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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쟁이와 온종일 부대끼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도 도전으로 느껴지는데, 나에게는 속싸개(스와들업) 떼기나 밤중 수유 끊기, 백색소음 없이 재우기 등이 그랬다. 이 ‘핏덩이에서 아기로 이행하는 관문’들을 통과하려면 겨우 적응한 기존의 패턴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식(Baby Led Weaning, BLW)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긴장되는 과제다. 우유로만 영양분을 섭취해오던 아기에게 사람의 음식을 먹이려면 부지런히 장을 보고 식단도 신경 쓰고 부엌에 더 오래 서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유식 거부의 악명은 어찌나 자자한지! 포털 사이트에서 ‘이유식 거부’로 검색하면 쏟아지는 문서가 수만 개다. 음식을 뱉어내거나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들과 씨름하며 속 태우는 엄마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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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영유아 건강 기록부 ‘블루 북(Blue book)’에 실려 있는 성장 곡선 차트


지레 겁을 먹은 탓에 생후 6개월까지 완모(완전 모유수유)로 버티려 했다. 그런데 아기의 발육 상태에 비상 불이 켜졌다. 한 달 반 만에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개업의. 호주에서는 전문의가 아닌 GP가 일반 진료 전반을 담당한다)를 찾아 측정한 아기 몸무게가 4.5kg에 그쳐 있었던 것이다. 보통 4개월 영아의 몸무게는 출생 시의 두 배로 불어나는데, 내 아기의 몸무게는 성장 백분위 그래프에서 최하 3%를, 그것도 한창 밑돌았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이렇게 심각한 케이스를 찾을 수 없었다. GP의 추천서를 받아 전문의 병원에 전화했지만, 진료 예약이 꽉 차 두 달 이후에나 순서가 돌아온다고 한다. 사설 전문의를 찾아가려니 상담 1회당 약 300달러의 비용이 요구된다. 급한 대로 당분간은 수유 횟수를 늘리고, 끊었던 밤 수유를 부활시키고, 이유식을 병행하면서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4개월 4주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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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을 조리할 때는 스팀과 블렌드가 가능한 아벤트 마스터기를 사용했다.

투입한 물이 증발하면 알람과 함께 찜 기능이 자동으로 꺼지고, 컨테이너를 뒤집으면 블렌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어 간편하다. 


캔이나 팩에 포장된 음식을 신뢰하지 않는 나지만, 부랴부랴 시작하려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판 라이스 시리얼부터 시험해 봤다. 분유에 라이스 시리얼을 말아 주자 대여섯 스푼 먹는가 싶더니 이틀째부터는 80mL를 비우고, 조금 익숙해진 뒤로는 하루에 두 끼도 먹었다. 적응하면서 초기 이유식 정보를 모았다. 대망의 첫 메뉴는 한국 이유식의 기본 쌀미음. 호주에서는 이유식용 쌀가루 스틱을 찾기 어려운 관계로 전날 밤부터 쌀을 불리고, 갈고, 끓이고, 거르고, 식히는 번거로운 과정이 동원되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트에서 제과제빵용으로 판매하는 쌀 분말을 이용하면 쌀미음을 간편하게 만들 수 있다고). 노력이 무색하게 쌀미음은 대실패를 기록했다. 호통을 쳐가며 시리얼을 먹던 아기가 쌀미음은 입에 들어오는 족족 뱉어냈던 것이다. 고생이 아까워 억지로 먹이려 하다가도 이유식에 부정적인 연관이 생길까봐 그럴 수 없었다. 아기의 얼굴과 내 손은 금세 엉망이 되었고, 쌀미음 특유의 점성이 때문에 뒤처리도 고역이었다. 결국, 한국식 이유식은 두 번의 시도 만에 포기했다.



