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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탄핵소추 인용으로 결론지어졌다. 탄핵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탄핵 인용 직전까지 꾸준히 커져 왔다. 이들의 우려대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에 항의하기 위해서 태극기집회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를 친박집회라고 부르든, 맞불집회라고 부르든, 탄핵반대집회라고 부르든, 태극기집회라고 부르든,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는 점차 거세지고 있다. 일당을 받고 태극기집회에 사람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었고, 스피커와 같은 무대장비나 시위 비품 등 집회를 유지하기 위한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제는 동원으로 설명이 되지 않은 수준의 군중이 운집하고 있다. 관제데모에 동원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 발로 나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태극기집회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태극기의 가치를 훼손했든 아니든 간에, 집회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제쳐놓더라도, 현상으로서 태극기집회는 ‘존재’하고 있다. 2017년 3월 8일 자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0.3%가 탄핵을 반대하고 있다. 여론조사의 시기와 방법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탄핵반대의견은 15~20%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탄핵찬반여론조사 3월 8일.jpg



국민 중 15~20%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를 단지 ‘박사모’의 발악으로만 치부해도 괜찮을 것인가? 왜 15~20%의 국민은 '당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악다구니를 쓰면서 내지르고 있는지' 이해해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선의'로 받아들이자는 말은 아니다) 내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거나 내 맘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은 저절로 사라져 주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고 고찰해볼 필요성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 태극기집회의 주목할만한 심리적, 행동적 특성은 무엇인지 포인트를 짚어보자.

 


[1단계] 의문 : 태극기집회의 특성


1. 태극기와 성조기를 상징물로 사용한다.


이들은 태극기를 촛불에 대응하는 집회의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다. 뜬금없이 남의 나라 국기가 왜 나오냐 싶지만, 미국 국기인 성조기도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jpg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2. 노령층이 중심이다.


일부 50대 이하의 연령층도 집회에 참여하고는 있으나, 주력은 60대 이상의 노령층이다.

이는 태극기집회 참가자의 대부분이 노령층이지, 노령층 대부분이 탄핵을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앞서 인용한 3월 8일 자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를 연령별로 살펴보면, 60대 이상에서도 탄핵 찬성 의견이 48.3%로 44.6%로 나타난 반대의견보다 오차범위 내에서 더 많다.



연령별 탄핵 찬반 여론조사.jpg

 


3. 폭력적이다.


일단 집회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격양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사람을 폭행하거나, 편의점에 들어와서 알바에게 사상검증(“촛불이냐, 태극기냐”)을 하거나, 편의점 내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등 깽판을 치는 행동은 명백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다.



지나가던 행인 폭행.jpg

 


4. 증오심을 분출하고 있다.


집회 참가자들이 표출하고 있는 가장 주요한 중심감정은 ‘증오심’이다. 그리고 이 증오심은 ‘빨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단지 분노하거나 과격한 것을 넘어서 특정 대상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는 점은, 다른 집회와 구별되는 태극기집회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증오심이 가득한 구호를 남발하고 있다. 또한 특검의 사진을 목매달아 놓거나, 태워버리는 등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증오심을 보여주고 있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jpg

오마이뉴스<링크>

 


태극기집회의 참가자들은 (국회, 민노총, 전교조, 언론 등) 자신들이 적대시하는 세력은 모두 ‘빨갱이’로 통칭하고 있다. 빨갱이는 폭력적으로 증오심을 표출하고 있는 이들의 감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상징적인 단어이다. 이들이 사랑하는 단어 ‘빨갱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여, 왜 이들이 이와 같은 심리적, 행동적 특성을 갖게 되었는지 그 발자취를 탐구해보자.

 


[2단계] 탐구 : 빨갱이 변천사


1. 빨갱이의 어원


빨갱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으나, 러시아어 빨치산(실제 발음은 파르티잔에 더 가깝다)과 강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партиза́н [파르띠잔]

[남성명사] 유격병, 빨치산(특수대원, 유격대원), 게릴라; (어떤 운동의) 주창자.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닥치는대로) 활동하는 사람



러시아어로 빨치산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는 “guerrilla”이다. 쉽게 말해 빨치산은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을 뜻하는 단어이다. 빨갱이는 게릴라를 뜻하는 러시아어 빨치산에 경멸의 의미를 담은 한국어 접미사 ‘~갱이’를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로 추정된다. 단어가 만들어진 시기에 이 단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빨갱이라는 단어는 절묘하게도 공산주의의 상징색인 빨간색과도 연관된다.

 

한국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인식된 빨갱이라는 단어는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갖고 살아남아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의 증오심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럼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들은 어떤 활동을 하였고, 그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 빨갱이는 어떻게 인식되어 있었을까?

 


2.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의 의미 확장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전쟁의 전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1950년 6월 25일 개전 직후, 오랜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던 북한의 기습에 한국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쭉쭉 밀렸다. 밑의 전황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2개월 만에 경상도 일부와 제주도만 빼놓고 다 밀렸다.



