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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칭찬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에 관해서라면 <국가대표>나 <국제시장>처럼 애국심을 쥐어짜는 ‘국뽕’ 무비나 <신세계> 이후 우후죽순 조류를 형성한 브로맨스 누아르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봉준호는 달랐다. 비이성이 지배하는 음습한 공간을 슬랩스틱이나 ‘찰진’ 욕설 같은 남성적 유머가 가로지른다. 무능한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반지성주의가 촌극을 빚는 <살인의 추억>, 소도시의 폐쇄적 분위기와 뒤틀린 모성이 절묘하게 조화하는 <마더>. 밭두렁에서 김상경을 날아 차는 송강호, 한강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박해일, 관광버스에서 넋 나간 춤을 추는 김혜자는 내가 아는 한국 그 자체였다. 박찬욱의 유미주의나 김지운의 장르 영화에 비해 적당한 –그렇게 보이도록 의도된– 세속적 천박함을 갖춘 봉준호의 영화는 ‘무난’한 편이었다. 빈정대기 좋아하는 관객이건, 상업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건, 한국인의 공통 감각을 관통하는 정서는 봉준호 영화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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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스틸컷


그런 봉준호가 제1세계 배우들을 대동하고 글로벌 영화 시장에 진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목이 <설국열차>라고 했다. <설국열차>의 시놉시스 자체는 구미를 당기지 않았다. 가상의 열차가 빙하기에 접어든 지구의 산기슭 철로를 끝없이 달린다. 생존자들은 계급에 따라 배정받은 차량에서 규칙을 지키며 생활하고, 그 가운데 가장 하층 신분인 꼬리 칸 인물들이 엔진을 겨냥해 폭동을 일으킨다. 너무나 투명한 스토리였다. 시스템, 계급, 혁명에 관한 영화로구나! 설정만 들어도 ‘멋진 신세계’나 ‘1984’ 같은 고전 디스토피아 SF 소설의 영상화 버전이라든가, 그 전해 개봉한 <헝거 게임>에서 오락적 요소를 덜어내고 철학적 분위기를 가미한 영화를 상상할 수 있었다. 결과물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설국열차>에서는 설정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가 엄격한 상징으로 기능하며 관객이 읽어야 할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치 공통교육과정에서 배우는 문학 읽기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뮤직비디오 해석처럼, 관객은 감독이 티 나게 숨겨놓은 힌트들을 찾아 조립하도록 유도된다. 그것이 오히려 <설국열차>를 뻔해 보이게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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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봉준호는 <해무>의 제작을 맡아 고생을 했다고 들었고, <마더> 같은 작품이 그리워질 즈음 <옥자>에 착수하면서 다시 한 번 세계시장을 노린다. 세계 관객들이 공감할 내러티브를 발굴하는 여정은 <옥자>에 이르러 마침내 극단적인 보편성을 달성한다. 유전자 조작 슈퍼 돼지 ‘옥자’를 가족처럼 기르던 소시민이 대기업과 NGO 단체의 알력 다툼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해프닝은 공장형 축산과 자본주의라는 윤리적 화두를 던진다. 산골 소녀 미자는 순수한 자연을, 다국적 식품기업 미란도 그룹은 자본주의를, 식용 동물사육에 반대하는 ALF(동물해방전선)는 인간을 상징함으로써 자본주의–인간–자연의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데, 각 그룹에 소속된 인물 개개인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변주된 역할을 수행한다. 평판에 민감한 CEO 루시 미란도와 냉혈한 자본주의 빌런 낸시 미란도, 실세처럼 보이지만 한물간 닥터 조니, 기업 논리에 과잉 충성하는 하급자 박문도, ALF의 리더이자 조정자인 케이, 결과 지향적인 케이, 과정을 중시하는 레드, 극단적 신념을 가진 실버가 구현하는 각각의 전형성은 집단의 구성요소를 ‘빠짐없이’ ‘온전하게’ 표상하려는 감독의 욕망을 반영한다.