1. 초기 이유식 (4~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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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유식


[새로 도입한 재료]

채소류: 당근, 애호박,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시금치, 케일

과일류: 사과, 배, 바나나, 복숭아, 파파야, 블루베리, 딸기, 아보카도, 키위

단백질류: 완두콩, 옥수수,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탄수화물류: 쌀, 쿠스쿠스, 감자, 고구마

기타: 파슬리, 바질, 체더 치즈, 파르메산 치즈, 그릭 요거트


쌀미음 베이스에 일주일 간격으로 새 재료를 추가하고 아기의 신체 반응과 호오(好惡)를 살펴가며 진행하는 한국 이유식과 비교하면 서양식 이유식은 꽤 터프하다. 계란 흰자, 견과류, 생우유, 꿀, 여지(Lychee) 등 알레르기 및 기타 위험 요소가 있는 음식을 제외하면, 오히려 다양한 재료를 소개해야 편식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아기 보면서 이유식 만들기는 신속함이 관건이다. 손에 익지 않은 작업이라 허둥댈 듯해 구글에서 검색한 레시피, 병원에서 받아 온 팸플릿, 책자 따위를 참고해가며 한 달간의 식단을 미리 짰다. 서양 초기 이유식에서는 데친 과일, 찐 채소, 물을 조금 넣고 끓여낸 재료들을 곱게 갈아 퓌레로 만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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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유식 식단표


아침은 엄마도 졸린 시간이라 시판 시리얼로 타협하려 했으나, 같은 메뉴를 2주쯤 반복하니 아기 쪽에서 먼저 흥미를 잃어 채소 퓌레를 한 차례 더 추가해야 했다. 둘째 주부터 점심은 채소, 저녁은 과일 위주로 먹였다. 블루베리의 경우 도입 시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초기 이유식으로도 무리 없다는 후기를 믿고 3주차에 배치했다. 치즈와 요거트 등 유제품군도 조심스럽게 시도해 본다. 4주차에 이르면 키위처럼 산도가 있는 과일, 그리고 육류 가운데 가장 질감과 냄새가 부드러운 닭고기가 등장한다. 6개월부터는 소고기로 철분을 보충해야 한다.


GP는 벌크업을 위해 퓌레에 무염 버터(Unsalted butter)를 손톱만큼 첨가하라고 조언했다. 간을 하지 않는 이유식에 버터가 들어가면 약간의 풍미가 가미되어 맛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아기들이 뭘 몰라서 주는 대로 먹을 것 같지만, 입맛 맞추기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경험상 내 입에 이상한 이유식은 아기도 싫어했다. 분유를 10mL~20mL 넣어 단맛을 첨가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같은 이유로 바나나, 고구마, 단호박은 실패할 수 없는 선택이 된다. 닭 육수를 쓰면 더 깊은 맛을 낼 수 있지만, 이유식을 위해 육수를 만들고 보관하고 관리하기에는 업무량이 지나쳤다. 아기가 어느 정도 잘 먹는다면 육수 제조까지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2. 중기 이유식 (7~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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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개월에는 아주 부드러운 고무 재질 스푼을, 후기로 갈수록 단단한 플라스틱 재질 스푼을 사용한다


[새로 도입한 재료]

채소류: 오이, 셀러리, 무,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가지, 적 파프리카, 비트, 파스닙(Parsnip), 스웨이드, 옐로우 스쿼시, 리크(Leek, 서양식 대파), 마늘, 부추, 고수

과일류: 청포도, 수박, 체리, 자두, 살구, 넥타린, 망고, 패션프루츠, 라즈베리, 블랙베리, 망고스틴(mangosteen), 용안(Longan), 드래곤프루츠, 파인애플(9개월)

단백질류: 강낭콩, 렌틸콩, 병아리콩, 연어, 흰 살 생선, 양고기, 두부, 계란 노른자(9개월)

탄수화물류: 오트(Oat)

기타: 올리브유, 참기름, 코코넛 밀크, 커민(Cumin, 쯔란) 파우더, 계피 파우더, 흑후추, 크림치즈


서서히 질감 연습을 시켜야 하는 시기다. 조금 거친 음식을 주었을 때 먹는 속도가 지나치게 더디거나, 입에 물고 삼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고 고운 퓌레 단계로 돌아간다. 블렌더를 사용할 경우 익힌 재료의 2/3를 먼저 곱게 갈고, 여기에 나머지 1/3을 추가해 살짝 갈아주면 중기 이유식에 적합한 덩어리를 만들 수 있다. 바삭거리지만 입에 넣으면 녹아내리는 형태의 시판 아기 과자를 먹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다. 딱딱한 음식을 입에 넣고 맛을 보는 훈련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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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판매되는 영아용 스낵들


