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최근 영어를 쉽게 배울 수 있게 해 준다는 한 기사 댓글에 난리가 났다(관련 기사: 영어를 그려주마 1. 영어 어순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때아닌 영어 교육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 보고 있던 입장에서 이 떡밥을 놓칠 수 없어 나도 한 숟갈 얹어 보고자 한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80-9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의 제도권 영어 교육만을 받고 자랐다. 성문 기본 및 종합 영어는 나의 훌륭한 영어 길잡이였다. 운 좋게도 그 교육을 잘 흡수해 인생에 영어가 걸림돌이 되어본 적은 없다. 학교 영어 시험이건 토플이건 토익이건 IELTS건 그 어떤 영어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지 않은 시험의 숫자가 그렇지 못한 시험의 숫자보다 많았다.

 

download.png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받는 책?

 

외국에 직장을 잡은 지 꽤 되었는데, 영어에 큰 어려움이 없던 덕분에 외국 생활을 잘 하고 있다. 오래 지내다 보니 비영어권 국가들도 여러 곳 옮겨 다니며 산 관계로, 회화가 가능한 언어는 5가지 정도, 읽고 해석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대략 7-8개 정도 되었다.


여러 언어를 공부하다보니 영어에서 너무 당연해 궁금해하지조차도 않는 궁금증들, 예를 들면 go는 '고'라고 읽으면서 to는 왜 '투'라고 읽는가.. shoe는 어쩌다 'shu' 소리를 가지게 되었는가 같은 기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체험 비교 언어학이랄까. 개인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즐거움이었고, 지금도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제각각의 인간들이 공통의 언어인 영어로 대화하는 환경에서 일한 지 꽤 되다 보니, 외국인이 한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려 노력하는 과정도 매우 면밀히 목격할 수 있었고, 자녀들이 멀티 링규얼(바이 링규얼이 아니라 '멀티'다. 3개 이상..)이 되어 가는 과정도 지켜봤다.


BYWtRXJCMAEsq2b.jpg

이렇게 뜯어서 볼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본의 아니게 잘난 척을 한 것 같아 죄송하지만, 외국어 교육 방법에 대해서 나도 작은 목소리 하나 낼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백그라운드를 설명하기 위해 좀 길게 써봤다.


영어 공부 논쟁은,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말을 하면 어순과 문법을 쉽게 알 수 있다는 저자와, 문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그룹으로 나뉜 것 같다. 우선, 이 논쟁은 대전제인 '영어를 잘하는 것'에 대한 정의가 빠져있다. 즉, 영어를 공부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가 서로 다른 상태에서 논쟁을 시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은 대략 다음 정도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외국인을 만나서 일상적인 대화를 무리 없이 나누는 목적. 미드나 영화를 원어로 감상하는 수준도 여기에 들어가겠다.

2. 외국의 신문이나 사설, 논문과 같은 심도 있는 글을 문제없이 읽는 목적

3. 계약서나 논설문, 혹은 논문을 스스로의 언어로 작성해 내며 그 언어로 논쟁을 하는 목적

4. (이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목적인데) 취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영어 시험 고득점 목적

 

2016-03-18_15;07;00.png

 

회사 가서 영어 쓸 일 하나 없는 사람들도 죄다 영어 공부 중이다. 

이게 웬 국가적 낭비란 말인가.

영어가 개개인의 줄 세우기용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

 

만약 본인이 영어 공부를 하는 목적이 1번이라면, 문법은 정말 필요 없다. 많이 듣고 많이 말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수준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문 기본/종합 영어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의(라 쓰고 일본 문법책을 베껴온) 전통적인 영어 교육 방식은 틀려먹어도 한참 틀려먹었다. 기사의 댓글에서 문법 교육의 불필요성을 부르짖으시는 분들의 목적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국 문화원을 비롯하여 일반인의 영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교수법은 이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 보니 문법은 다루지 않고 오로지 소리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2번 목적을 지니고 있다면, 듣고 말하기는 사실 필요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소위 말하는 생활 영어 강습 같은 것은 다 무의미하다. 사전 찾아가면서 밑줄 쳐 가면서 공부하는 게 최고다. 이런 목적에 최적화가 되어 있는 영어 교육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이 일본 교육법을 그대로 가지고 오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런 목적으로 공부해 놓고서 외국인 만났을 때 말이 안나온다고 불평하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1988년이 돼서야 비로소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고립된 국가였음을 잊지 말자. 역사적으로 평범한 한 한국인이 외국인을 실제로 만날 가능성은 정말 희박한 상황을 수천 년간 살아온 나라다. 그런 환경에서의 영어 교육의 목적은 외국의 고급 문헌를 우리 말로 바꾸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새롭고 다양한 교수법이 들어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3번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문법은 필수다. 5형식이 어쩌네 저쩌네를 따지는 게 아니라, 내가 쓴 문장이 그 언어에서 약속된 규칙, 즉, 문법에 맞는지 틀리는지를 즉각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은 필수다.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별도의 맹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 있지 않는 한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거다.

