 경우에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영어공부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웃으면서 포기하고 좋아하는 분야에 몰두해보자고.







K리S


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