한국전쟁 전선변화1.jpg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후, UN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UN군과 한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과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확보한 거점인) 인천, 이렇게 양쪽 방면에서 북한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한국전쟁 전선변화2.jpg



그 결과 주력군과 합류하여 북한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적진에 남겨진 북한군이 생겨났다. 후퇴하지도 못하고, 보급선도 끊긴 패잔병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다시 말해 게릴라)기 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의미로 직결된다. 본대와의 연결이 끊기고 적진 한가운데 버려지듯 남겨졌기 때문에 보급을 받을 수 없었던 빨갱이는 생존을 위해 민간인을 약탈했다. 이때 적진에 버려진 게릴라가 좁은 의미의 빨갱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세가 오른 UN군과 한국군은 1950년 10월, 38선 이남의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북한으로 진군하였다. 11월에는 압록강 일부까지 북진하였다. 북진한 전선에서 개마고원의 11월 맹추위에 시달리던 UN군과 한국군은, 곧 이 전쟁을 남한 주도의 무력통일로 귀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한국전쟁 전선변화3.jpg



러나 지금까지 북한을 간접적으로만 지원해오던 중국 공산군이 전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황은 다시 역전된다. UN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빨갱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의 특징은 양쪽이 이리저리 밀고 밀리면서 전선이 수차례 오르내린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전선이 이리저리 밀리면서, 적진에 버려진 북한군 이외의 다양한 상황에도 빨갱이라는 단어가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 북한 점령지에서 북한군의 협박에 못 이겨 식량을 내어주고 살아남은 사람

- 피난 가지 않고 있다가 북한 점령지에서 강제징집되어 북한군이 되었다가 UN군에 붙잡힌 포로

- 빨갱이를 숨겨주거나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


  

후퇴하던 UN군과 한국군은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그해 3월에는 서울을 재탈환한다. 3년간의 전쟁 기간 중 서울의 주인은 네 번이나 바뀌었다. 전선은 원래 전쟁을 시작하였던 38도선 근방에 형성되어 고착상태에 빠졌다.



한국전쟁 전선변화4.jpg



양쪽은 전선이 밀릴 때, 상대진영과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민간인을 살려두지 않았다. 즉 사상 검증하여 불순분자를 사살한 다음에 후퇴하였다. 그리고 밀린 전선을 만회하여 다시 영토를 되찾았을 때, 생존하기 위해 상대진영에 협력한 민간인을 살려두지 않았다. 이러한 참상이 계속되면서 빨갱이란 단어의 적용 범위는 다시 확장된다.



- 빨갱이를 도와주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

- 빨갱이의 형제자매

- 빨갱이의 사돈의 팔촌

- 평소에 내 맘에 안 드는데 의심 가는 놈

- 의심은 안 가지만 덤터기를 씌워서라도 죽이고 싶은 놈


 

지도와 텍스트만 보고는 이러한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감이 안 올 수 있어, 당시 사진을 아래와 같이 첨부한다.



전쟁의 참상1.jpg



(왼쪽 사진부터)

- 전주에서 발견된 학살된 시신들(1950) : 미국문서기록보관청

- 가족의 시체를 보고 오열하는 사람 :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 미군의 네이팜 폭탄 공격으로 부상당한 사람 :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민주주의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 편에 붙어서 지구 끝까지라도 피난 가야 한다는 점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원래 상대진영의 군인을 의미하던 단어는 점차 내부의 적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빨갱이 의미의 확장1.jpg



증오의 살육전에 계속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었으며, 이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은 거지가 되었다. 휴전 협정이 맺어진 1953년을 기준으로 볼 때, 현재의 60대 후반은 1~5살이었고, 현재의 70대는 6~15살이었으며, 현재의 80대는 16~25살이었다. 태극기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현재의 노령층이 유년기에 인간으로서 무슨 일을 겪었을지 상상해보라.



전쟁의 참상2.jpg



(왼쪽 사진부터)

-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1950) 미국문서기록보관청

- 전쟁고아(1950) 임응식

- 생포된 북한군 포로(1950) 미국문서기록보관청

 

물론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의 100%가 태극기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며, 태극기집회 참가자의 100%가 이런 일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역사를 고찰해 보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통해 태극기집회의 중심감정을 표상하는 단어 ‘빨갱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1950~1953년에 일어났던 한국전쟁과 2016~2017년의 태극기집회 간에는 60년 이상의 시간 간격이 존재한다. 그럼 어떤 사건들이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을 지금까지 유지하게 해왔는지, 전쟁이 종결된 후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살펴보자.