 

4번 목적은 워낙 독특해서 따로 다루지는 않겠다. 

 

위 세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면, 그제서야 한 언어를 마스터했다라고 이야기할 만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 중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인즉슨, 사람들마다 자신의 필요에 맞는 교수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한번은 다국적으로 구성된 동료들과 그룹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멤버는 나를 포함하여 헝가리인, 네덜란드인, 인도인,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native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한 반면, 이 중국인 동료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아니고,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영어로 표현하는 속도가 다른 동료들보다 조금 느린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친구가 써내는 영어 문장들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명문들이었는데, 마치 그 표현력이나 문장의 구성력이 영어 성경책에 나오는 문장들 수준이었다.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음은 물론이고.

 

결국 프로젝트 리포트는 이 중국 친구의 문장으로 작성했으며, 지금까지도 길이길이 회자되는 리포트로 남았다. 그 누구도 이 중국 친구를 영어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즉, 영어를 더듬는다고 해서 영어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한때 한국 영어 교육의 최고 성공작이라 꼽히던 반기문의 영어가 미국 사람처럼 유창해서 그런 평가를 받은 게 아니다. 반기문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그의 영어 실력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여 태어난 사람들보다 좋았으면 좋았지 못하지 않다.

 

반기문-UN-사무총장5.jpg

반기문 연설을 들려준 후 한국인과 외국인이 보인 반응

한국인이 생각하는 "잘 하는 영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전설의 짤

(영상은 이곳에서)

 

문법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영어를 십 년을 배워도 외국인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교육이 쓰레기다, 이다. 외국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거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하는 의사소통의 방식은 당연하게도 말하기와 듣기이다. 이 두 가지가 안 되니 영어 헛배웠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문법에 투자할 시간에 차라리 일상 대화를 익혀 나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이다는 주장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문법이 없이 진행되는 영어는 그 한계가 있다. 한국 과학자들이 해외 저널에 내는 수많은 영어 논문들, 다 비싼 돈 주고 영어권 감수자의 감수를 받고 나간다. 문법이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법 없이도 영어를 마스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말로 쓰여진 신문 기사를 보다가도 주술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문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글을 보면 인상 찡그려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

 

ESL_Dissertation_Editing_After_image.png

아무리 노력해서 썼어도 문법 백그라운드가 없는 글은

감수자 손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이렇게 걸레가 된다. 

출처 - <Scribendi>

 

참고로, 외국에서 영어 문법을 별도로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걔네들 문법과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 중에서 가장 단순한 언어라 특별히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토플 점수가 영국인보다 높기로 유명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는 건 그네들의 언어와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단순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냥 TV를 영어로 보면서도 배워지는 언어다. 전혀 다른 어족인 한국어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도 이상적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외국인이 한국말 배울 때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한국어 문법과 철자다. 생각해보자. 우리도 국민 학교 때 받아쓰기랑 문법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나. 그 개고생을 외국인들도 지금 다 하고 있다. 외국인 교포 2세로 자라나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직접 볼펜 잡고 한글로 본인의 문장을 써 나가는 상황이다.


본인이 외국인 만나서 말 한마디라도 터 볼 생각으로 회화 위주의 공부를 하는 것은 훌륭한 선택이나,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문법 없는 영어 교육을 받게 하지는 말자. 걔네들이 나중에 세계 어디에서 어떤 정도의 영어를 구사하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는데 말이다.

 

요약하자면, 본인이 어느 정도의 영어를 원하는지를 미리 판단하고 그에 맞는 교수법을 택하시라는 거다. 사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느 교수법을 택하더라도 영어를 까먹는 교수법은 없다. 영어 교육이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연구가 진행된 분야이다 보니 다 나름의 효과가 있다. 빨리 가고 늦게 가고의 차이이지, 다른 버스가 내 버스보다 좀 늦게 간다고 그 버스 운전사를 욕할 필요는 없는 거다.






*편집부 주


때아닌 영어 논쟁 기사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반론을 환영합니다.



영어를 그려주마 1 : 영어 어순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영어마비 재활프로젝트 - 듣기, 읽기, 말하기(초급자용)






CZT


편집: 딴지일보 cocoa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