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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시선]연결

2017-08-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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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작은 포유류에게 유독 애정을 갖고 있다. 키우던 고양이가 죽고 마을 길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준지 일 년이 되어간다. 고양이가 생존할 수 있는 개체수가 한정 되어 있는지 먹이를 먹는 고양이는 바뀌어도 수는 여섯을 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고양이는 밀려나거나 죽었을 확률이 높다.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먹이를 얻으러 온 어미고양이게는 더욱 마음을 쓴다. 그녀의 본 성품이겠거니 하면서도 지난 시절 자신의 아이에게 온전히 전하지 못한 모성의 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펌프카 주차장에서 키우는 새끼 난 개에게 미역국과 북어를 삶아주는 모습을 보며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몸을 축내며 새끼를 키우는 동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고양이의 생존율은 낮다. 새끼가 성체로 자라기는 힘들다. 병으로 죽기도 하지만 차에 깔려죽는 일이 많다. 새끼를 잃은 어미고양이는 죽음을 명확하게는 인지하지 못한다. 차에 깔려 하체가 으스러진 새끼의 시신을 떠나지도 못한다. 새끼의 사체를 치울 때 울음소리에서 당혹과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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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도시 외곽이다. 주차료를 아끼려던 대형 화물차나 막히는 출근길 샛길로 달리는 자가용이 많다. 단지 먹고 살려는 사람들의 애씀이 유발한 의도하지 않은 살생이다.


첫 새끼를 낳은 어미는 대부분 실패한다. 차에 치인 새끼 고양이의 시신을 몇 번 치우면서 아내는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안타까워 하는 건 여전하지만 처음만큼 오래 슬퍼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다들 언젠가는 죽는다는 건 알지만 막연하게 낙관적으로 산다. 삶의 주기가 짧은 작은 것들에게 애정을 주면서 언젠가 우리도 죽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같다.


길에 사는 건 고양이만이 아니다. 버려진 개들도 가끔씩 마을을 거쳐 간다. 낡은 목줄에 피부병이 생긴 작은 강아지가 고양이에게 준 밥을 먹고 있었다. 사람 손길이 그리운 강아지는 동네 아이들을 따라다녔다. 아직 순수한 아이들은 녹이 슬고 올이 헤진 목줄을 끌렀다. 목줄을 채우고 버린 전 주인과의 연은 그렇게 끝났다. 강아지는 간혹 안 보일 때도 있었지만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집사람에게 먹이를 얻어먹었다.


또 안쓰러운 마음에 집에서 키우자는 말을 한다. 나는 그녀의 선의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 브레이크가 된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살지 않는 이상 동물들과의 동거는 서로에게 해가 되는 일이다. 감당하지 못하는 선의는 악의보다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개를 버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애견인이다. 애견인이 아닌 사람들은 개를 키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버릴 일도 적다.


이미 키우는 개가 노견이다.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지만 다시 죽음이 찾아올 때 그녀의 성품상 그냥 보낼 리가 없다. 감안하고 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장인어른의 탈장수술을 해야 한다. 다시 동물 한 마리를 들이는 건 벅찬 일이다. 감성적인 그녀에게 원망의 눈길을 받는 게 불편하지만 이성적이어야 한다.


어느 날 강아지가 집 앞 시설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 안에 묶여 있었다. 사람을 가리고 경계하는 아내가 유독 용감해지는 순간이 왔다. 개를 혹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 아닌지 하우스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보러 간다. 70이 넘은 농부는 살아온 세월이 손과 얼굴의 굵은 주름에 고스란히 보였다. 인연이 닿아서 찾아왔으니 거두기로 했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전하는 아내의 얼굴이 환했다.


종종 아내는 개에게 간식을 챙겨주었다. 고된 농사일에 까맣게 탄 농부를 보며 장인생각이 난 듯 했다. 찾아와 주는 사람이 반가운지 아저씨는 농작물을 자꾸 주려한다. 돈을 주고 필요한 것만 사기로 했다. 토마토와 오이를 샀다. 덤을 조금 더 주는 건 고맙게 받는데 그냥 주는 건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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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동이 많아서 농사가 벅차보였다. 도시 근교농업이라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이다. 상추나 시금치 얼갈이 오이나 토마토를 돌려짓는 하우스가 열 동이 넘었다. 겨울에는 잠시 농사를 쉬는 것 같지만 항시 일하는 할머니들이 보였던 것 같다. 요즘은 하우스에 일하는 할머니가 없다. 돌아가시거나 몸이 안 좋아 일을 못하신다고 한다.


하우스 끄트머리에 있는 컨테이너에 사는 사람이 생겼다. 베트남 부부다. 쉬운 한국말과 몸짓으로 소통을 한다. 힘든 일을 하며 개를 잘 돌보아주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아내는 가끔 마트에서 산 음식을 가져다 줬다. 컨테이너가 눅눅한지 해가 쨍쨍한 날에는 다리 난간에 이불을 널었다. 오가다 남자와 마주치면 가벼운 눈인사를 나눴다.