아기가 먹성이 좋은 편이라 한 끼 당 80mL에서 100mL, 120mL, 150mL, 170mL, 200mL까지 양이 꾸준히 늘었다. 음식이 너무 묽거나 되직해도 거부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재료를 잘 이해해야 한다. 청포도나 수박은 수분이 많아서 퓌레보다는 핑거 푸드 형태가 적합하고, 애호박, 멜론류, 베리류(딸기, 블루베리, 라즈베리, 블랙베리 등)도 갈고 나면 상당히 흥건해지니 참고하도록 하자. 새로운 재료가 월령에 적합한지 의심스러울 때는 구글에 ‘Can I give my baby+재료 이름’라고 검색하면 대부분의 경우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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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4개월용 라이스 시리얼, 6개월용 라이스 시리얼, 오트, 쿠스쿠스.


중기 이유식 레시피는 두세 가지 재료를 조합했던 초기 이유식보다 훨씬 복잡하다. 레퍼토리가 고갈되었다면 ‘재료 이름+baby food recipe’ 키워드로 구글링해도 좋고, 어른이 먹는 음식 레시피에서 영감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면, 연어+크림치즈+오이+아보카도 조합으로 캘리포니아 롤을, 소고기+강낭콩+양파+적 파프리카+토마토 조합으로 칠리 콘 카르네를, 소고기+무+두부+참기름으로 소고기뭇국을 흉내 내는 식이다.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과일과 궁합이 좋은데 그 중에서도 사과, 망고, 자두, 살구, 파인애플 등이 유용하다. 중기 후반부터는 이유식에 참기름을 소량 둘러주거나 커민 파우더, 시나몬 파우더, 후추 등의 향신료를 첨가하기 시작했다. 사과가 들어가는 메뉴에 시나몬 파우더를 약간 추가하면 맛과 향이 눈에 띄게 업그레이드된다. 망고와 코코넛 밀크를 조합한 트로피컬한 풍미의 닭고기 퓌레도 아기에게 무척 반응이 좋았다.


몸무게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9개월 경에는 무염 버터 넣기를 중단했다. 밤 수유를 끊기 위해 아침에 채소 퓌레, 점심에 고기 퓌레, 저녁에 과일 퓌레를 먹이는 기존 식단 순서를 교체했다. 포만감이 큰 육류 메뉴를 저녁에 배치해 밤 동안 배가 고파 깨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식단 순서를 교체한 당일부터 밤잠을 재우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마지막 수유와 함께 잠들곤 했던 아기가 밤에 아주 활동적으로 변해, 자기 전 한 시간여를 놀아주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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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살 생선, 토마토, 고구마, 체더 치즈, 계란 노른자, 쿠스쿠스를 섞어 만든 10개월용 이유식.

초기 이유식 퓌레보다 입자가 훨씬 크고 물기가 적다.



3. 후기 이유식 (10~12개월)


후기 이유식부터는 재료보다는 질감과의 싸움이다. 스트링 치즈나 따위를 손으로 찢어 먹여보고, 블렌더로 갈기보다는 숟가락이나 매셔로 부숴서 이유식을 만들어 본다. 과일은 작은 조각으로 잘라서 간식으로 준다(숟가락으로 떠먹이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이제부터는 이유식이 주식이 되어, 단유를 목표로 수유량을 서서히 줄인다.


이번 달 10개월에 접어든 아기는 9.2kg의 몸무게를 기록했다. 성장 곡선에서 정확히 50분위에 해당하는 숫자다. 여섯 달 만에 초 저체중에서 정상 체중으로 진도를 따라잡기까지는 엄마인 나의 눈물겨운 노력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잘 따라와준 아기의 덕이 크다. 가냘픈 아기를 바라보며 자책하던 날들을 회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를 안고 체중계를 오를 만큼 조급했고, 양육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다. 아기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체중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 마음이 다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아기가 먹는 재미를 찾고 잘 커주기만 한다면 한국식 이유식이든, 서양식 이유식이든 방법이 중요하겠는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이 글이 이제 막 이유식을 시작하려는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탱알

트위터: @taeng_al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