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악마의 배설물, 그리고 엘 카라카소 (El Caracazo)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대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이 풍부한 국가가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으면 번성하기 마련이다.
1974년부터 79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 1922년 10월 27
일~2010년 12월 25일)는 재임 기간 내내 “우리가 세계를 바꿀 것이다!”라는 말을 했고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이
말을 실제로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번의 석유파동으로 석유값이 폭등해버렸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 산유국들이 일제히 석유감산에 들어가면서 가격을 인상해 버렸다. 배럴당
2.9달러 수준이었던 원유값은 몇 달 뒤인 1974년 1월엔 11.6달러까지 뛰었다. 이게 1차 석유파동이었다. 1978년 12월엔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지도하는 이슬람혁명이 일어나 친미적이었던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배럴당 13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원유값은 30달러를 돌파했다. 이 돈의 가치, 잘 안 와 닿을 것 같다. 요즘의 달러값으로 환산하면 이런 표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요즘 가치로 치면 1차 석유파동 즈음엔 배럴당 20불에서 42불로 뛰어올랐고, 계속 올라가다 2차 석유
파동엔 119.33불까지 뛰었던 것이다. 자동차가 보편화된 지 오래인 서구 유럽에선 몇 배씩 올라서 제한적으로 공급되는 휘발유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고,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이 막 성과를 얻던 참인 우리나라는 이 즈음에 국가 빚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97년 외환위기 수준의 경제적 타격을 받아 대한민국 경제성장이 마이너스가 되었던 시기기도 했다.
1차 석유 파동 당시의 영국 주유소. 석유 공급을 줄여버렸으니 줄을 서야 몇 배 오른 휘발유를 살 수 있었다.
전 세계가 올라 버린 원유 때문에 난리가 났을 때, 산유국들은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했다. 카를로스 대통령은
1976년에 베네수엘라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 유정과 정유회사 몇 개를 국가가 산 것이 아니라 아예 산업 자체를 국유화했던 것이다. 이는 공공부분 지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유가 되었고 국유화 하는 과정에서 대외채무도 증가했다.
그러나 계속될 것 같은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79년 12월, 지금의 환산가치로 119.33불까지 뛰었던 유가는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고 1986년엔 30불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자국 화폐인 볼리바르화의 평가절하로 맞서보려고 했지만 처절하게 실패하고 베네수엘라 국민의 생활수준은 극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1989년,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10년만에 다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 앞에 놓여 있던 것은 대외채무를 갚을 수도 없었던 경제를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는 IMF로부터 긴급차관을 받으면서 IMF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들을 들어준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했고, 경제규제를 철폐하는 등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런 전환으로 인한 고통은 베네수엘라 서민들이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야 했다.
산유국에서 휘발유와 디젤유 가격이 100%씩 폭등해 버렸다. 그 결과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비는 30% 이상 올랐다. 분노한 카라카스의 시민들은 1989년 2월 27일 봉기했고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군을 투입해
9일만에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공식적으론 287명, 비공식적으론 2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 시위를 카라카소라고 부른다. 이 일은 2005년에 영화화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10년의 텀을 둔 두 번의 집권기간 완전히 반대인 정책을 펼쳤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푼토피호
체제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당인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 소속의 대통령이었다.
6. 까우디요 (Caudillo)
까우디요는 라틴어의 capitellum에서 유래한 고대 스페인어로 우두머리, 쫌 더 특별하게 리더의 출세를 위해 헌신하는 부대원들을 거느린 군대의 대장을 지칭한다. 일부에선 단순하게 독재자 혹은 실력자 등이라고 정의하기도
하는데, 사실 정확하게 정의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합법적으로 집권했던 인민정권을 무너트리고 40년간 독재를 펼치다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코 프랑코(정식 이름은 무진장 길다.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이 바아몬데 살가도 파르도 데 안드
라데,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Salgado Pardo de Andrade,
1892년 12월 4일~1975년 11월 20일)는 자신이 까우디요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다.
심지어 자기 집권기간 중엔 돈에 자기 얼굴을 집어넣고 “Caudillo de España, por la Gracia de Dios(신의 가
호로 에스파냐의 까우디요)라고 새겨놓기도 했다.
