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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을 다큐로 받네.” 하는 말을 향용 듣는다. 실없는 농담을 걸었는데 당황스러울 만큼 진지한 답변이 돌아올 때 그 어색함을 얼버무릴 때다. 용례를 들자면 내가 “오목교 송중기라고 불립니다”라고 소개할 때 상대가 “어머 어울려요. 군복이 어울리실 것 같아.” 라고 되받을 때 꺼내는 말이라고 보면 되겠다. “예능을 다큐로 받으시면... 허허 참”

즉 예능이란 뭔가 웃기는 것, 리얼하고 심각한 설정보다는 마음의 허리띠를 풀고 소파에 드러누워 심리적으로 무장해제 된, 가볍고도 유쾌한 ‘오락물’이다. 그러나 사람을 웃기는 일은 울리는 일보다 백 배 힘들다는 걸 우리는 안다.

더하여 눈물은 누선(淚腺)만 자극하면 되지만 웃음은 근육을 움직이는 일이고,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지나치게 근엄하고 “어디 나를 웃겨 봐.”하면서 냉정의 철갑옷을 입은 사람 투성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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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의 책 <예능, 유혹의 기술>은 외국인들이 보면 지극히 무표정하게 보인다는 한국인들을 웃음의 바다에 풍덩 빠뜨리고, 근엄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데굴데굴 구르게 만들고, 핸드폰 붙잡고 미친 듯 깔깔거리게 하는 예능 프로그램과 그 주인공들과 연출자들을 매우 ‘다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큐적으로’라는 말에 인상을 찡그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진지하긴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연예인 뒷담화이나 연애담은 발견할 수 없으되,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가의 비결과 구조를 리얼하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에 다큐적이라고 한 것이다.

‘예능’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삼국지 해설서를 읽는 듯한 ‘인물론’에 압도되고, 세상을 사는 방식을 깨우치며, 예능계를 주름잡는 이들이 왜 우리 곁에 친근히 뿌리 내렸는지의 경로를 샅샅이 알게 된다. 우리가 가볍고 경쾌하기 위하여 저들이 얼마나 진지했는가를 깨닫는 다큐다.

골프는 모르지만 ‘힘 빼는데 3년 걸린다’고 하지 않는가. 20년 전 만났던 은퇴한 제비도 이런 말을 했다. 여자를 유혹하는 비결은 다음과 같다 했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게,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사람의 웃음보를 쥐락펴락 하고 때로는 웃다가 눈물이 나오는지 감동의 이슬인지 모르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예능계의 고수들의 맨살을 보게 된다.

유재석의 예를 들어 볼까? 실상 유재석은 실패의 순간이 많았다. 이른바 ‘뜬’ 뒤에도 소리없이 접었던 프로그램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동상이몽>에서도 유재석 참 어색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런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유재석이 맛이 갔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이 의구심에 대해 저자 이승한은 명쾌하게 말한다. “유재석이 실패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지켜 봤고, 그가 실패했던 아이템을 폐기하지 않고 잘 보관해 뒀다가 소맷자락에서 다시 꺼내어 성공을 일구는 모습을 자주 봤기” 때문이란다. 아하 그렇구나.

“유재석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가 어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하는 기시감에 사로잡히는 건 흔한 일이다. 유재석이 거둔 성공은 미다스의 손이라기보다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탓에 매번 성공으로 기록된다는 인디언 기우제에 가까운 행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인디언 기우제와 같은 점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겠지만 다른 점은 매번 기우제의 주문은 바꾸었다는 점이겠다. 유재석은 실패를 이용해서 달라질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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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에 따르면 강호동은 또 다른 캐릭터다. 강호동은 이만기를 들어메치고 천하장사 타이틀을 따고서 연예계로 돌아 승승장구하고 후배 연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까지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 언젠가의 (내가 보기엔 많이 억울한) 탈세 문제 제기였다.

강호동은 그 휴지기 후 제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 '자신의 커리어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되돌아 보고 배울만한 실패의 데이터베이스가 없던' 탓이란다. 그런데 강호동에게 동앗줄이 된 프로그램은 <우리 동네 예체능>이었다고 한다. “일반인들과 어울려 노는 포맷, 천하장사에 빛나는 피지컬과 승부욕, 그리고 본인의 ‘오른팔’인 이수근”까지 강호동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포맷이 주어졌고 강호동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 이승한은 연예인 얘기가 끝난 뒤엔 항상 시선을 돌려 독자들을 향한다. 연예인들의 성공과 실패, 그 굽이치고 물결치는 무대의 막전막후를 설명하던 변사(辯士)가 갑자기 관중들에게 말을 걸듯 독자들에게 툭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다.

“강호동이 그랬던 것처럼 과감하게, 잘할 수 있는 일들 위주로 전장을 재구성하고 체력을 비축하라. 그 과정을 통해 확실하게 뿌리 내린 중심을 확보해야, 비로소 제 자신을 정비하든 체질개선을 하든 뭐라도 해 볼 수 있는 여력이 쌓이고 공간이 열린다.” 이쯤 되면 예능의 유혹을 빙자한 교육 다큐가 아닌가 말이다.

밑도 끝도 없는 예화와 저자 자신도 모를 요상한 개념으로 가득한 ‘처세술’이나 ‘조직관리’ 책 100권보다도 이 책이 나은 이유다. 이 책은 우리가 좋든 싫든 수백 번은 흘려 보고 또는 유심히 보며 눈과 귀에 익혔을 ‘예능’을 통해 인생을 가르친다.

나영석 PD의 성공 비결을 들으면서도 무릎을 쳤다. 강호동처럼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은 같다. 그런데 이승한은 이렇게 말한다. “조금 더” 가 아니라 ‘조금 덜’ 즉, 남들이 무언가를 덧붙일 때, ‘조금 더’ 플러스하고자 할 때 자신의 예능에서 곁가지를 쳐내며, 내 기획의 본질만 남기는 ‘뺄셈의 기획’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삼시세끼> 그 얼마나 단순하지만 통뼈같은 기획인가. 거기에 뭘 ‘더’ 넣고자 하면 그 얼마나 뒤룩뒤룩 군살이었을 것인가. 뭔가를 더 잘하려는 욕심보다는 뭔가를 쿨하게 버려 버리는 재능이 바로 그 성공의 비결이었다는 것이다.

94학번이 낳은 최고의 인재라는 MBC 김태호, 우리 시대 최고의 입담가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김제동, 그리고 한국 사람들을 크로아티아 열풍에 휩싸이게 만든 <꽃보다 누나>와 왕년의<미녀들의 수다>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개척했다 할 <비정상회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우리가 웃고 즐기는 예능과 그 주역들의 이면에는 정말로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고민들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작가 이승한은 유려하고도 해박한 ‘연예 정보’를 바탕으로 써 내린다.

특히나 예능 프로그램 꽤나 봤고 그 계보를 대충 꿸 수 있고 ‘무한도전’ 아이템들을 열 개 이상 기억해 내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은 더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자신에게 익숙한 경험, 그 경험의 이면을 발견하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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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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