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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환궁한 뒤에 온정의 정청(正廳)과 동서 침실(東西寢室) 및 남북의 상탕(上湯)은 모두 다 봉하여 잠그고, 그 나머지 집에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목욕하게 하되, 남북의 다음 탕은 사족(士族) 남녀들에게 목욕하도록 하고, 남북 빈 땅에 있는 탕에도 집을 짓고, 또 월대 밑에 더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도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모든 남녀들에게 다 목욕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1433년) 4월 16일의 기록 중 발췌


세종시절 온천목욕을 위한 건물을 올렸는데, 세종이 환궁한 이후 이 건물을 민간에 개방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를 민간에 개방한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는데, 기록상의 내용을 보자면 온천과 욕실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동서에 침실이 있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욕실이 있고, 그 외에도 온천수가 나오는 곳에 따로 건물을 짓게 한 걸 보면 꽤 큰 목욕시설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쓰던 목욕탕을 개방했던 것에 반면, 호화스러운 욕조를 만들어 목욕을 즐겼던 이도 있었으니, 바로 연산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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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큰 놋 목욕통 4개를 튼튼하고 두껍게 주조하여 탄일(誕日) 잔치까지 대궐로 들이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1504년) 5월 26일의 기록 중 발췌


(상략)“대내(大內)에서 쓰는 목욕통에 드는 옻진(漆汁)을 바삐 올려보내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1년 (1505년) 8월 21일의 기록 중 발췌


연산군 시절의 기록이다. 첫 번째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놋으로 만든 욕조를 만들게 했다는 걸 알 수 있고, 두 번째 기록을 보면 옻칠을 한 화려한 욕조를 만들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연산군의 목욕을 위해 목욕물을 길어 댈 하인 100명을 뽑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걸 보면 연산군의 목욕 편력이 꽤 호사스러웠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욕조’에 관한 기록 중 가장 ‘화려했던’ 기억을 정리해 봤다. 이 기록으로만 보면, 조선시대 목욕문화가 발달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세종과 연산군 시절의 기록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목욕문화는 치료와 예법의 경우로 한정했었다. 치료는 앞에서 언급한 세종시절의 온천행을 생각하면 된다. 조선시대 왕들은 기본적으로 종기와 부스럼을 달고 살았다(일종의 가족력과 같다). 이런 종기나 부스럼이 아닌 경우에도 왕들은 병을 다스리기 위해 수시로 온천을 찾았고, 온천 주변에는 왕들의 임시 궁궐이라 할 수 있는 행궁(行宮)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 ‘욕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법은 뭘까? 예법의 경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당(祠堂)이다. 사당이란 조선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집으로 양반들도 이 사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기 전에는 재계목욕(齋戒沐浴)을 했다. 부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정갈하기 위한 행위였다. 때문에 사당 옆에 목욕을 할 수 있는 우물이나 시설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목욕문화는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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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의 목욕 문화를 이야기 할 때 꼭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종교’이다. 조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종교는 ‘불교’가 대세였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절까지 한반도인들은 불교를 가치체계의 중심에 놓고 생활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목욕’을 수행의 차원에서 말한다. 세속의 더러운 것을 털어내고, 수행의 수단으로 목욕을 생각했다. 덕분에 고려시대 사람들은 목욕에 대해서 별 거부감이 없었고, 수시로 목욕을 즐겼다. 여름철의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몸을 씻기도 하였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시내 가운데서 목욕을 했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깨끗했었던지 중국인들은 때가 많다며 비웃을 정도로 ‘제법’ 청결한 민족이었다.


이런 목욕문화 덕분인지 당시 고려 지배층의 목욕 문화는 화려했는데,


(상략) 왕의 천성이 청결한 것을 좋아하여 한 달에 목욕하는 비용으로는 여러 향이 10여 항아리에 달하였고 저포는 60여 필에 이르러 이른바 수건(手巾)이라고 하였는데, 내시(內豎)들에게 많이 도난당하였으나 왕은 알지 못하였다. (하략)

- 고려사절요 충숙왕 무진 15년(戊辰十五年 : 1328년)의 기록 중 발췌


고려 말 충숙왕의 목욕 기록이다. 향이 10여 항아리라는 건 영화 속에 나오는 로마 귀족들이 향유로 목욕을 하는 걸 떠오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충숙왕은 왕 전용의 향유를 가지고 목욕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다음 문장이다. ‘60여필에 이르는 수건(手巾)’이다. 이 당시에도 수건을 썼던 것이다. 물론, 고려시절 수건에 관한 기록은 이보다 더 앞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수건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목욕용품이란 것이다.


고려시절의 목욕문화가 ‘일상’과 연관 됐다면,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 상식적으로 봤을 때 사람이 씻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명목상으로 조선시대의 목욕은 ‘예법’의 목적과 ‘치료’의 목적으로 활용됐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만들어진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고려시절처럼 남녀가 혼욕을 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있을까? 이는 예를 모르는 오랑캐의 행동이었다. 성리학을 내세운 사대부와 왕실 식구들의 기본적인 목욕 방법은 목욕 전용 가운(?)을 걸치고 함지박을 파서 만든 욕조에 들어가 씻는 것이었다. 전신목욕 자체를 피했다고 해야 할까? 대신 이들이 추구한 씻는 방법은 신체 부위별로 나눠서 씻는 방법이다. 얼굴을 씻거나, 손, 발, 뒷물, 양치 정도였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전신 목욕을 아예 안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오(5월5일)날 창포물로 머리를 감는 걸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날을 잡아’ 전신목욕을 했었는데, 단오를 비롯해 삼짇날(3월 3일), 칠월칠석(7월 7일) 등등이 바로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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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그것과 비교하면 좀 ‘더럽다’라고 말해야 할까? 가옥 구조부터가 ‘욕실’이라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고, 이념적으로도 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 낸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목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목욕의 사회적 의미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금의 개념과 달랐을 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씻지 않고 살 수 없다. 다만, 시대상황과 당시 사회분위기(철학)에 따라 그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나신(裸身)을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전신목욕을 할 수 있는 분위기의 사회가 있었다면, 몸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금기시 해 조심스레 부분목욕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효율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전자가 맞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 사회가 미개하거나 후진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를 관통하는 그만의 사정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이 우리나라 세신사(때밀이)들의 전신 때밀이 서비스를 보며 문화적 충격을 느끼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화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의 기준으로 시대를 보지 말고 그 시대에 들어가 문화를 바라보기 바란다. 조선 사람들이 씻기 싫어서 안 씻은 게 아니고, 고려 사람이 씻는 걸 좋아서 씻은 건 아니다(물론, 깨끗이 씻는 게 훨씬 더 좋지만 말이다).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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