 


3. 한국전쟁 이후, 전라도는 어떻게 빨갱이가 되었나


이 시점에서 이 글의 테마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현대사의 내용이 언급될 수밖에 없지만, 이 글은 본격적으로 현대사 그 자체를 다루기 위한 목적이 아니므로, 중요한 포인트만 짚고 넘어가겠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깊이 있는 식견을 가지신 분들은, 댓글을 통해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대신 이 글에의 목적은 현대사를 겪고 있었던 개인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으며, 이것이 종국적 고찰 대상인 태극기집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북한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라는 현재의 인식과 달리, 전쟁 직후 남한은 군사력, 경제력, 공업생산량, 전기생산량 등 국력의 주요한 대부분의 지표는 북한보다 열세였다. (인구만 더 많았다) 남한의 GDP가 북한을 추월한 시점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20년 후인 1970년대이다. 그러므로 전쟁 직후, 남한은 북한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증오스러우면서도 무서운 대상이 북한이었으므로, 남한 사회의 핵심가치는 ‘반공(공산당에 반대함)’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월 16일, 혼란스럽고 가난했던 남한사회에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육군 장교들은 쿠데타를 자행해 정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들은 군사독재를 시작하여 반공을 구호로 시민들의 자유를 탄압한다. 무서운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유니 민주화니 잡소리 집어치우고, 독재로서 우리끼리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논리였다. 정권의 정당성을 의심받는 정치세력은, 내부의 적과 처절한 살육전을 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증오심을 동력원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시민과 정부가 대립하면서 빨갱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적용 범위는 새롭게 확장된다.



- 박정희를 비판하는 세력

- 김대중(박정희를 가장 위협하는 민주화 운동가)

- 전라도(그 민주화 운동가의 핵심 지지기반)

- 말 많은 놈

- 평소에 내 맘에 안 드는데 사상이 의심스러운 놈




이렇게 해서 빨갱이와 전라도를 연합시킨 지역감정이 탄생하였다. 또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도 빨갱이와 강하게 연합되었다.



빨갱이 의미의 확장2.jpg




김대중은 빨갱이고, 빨갱이는 북한이랑 한편이기 때문에, 김대중은 북한과 같은 편이라는 기기묘묘한 논리가 실제로 먹혀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논리적으로 집요하게 주장하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간명한 낙인을 적용하였다.


물론 이런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다. 이와 같은 빨갱이 정서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오늘날의 태극기집회에서 관찰할 수 있다.

 

군사정권이 종식된 이후에도 박정희의 군사정권을 계승한 보수 정치세력은 빨갱이 정서를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997년 12월에 있었던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다.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측 관련자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휴전선 근처의 남한 측 군대에 총격을 가해 줄 것을 북한에 요청한다. 대선 후보가 우리 군대를 공격해달라고 적국에 부탁한 것이다.


전쟁은 이미 옛날 일이 되었지만, 빨갱이라는 단어는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새로운 적용 대상을 찾게 되었다.


- 선거 때 1번 안 찍은 사람

- 정권을 비난하는 사람

- 노동조합, 시민운동 등 체제에 비판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 평소에 내 맘에 안 들면서 말 많은 놈



다음과 같은 종합선물세트도 가능하다.


- 선거 때 1번 안 찍고 말 많아서 내 맘에 안 드는데, 알고 보니 전라도 출신



이쯤 되면 뭐 진골 중의 진골, 100% 순혈 빨갱이로 봐야 한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변천사를 보면, 전쟁의 쓰라진 상처와 증오심이 어떻게 지금까지도 따끈따끈하게 보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럼 태극기집회 참가자의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잡은 빨갱이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어, 분석 파트에서 제시된 문제에 하나씩 해답을 찾아보자.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의 인식.jpg



[3단계]분석 : 다시 빨갱이와의 전쟁


1. 태극기와 성조기를 상징물로 사용한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촛불은 곧 빨갱이와 동의어이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는 빨갱이와의 전쟁에서 우리나라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태극기가 이들의 상징물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던 동맹국 미국의 국기 또한 중요한 상징물이 될 수밖에 없다.

 


2. 노령층이 중심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나이가 65세 이상이어야 한다. 전쟁이 남긴 쓰라린 증오심을 동력원으로 삼고 있는 태극기집회의 주력은 노령층이 될 수밖에 없다.

 


3. 폭력적이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자신들은 빨갱이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쟁으로 나라는 지키는 마음이기 때문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조차도 이들에게는 숭고할 수밖에 없다. 군복을 입고 집회에 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4. 증오심을 분출하고 있다.


태극기집회는 한국전쟁에서 겪은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의 부활이다. 더군다나 (이들의 인식 속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국가전복세력과의 내전(civil war)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에, 미친 듯이 악다구니를 쓸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은 어디까지나 자연발생적이었다. 누군가 이런 증오심을 갖도록 기획하지도 않았으며, 미쳐 날뛰는 전쟁이라는 괴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바빴다. 죽고 죽이는 살육전 끝에 결과적으로 증오심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종전 이후의 빨갱이 정서는 국가 주도로 기획되고 관리되어 왔다. 국가가 전쟁으로 입은 국민의 상처를 잘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이 상처를 더 후벼 파고 부채질해서 정치적으로 잘 써먹었다는 것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렇게 ‘잘 관리된’ 빨갱이 정서는 60년이 지난 2017년까지 살아남아 태극기집회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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