농부는 베트남 부부에게 합산 9만원의 일당을 쳐 준다. 270만원이 두 사람 월급이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하면 8시간 근무에 5만2천원이 맞는데 숙식제공으로 공제 할 수 있는 몫이 있다. 농업 부분은 근무시간과 휴게시간에 예외조항이 있다. 남자는 손이 느리고 여자가 바지런해서 두 사람 몫을 한단다. 시월까지 계약이란다.


토마토와 오이가 한 참 바쁠 무렵 베트남 부부가 사라졌다. 한여름 비닐하우스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은 베트남 사람에게도 힘겨운 노동이다. 일손이 바빠지는 계절이 오니 이익이 맞는 곳으로 떴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정보를 교환하는 커뮤니티가 있다.


농부는 주말마다 지인과 친척들을 불러 도움을 받았다. 아내는 보기가 안쓰러운지 휴일에 일을 돕자는 말을 한다. 인연을 맺으면 안 보이던 게 보이기도 한다. 생산물을 사주는 건 좋은데 겨우 그 돈을 받고 일하는 건 반대라고 말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하우스에 일을 하는 할머니들이 있었다. 상추를 따고 얼갈이를 수확하고 시금치를 솎아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일당이 삼 만원이었다. 안산, 안양, 수원, 화성의 시설농가들에서 담합을 했다.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암묵적인 담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근에 있는 작은 공장 단지에서는 사장들이 한 달에 한번 저녁식사를 하며 친목을 다진다. 그 와중에 서로 유용한 정보를 나눈다. 가령 5인 이하 사업장에서는 최저임금만 주면 주 6일 근무를 시켜도 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던가 혹은 미사용 연차를 돈으로 주지 않고 소멸시키는 것 같은 정보를 교환한다. 직업윤리는 내부고발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업자 정신은 다르다. 사장들의 친목이 단단해 질수록 직원들의 공장생활도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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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물 안에서 한 사장이 5명 이하로 쪼개진 조립 팀을 각각 다른 회사로 운영한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관리자의 지시를 받고 같은 사람에게 월급을 받지만 월급이 찍히는 회사의 이름이 다르다. 대기업에서 사내하청을 운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용케 법을 빠져 나가는 게 방충망을 뚫고 들어오는 초파리 같다.


자본주의 경제 피라미드의 좀 더 상층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전경련은 어버이연합에 돈을 주고 친정부 시위를 지원했다. 그 보답인지 김기춘 비서실장이 최저임금을 적정한 선으로 지정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정위원이 각 9명씩 27명이 참가한다. 위원회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가이드라인으로 정해준 금액으로 결정되었다.


이해는 간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위원들은 최저임금이 절실하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민주노총이 한국노총보다 강경한 목소리를 내긴 하지만 핵심구성원들은 대부분 최저임금에 해당사항이 없다. 너무 냉소적인 시각이다. 적어도 약자를 위해 자신보다 강자에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그리 사는 사람도 드물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경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동네 마트에서 바나나 한 송이에 삼천원을 한다. 도매상과 유통마진을 30% 예상하고, 운송비를 제하고 컨테이너 물류비를 생각해 원산지에서의 단가를 어림잡는다. 국제 무역을 하는 농장주가 농장 작업자들에게 주는 임금을 추측하다 보면 토지를 주고 임대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서열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식한다. 동등하거나 높다고 생각해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나온다. 그것은 약한 것에 마음을 쓰는 공감 능력만큼 본성이다.


손이 부족해도 농부는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노란 방울토마토 한 동이 수확하지 못하고 말라갔다. 말라가는 농작물이 계속 눈에 밟혔다. 가격이 맞으면 조금 비싸더라도 사람을 사서 수확을 할 텐데 끝내 수확하지 않고 지난 주말 베어버렸다.


마을에 노인들이 없는 건 아니다. 노인정에서 날마다 모이는 할머니들은 소일 삼아 부업을 하기도 한다. 마늘을 까기도 하고 고무 사출 제품의 모서리를 다듬는다. 노인정이 비닐하우스와 십 미터가 되지 않는다. 일을 하기 싫어하는 분들도 아니고 돈을 풍족하게 갖고 사는 분들도 아니다. 그래도 절박하지 않은 이상 타산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게 시장경제에도 맞지 싶었다. 당장 보기에 시들어가는 농작물과 농부의 시름이 불편해도 일하는 사람이 체감하는 노동 강도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임금을 제시하는 토마토는 수확하지 못하는 게 옳다. 비록 언론에서 신선 식품가격이 급등해서 가정경제가 비상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말이다.


김영란 법 때문에 한우농가가 타격을 받는다고 말하는 언론인들이다. 가계부채가 1300조 넘어가는데 농부의 상추와 토마토 가격이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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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