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3. 12. 12. 목요일

산하








1.JPG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꽤 큰 규모의 도난 사고가 발생했다. 방학 내 아르바이트로 모아 놓은 거금 50만원이 증발한 것이다. 돈을 잃어버린 학생은 분에 못이겨 지하에 있는 문방구로 달려가 자보 용지를 사서 써 내려갔다.



"저는 오늘 방학 내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 학자금 등 요긴한 용도로 쓰려고 했던 50만원을 학교 도서관에서 도둑 맞았습니다... 신성한 학교 도서관에서 이런 절도 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학우 모두의 수치입니다. 학우 여러분. 최소한 옆 사람의 물건이라도 약간씩 더 신경을 써 줍시다... (하략)"



대자보는 도서관 벽에 큼지막하게 붙여졌고 학생들은 그 앞을 지나며 혀를 찼다. 이런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데다가 당시만 해도 등록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 액수였던 탓이다. "또야?" "야 이번엔 큰데." "거 참 나쁜 놈의 새끼." 그렇게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표하고 도둑놈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대개 지나쳐 넘어갔는데 보통 이상으로 반응을 보인 의혈남아가 있었다. 도난 피해자의 대자보가 찢겨져 버려질 무렵 또 한 장의 대자보가 나붙은 것이다.



"저는 경제학과 87학번 아무개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학교 도서관에서 방학 내 비지땀을 흘리며 모은 돈 50만원을 도둑 맞은 한 학우의 호소를 들었습니다.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 도서관에서 횡행하는 절도 범죄는 범인이 학생이건 아니건 우리 모두의 수치입니다... (중략) 더우기 성실히 살아가는 한 학우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힌 이번 사태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고 봅니다. 학우 여러분. 열람실 입구에 제가 모금함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 모금함에 여러분의 성의를 담아 주십시오. 관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불행은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다시 그 불행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하략)"



다음 날 당장 열람실 문 앞에는 모금함이 등장했다. 적어도 이런 식의 문제 제기는 처음이었거니와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집에 가서 종이를 오려 붙여 엉성하나마 모금함을 만들어 갖다 놓은 한 학우의 마음 씀씀이에 더욱 감복한 나는 즉석에서 있던 돈 2천 원을 털어 넣었다. 그건 나 뿐이 아닌 듯했다. 이틀쯤 지나자 모금함이 제법 묵직해 졌는데 또 하나 사람들의 발길을 묶어 놓는 대자보가 내걸렸다.



"돈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제 문제로 해서 모금함까지 설치되고 학우들이 돈을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학우 여러분의 성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부주의한 한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같이 생각하시며 모금함까지 만들어 주신 분께는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대자보를 쓴 것은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도난 사태의 심각함을 알려 보고자 한 것이었지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바라고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자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학우들의 양심과 사랑이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라는 논리적인 낙서부터 "나 같으면 이자 쳐서 받는다. 안 받긴 왜 안 받아."라는 애교 어린 촉구에 이르기까지 대자보에는 많은 볼펜, 사인펜 글씨가 새겨졌고 그 앞에는 호기심 어린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너무도 흐뭇한 대자보 내용에 미소짓는 학생들이 항상 서 있었다.


대자보-1.jpg



"X월 X일까지 모금함에 모인 돈은 X만 X천 원입니다. (모금 하루 만에 10만 원이 훨씬 넘었다고 함.) 일단 이것을 피해 학우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학우 여러분의 열렬한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일로 저는 제가 얼마나 많은 익명의 선한 사람들을 학우로 두고 있는지를 재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략)"



나는 이 글을 보며 마음 속으로 박수를 치다가 그로는 모자랄 것 같아 작은 소리로나마 소리를 내어 박수를 쳤다. 빈 자리를 두고 주먹싸움까지 일어났던 적이 있는 도서관이지만 그래도 대학은 대학이라는 뿌듯함으로, 익명의 선한 사람의 대열의 꽁무니에라도 낀 자긍심으로. 그런데 다음 날 도서관을 들어선 학생들은 또 한 번의 작은 감동을 맛보게 된다. 마지막 대자보가 이미 눈에 익어버린 글씨체를 드러내며 붙어 있었다.