이게 아마 두 번째로 만들었던 것일 게다. 어렸을 적 스페인에서 살았던 몇 안되는 기념품이다.
독재자들도 자신들이 독재자라고 호명되는 것을 싫어한다. 프랑코가 자신을 까우디요라고 불리길 바랬던 것은 멋진 이들이 실제로 많았기 때문이다. 18~19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던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운동가들은 하나같이 까우디요였다.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Gervasio Artigas 1778년 2월 25일 ~ 1850년 8월 17일)은 아르헨티나의 장군이며 페루의 정치가로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멕시코의 황제 자리에 올랐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 9월 27일 ~ 1824년 7월 19일) 역시 멕시코의 정치가이자 멕시코 독립전쟁의 지도자였다. 멕시코 독립 운동 초기 지도자이며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Miguel Hidalgo y Costilla, 1753년 5월 8일 ~ 1811년 7월 30일)도 까우디요였다. 안토니
오 호세 데 수크레 이 알칼라(Antonio José de Sucre y Alcalá, 1795년 2월 3일 ~ 1830년 6월 4일)는 베네수
엘라 독립운동 지도자이며 1821년 26살의 나이에 별을 달았던 군인이다.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 호세 프란시스코 데 산마르틴 마토라스(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 Matorras, 1778년 2월
25일 ~ 1850년 8월 17일)도 군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몬 볼리바르도 대표적인 까우디요다. 본명이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
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란코(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1830년 12월 17일)인 시몬 볼리바르는 앞선 호세 산 마르틴과 함께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로 독립시키고 그란 콜롬비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가 미국처럼 연방제 국가로 전환하는 것을 꿈꿨다.
Gran Colombia, 즉 큰 콜롬비아는 오늘날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페루, 브라질, 가이아나 영토의 일부를 포괄하는 국경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독립하길 원했던 분리주의자들과 중남미에 자신만큼 강력한 단일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미국의 개입으로 시몬 볼리바르의 사망 이후 그란 콜롬비아는 개별 국가들로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시몬 볼리바르는 '위대한 이상을 가졌던 인물'로 아직도 남미에서 추앙 받는다. 즉, 까우디요는 남미에서 단순한 군사 독재자가 아니라 결단력 있고 혁신적이며 비전이 있는 군 출신의 정치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이야기다. 남미를 지배했던 제국의 군부 독재자가 그 이미지를 가져다 쓰고 싶었을 만큼.
7. 푼토피호 체제의 붕괴
푼토피호 체제는 군부와 민간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전형적인 남미식 후진 정치 상황을 막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정치 신인의 등장을 막는 역할도 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체제는 경쟁력 없는 정치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경쟁력이 없는 이들이 계속 집권하려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 뭔가 흘러야 그 자리가 유지가 되기 마련 아닌가. 정치에 대한 효능감이 이렇게 떨어지면 투표율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90%대에 달하던 투표율은 1973년 96%를 찍은 이후 계속 떨어져 1990년대엔 60%대로 떨어졌다.
그리고 84년부터 떨어진 유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심했고 빈곤층의 처지는 나아지기는 커녕
빈곤층이 계속 증가했다. 심지어 1990년 말에는 전체 인구의 60%가 빈곤층이 되었다.
카라카소 사건을 일으켰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카라카소 사건 4년 뒤, 1993년 1,700만 달러가
넘는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개혁파라면 IMF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사회 안전망을 갖출 방법들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그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금 횡령까지 했던 것이다.
먹고사니즘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는 안정적일 수 없는 법. 국민들이 푼토피호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라파엘 카레라(Rafael Antonio Caldera Rodríguez 1916년 1월 24일~ 2009년 12월 24일)가 1993년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덜커덕 대통령에 당선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툰토피호 체제의 일원이었던 'COPEI'의 대표였고 1969년 3월 11일부터 1974년 3월 12일까지 제56대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이였다.
그리고 이 일 바로 전 해인 1992년 2월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쿠테타 수괴를 포함한 지도부가 모두 감옥에 간다. 실패한 쿠테타의 수괴는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ávez Frías, 1954년 7월
28일 ~ 2013년 3월 5일)라는 이름의 젊은 대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