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다닐 땐 과 학생 모두가 T셔츠를 맞춰 입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학기 초에 과대표가 선출되고 집행부가 구성되면 거의 예외 없이 첫 번째 안건은 과T의 디자인이었다. 문제 많은 과T도 많았다. 이를테면 88년 우리 과티는 입고 다닌 사람이 별로 없다. 지금은 미국에서 변호사하는 동기의 작품이었다. 하얀 색에 뻘건 글씨. “신새벽을 창조하라 그대 사학도여.” 나 원 참, 변호사하기 망정이지 디자이너 같은 거 했으면 초저녁에 굶어 죽었다.
가끔 독특하고 재치 넘치는 문구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무릎을 치게 만든 옷들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의 신방과 과T가 선연한 자태로 남아 있다. 시커먼 바탕에다가 밝은 색으로 “말하라”라는 문구가 간단명료하고도 굵직하게 박혀 있었던 과T.
신방과 친구의 해석에 따르면 뭐 암흑(검은 천이 가격이 쌌던 걸 내 안다)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언론의 모습을 밝은 글씨로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그건 황구 꿈에 청룡 해몽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T셔츠는 최소한 언론의 기본적이면서 핵심된 기능이 ‘말하는 것’임을, 그리고 티셔츠를 입은 자가 신방과의 소속원임을 더 확실하게 밝혀 주었다.
“말하라.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고 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두려움 때문에 할 말을 하지 못할 때, 거리낌 때문에 논하는 것을 주저하게 될 때 언론은 빛을 잃는다. 그 말의 진실함을 입증할 수 있다면, 논리를 세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언론인이 할 말과 못할 말을 굳이 곰비임비 가려야 할 이유는 없다.
광고주가 눈에 아른거려서, 힘 가진 자들의 주먹질이 두려워서 또 발렌타인 17년산의 달착지근함이 그리워져서 입이 무거워진다면 언론인으로서의 발걸음에도 납덩이 발찌가 채워지게 마련이다. 말하지 못하는 언론인은 스프 없는 라면이요, 해물 없는 짬뽕일 뿐이다.
언론사의 사장, 즉 언론인들이 밥 벌어먹고 사는 조직의 우두머리의 가장 큰 책무 중 하나는 바로 휘하의 수다꾼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말하게”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게을리 할 때, 되레 자신의 수하들의 입을 막거나 ‘국정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후배들을 교육시키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게 할 때, 그들은 언관(言官)의 감투 대신 죄인의 용수를 쓴다.
즉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을 시켜 언론을 질식시키고 타락시키는 악질 주범들의 종범이 되는 것이다. 최승호 감독의 영화 <공범자들>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추상같이 버티고 서서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기는커녕 추풍낙엽보다 더 흉물스럽게 권력자의 발아래에서 시몬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다가 ‘큰집’에 불려 들어가 쪼인트를 까이고 펄쩍펄쩍 뛰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놈, “그놈들은 해고할 때 증거도 없었어. 그냥 해고한 거야.”라고 고백하는 양심에 털이 하늘공원 억새로 난 놈, 권력자에게 질문을 던질 줄은 모르고 아부할 줄만 알았던 저열한 놈, 질문 던지는 걸 직업으로 했던 주제에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에는 단 한 마디 답할 줄도 모르는 모자란 놈, “세월호 유족이 무슨 깡패냐?”라고 지껄이고 다녔던 놈, 그러면서 말할 줄 아는 후배 잘라내고 맘에 안 드는 놈 쳐내고 탄핵 정국에서조차 “태극기 여론이 다수”라고 지껄이는 미친놈 등 놈놈놈들의 퍼레이드다. 대행진이다. 줄줄이 비엔나다. 꼴통들의 태백산맥이다.
영화 속에서 최승호 감독은 말한다.
“언론이 질문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실제로 망했다. 우리는 지난 9년 동안 나라가 망가지는 걸 지켜보았다. MB라는 쥐새끼가 들어와 합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된 KBS 사장을 별의 별 추잡한 허물을 뒤집어씌워 몰아낼 때, 쪼인트 까여 가며 “좌파를 몰아내라”는 특명을 받은 놈이 MBC에 들어와 깽판을 칠 때부터 9년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최승호 감독은 입술 질끈 깨물어 가며 말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참 공영방송 PD와 기자들은 점잖구나, 그리고 인내력이 출중하구나. 내가 그 입장에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시공간에 있었다면 욕설부터 날렸을 것 같다. 아니면 그 빌어먹을 언론파괴 공범자들이 먼저 흥분해서 펄떡펄떡 뛰게끔 조롱하고 찔러 대고 간질였을 것 같다.
그런데 끝까지 존댓말이더라. “쪽팔린 줄 알아라 똥개새끼들아.”라고 하지 않고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더라고. 뭐 “물러가라” 반말은 하지만, “김장겸은 물러가라”지 “개새끼는 개집가라”가 아니더라고.
으리으리한 행사에서 그 후배들을 자르고 짓밟았던 놈들이 버젓한 명함 내세우고 웃고 즐기는 걸 보면서 최승호 감독은 말한다.
“잘들 산다. 잘들 살아.”
말이 말 같지 않고 말이 안 되게 말을 틀어막았던 9년 동안, 제대로 말하기 위해 싸우고 징계 받고 잘려나갔던 사람들이 스쳐가서였을까 그 말에는 날이 서 있다. 그런데 정말로 화가 나는 건, 지금도 방송은 그 공범자들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이라 일컫는 KBS와 MBC 사장은 지금도 그 공범자들의 계보에 들어 있고 그를 포기할 의사조차 없다. 공범자들은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고, 언론사를 운영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도 그러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이명박 정권처럼 치사하고 비열하게 정연주 사장 내몰듯 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으로 배짱을 퉁기며, 혹여 끌려 나가면 “보수의 아이콘”으로 출마하여 금배지 달 계산을 하고 있다.
영화 보면서 가장 화가 난 대목이다. 어떻게 저들은 자신들이 해온 악을 위하여 저리도 선의를 이용하고 왜곡하는가. 결국 모두를 자신과 똑같은 이들로 만들어 “피장파장 아닌가?” 하며 느물거리고 싶어 하는가.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다. 점심시간에 MBC 앞에 가서 김민식 PD처럼 페이스북 라이브로 “김장겸은 집에 가라.”고 외쳐대고 싶다. 머리카락에서 타는 냄새 날 만큼 열 받은 적도 오랜만인 것 같다. 그래서 두서가 없다. 나름 삐딱하고 괜히 시니컬한 구석도 있고 작품의 미덕과 악덕을 따지는 개폼도 가끔은 잡는 편인데 이 영화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하얗게 불타 버린다.
보시라. 이 영화를 보시라. 이미 10만 명을 돌파했다. 감독이 그러더라.
“100만 명이 되면 여론이 바뀔 수 있고, 저들은 여론을 가장 두려워한다.”
대통령도 바꿨는데 방송은 그대로다. 아무렴 대통령 바꾸는 것보다는 언론범죄자들 끌어내리는 게 쉽지 않을까. 일단 이 영화를 보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산하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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