"지난 도난 사건의 피해자이신 *** 학형은 끝내 학우들의 성금을 받기를 고사하셨습니다. 이유는 이미 밝히신 대로이며 그분과 저, 그리고 몇몇 분들이 의논한 끝에 몇몇 열람실에 벽상 시계가 없어 학우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에 착안, 벽상시계 몇 개를 사서 기증하기로 하였습니다. 학우 여러분의 많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학우 여러분의 호응과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치환시켜 생각할 줄 알고 개인의 불행을 개인만의 불행으로 치부하지 않고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할 줄 아는 것, 그 책임을 위해 자신의 편익을 일부 유보할 줄 아는 것, 이것들이 민주 시민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라면 학우의 불행에 자기 일같이 분개하며 모금함을 만들어 두고 이를 관리하며 일일이 대자보를 써 내려갔고 돈을 받지 않으려는 학우를 설득하기도 하고 결국은 온당한 해결로 귀결시킨 학생은 그야말로 그 전형이었을 것이다. 오늘 그를 떠올리는 이유는 아래의 대자보를 보았기 때문이다.


단 하루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자리를 날려 버리는 잔인함 앞에서, 내 집 앞에 지나는 송전탑을 볼 수 없다며 독을 마시고 죽어간 노인 앞에서, ‘자본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수십억 가압류가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 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는 이 하수상한 시절에’ 그는 매직 글씨로 써 내려간 거친 대자보에서 이렇게 묻는다. “안녕하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관계 없으신가!” 그리고 그는 이렇게 스스로 답한다. “만일 안녕치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각혈하듯 묻는다. 아마 이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그는 스스로 울컥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하십니까.”


5.jpg



미안하다. 내 20년 후배 경영학과 08학번 현우야.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많은 분들이 “요즘도 이런 학생이!” 하면서 감탄하지만 나는 그 탄성이 창날처럼 귀를 찌를 뿐이다. 요즘 학생들이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개념 없는 세상을 만든 것이 결국 우리들인 것을. 바로 ‘개념’있는 학생들,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고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치워 버린 채 담 아래에서 종종거리는 젊은이들을 손가락질하며 ‘개념없다’고 치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요즘도 이런 애가...”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 안녕치 못하다 현우야. 네 말대로 무슨 내용이든 소리쳐 말해야겠다. 행동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까지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 무엇보다도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치환시켜 생각할 줄 알고 개인의 불행을 개인만의 불행으로 치부하지 않고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할 줄 아는 것, 그 책임을 위해 자신의 편익을 일부 유보할 줄 알았던’ 네 21년 선배의 기억을 더듬고 오늘의 네 안타까운 대자보 사진을 어루만지면서 드는 생각이다. 네 말처럼 안녕치 못하면 무슨 내용이든 외쳐야 할 것이고 무슨 짓으로든 보여야 할 것이다. 데모를 못 나갈 입장이면 다른 거라도. 회사의 감시에 인터넷도 어려운 입장이면 온라인 입금이라도. 박정희 만세를 부르짖는 택시 기사가 귀찮더라도 대꾸해 주며 내 입장을 전하는 일이라도. 고맙다 현우야.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줬다.







 



편집부 주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의 주인공 

경영 08 현우 님을 공개 수배합니다.


감히 가카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걱정하지 아니 하고

제쳐두었기에 친가카 봉헌 매체로서 이를 좌시할 수 없는 바,


현우 님을 기사 작성 등의 징벌에 처할 예정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벙커 지하 감옥에 감금하여

또 다른 처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산하

트위터 : @sanha88


편집 : 꾸물, 보리삼촌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