문제는 봉준호가 제한된 시간, 대사, 행동 내에서 인물을 효율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동원하는 과장의 방식이다.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미소 짓는 루시 미란도의 치아에서 빛나는 교정기, 옥자 구출 버스 안에서 쇠약해진 상태로 방울토마토를 거부하는 실버의 이미지, 슈퍼 돼지 콘테스트에서 군중을 가로지르며 나오는 서커스 텐트 같은 연출은 <괴물>에 등장하는 사팔뜨기 미군 책임자를 보면서 느꼈던 동화적 깊이를 발생시킨다. 봉준호가 외국인 배우를 다룰 때 특히 두드러지는 이 공상적 터치는 보편적이긴 하지만 핍진함(실물과 아주 비슷하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봉준호의 강점이었던 토착적 정서는 갈 곳을 잃고 오리엔탈리즘으로 미끄러지며 동양을 타자화한다. 미자가 사는 강원도 산골은 <쿵푸팬더>의 배경으로나 나올 것 같은 중국적 고지대로 윤색되고, 돼지 코와 머리띠를 한 소녀가 휴대폰으로 셀피 동영상을 찍는 지하상가 추격신에서는 한국 이색문화를 탐방하는 백인 유투버의 시선이 느껴진다. 괴짜 과학자 닥터 조니는 한국의 토착적 요소들과 기이하게 뒤섞인 혼종이다. 소주에 취해 실험실을 뒹굴고 무대 위에서 사타구니를 흔드는 조니의 광기에서 우리는 한국적 레퍼런스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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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의 긴장은 래디컬 생태주의자들이 붕괴시킨 루시 미란도의 휴머니즘적 자본주의를 낸시 미란도의 자본만능주의가 대체하면서 최고조에 이른다. 동물을 해방하겠다는 ALF의 ‘선한 의도’가 결과적으로 차악 대신 최악을 소환한다는 점은 <옥자>가 품은 최대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쌓인 게 돈”이지만 인정적 호소에도 도덕적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는 낸시 미란도에게는 자본(순금 돼지)만이 유일한 논리로 통한다. 미자의 할아버지 희봉이 옥자를 사들이려던 돈으로 마련한 순금 돼지는 이번에야말로 제 기능을 한다. 낸시 미란도 같은 냉철한 자본가가, 슈퍼 돼지의 시장 가격보다 가치가 한참 떨어지는 금돼지에 마음을 사로잡혀 딜을 수락했던 것일까? 산골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살아온 미자에게 옥자 찾기는 일종의 ‘자본주의 교육’이었던 셈이다. 미국에 가기 위해 돼지 저금통을 깨고, 물물교환 재화로 순금 돼지를 활용하고, 옥자가 아닌 미란도 그룹의 슈퍼 돼지 상품을 구매하면서 미자는 결국 돼지 아이콘이 상징하는 자본의 의미를 몇 번이고 수용한다.


그리고 이 패배주의적 비전이 주는 씁쓸한 맛에 한 가닥 희망을 떨어뜨리는 장치가 바로 아기 돼지다. 다른 슈퍼 돼지들의 운명을 어쩌지 못했다는 비통함에 잠겨 도살장을 빠져나올 때, 우리에 갇힌 슈퍼 돼지 한 쌍이 철창을 통해 미자 일행에게 아기 돼지를 보내온다. 아기 돼지를 옥자의 입에 감춰 무사 귀환한 미자가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는 어린 소녀와 무고한 동물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고생시킨 대가처럼 주어지며, 여기서 ‘새로운 생명’이 주는 가능성이라는 미래전망은 전적으로 두메산골이 상징하는 낭만화되고 신비로운 자연의 힘에 의존한다. 경찰의 마취총을 우산으로 막아내거나 쇠구슬을 바닥에 뿌려 추격자들을 방해하는 –<나홀로 집에>에서나 볼 것 같은– ALF의 전투 기술만큼이나 순진무구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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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옥자>가 육식 반대 영화가 아니라고 밝힌 바 있으나, 관객들이 꿋꿋이 육식 반대 메시지를 읽어내게 만드는 원인은 <옥자>의 나이브한 동물 애호가적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옥자>의 2시간의 러닝타임 중 초반 20분은 ‘옥자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득하는데 할애된다. 옥자의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 미자를 벼랑에서 추락할 위기로 몰아넣고, 미자와 옥자가 주고받는 스킨십을 끊임없이 전시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적 관계를 부각한다. 경찰과 미란도 그룹에 쫓기며 지하상가를 탈출하는 옥자 뒤로 잡히는 족발집 광고물은 관객의 죄책감을 자극하도록 기능한다. 슈퍼 돼지에 의인화된 성격을 부여한 뒤 “유전자조작으로 태어난 슈퍼 돼지도 알고 보면 이만큼이나 사랑스러운 동물이에요! 소시지가 되면 슬프지 않겠어요?”라고 호소하는 아주 단순한 전략이다. 관객들은 정서적 유대감에 의존해 옥자를 응원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는 동물보호를 이야기하기 위해 해당 동물이 얼마나 착하고 쓸모 있는 존재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하는가? 이러한 전제 과정이 불필요한 과몰입으로 여겨진다는 점 또한 <옥자>의 점수를 깎는 요소라 해야 할 것이다.


<옥자>는 참 이상한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에서 장점으로 꼽히던 스토리텔링의 습관들이 <옥자>에서는 빠짐없이 단점으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징한 상징화는 풍자극을 1차원적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범세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조율하려는 긴장은 스테레오 타입을 재생산한다. 꽉 닫혀 읽기 방향이 정해져 있는 텍스트는 해독하기 쉬운 만큼 지루하고, 감독의 관찰력으로 추출한 디테일과 아이러니는 평면화를 상쇄하려는 의무적 트릭으로 느껴진다. 봉준호의 한국적 정체성이 글로벌한 촬영환경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한계인지,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예전 같은 매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앞으로 나올 작품을 더 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근작들이 여러모로 아쉽기는 하지만, 재벌이 망해도 삼 년은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옥자>의 흥행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칠지언정 한국 대표 감독이라는 이름값은 당분간 지켜질 일이다. 그 명성을 어떻게 이어나가는가는 봉준호에게 달렸다. 





탱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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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