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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첫 총파업이라 할 1990년 KBS 파업의 기억 그리고 2014년 KBS... 에 2017 MBC를 덧댄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이 본격적으로 ‘디비졌던’ 것은 6월 16일 무렵이었다. 사직야구장의 열광적인 응원으로 이름 높은 부산 사람들의 화끈한 기질은 시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연 사흘 밤샘 시위가 이어졌고 그 격렬함도 점잖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마침내 6월 18일 부산은 세계 언론의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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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쯤, 무려 30만명의 시위대가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도로를 완전히 장악했다. 당시 시위대가 목표로 한 것은 부산 케이비에스(KBS)였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집에 돌아올 때 시위대와 전경의 대치를 여러번 거쳐야 했는데 기자들이 곤욕을 치르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나마 신문사 기자는 나았지만 케이비에스나 엠비시(MBC) 기자는 두드려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떤 대학생들은 촬영하는 방송 카메라 뒤를 떠나지 않고 왈왈왈 개 소리를 내며 조롱했다.

케이비에스는 완전히 포위됐다. 돌과 화염병이 욕설과 함께 케이비에스 담벼락에 쏟아졌고 일대 공방전이 펼쳐진다. 19일 새벽까지 이어진 격전 끝에 경찰이 최후의 수단으로 수백발의 다연발 최루탄(지랄탄이라고 불렀던)을 쏟아 부음으로써 케이비에스는 겨우 지켜졌지만 전두환 대통령으로 하여금 군을 출동시킬 결심을 하게 만들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 후로도 종종 길거리에서 “케이비에스로 가자!”는 시위대의 외침을 여러번 들었거니와 당시 케이비에스는 차고 넘치는 원성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매일 밤 9시만 되면 전두환 대통령이 첫머리에 등장하는 ‘뚜뚜전(두환)’이나 ‘땡전뉴스’가 판을 치고, 대통령의 해외 방문을 보도하는 리포트에서 “겨울을 녹이는 봄바람과 함께 가시더니 가뭄을 어루만지는 봄비로 돌아오십니다”라는 요즘 말로 하면 가히 ‘종북’(從北)에 가까운 개인숭배를 서슴지 않았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1980년대는 방송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과 방송 시간 확대를 통해 티브이(TV)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언론통폐합이 단행된 뒤 티브이 방송은 단 두 곳, 케이비에스와 엠비시뿐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눈총을 받는 것을 제외한다면 케이비에스와 엠비시 기자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았고 칙사 대접이 부럽지 않았다고 했다. 그 호시절과 굴욕기의 묘한 교차기를 보냈던 방송가에도 6월 항쟁은 도둑같이 왔고, 그 뒤 대한민국의 각 분야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 말 엠비시에 이어 88년 케이비에스에도 노동조합이 생겨난 것은 그 한 단면이었다. 케이비에스 노동조합 초대 위원장 고희일은 케이비에스 노보 창간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방송은 전파라는 전국민 소유의 공공재를 이용한 기업으로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KBS는 특정 정치권력의 대변인으로서 여론조작의 하수인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편파·왜곡보도에 대한 국민들의 지탄이 ‘시청료 거부운동’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KBS는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찬란한 영광의 역사를 첫 장부터 다시 써야 합니다.”

저 다짐이 현실화 되는 데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비록 공화국의 숫자는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바뀌었을지언정 그 정권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5공화국 내내 땡전뉴스의 예의 바름(?)과 보도지침의 편리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 아니었겠는가. 그들에게 케이비에스의 반항은 상상과 용납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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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광주는 말한다> 같은 프로그램이 케이비에스를 통해 만들어지고 전파를 탔을 때 여당의 박희태 대변인(후일 국회의장이 되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정서를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믿고 사랑하던 케이비에스’가 그런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 있는지 실망스럽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던’에 다시 한 번 밑줄 쫙이다. 방송사 내부의 진통도 상당했다. 보도본부장이 “프로그램 내용의 일부 삭제 없이 방송될 경우 한국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지며 군(軍)을 자극하여 또 다른 사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식의 협박 같은 우려(자기가 보도본부장이지 합참본부장인가)를 하며 사표를 제출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후일담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광주는 말한다>가 방송되던 때, 행여라도 누군가 들이닥쳐 테이프를 빼지 않을까 하여 기자들과 피디들이 주조정실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했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이런 케이비에스는 케이비에스가 아니었다. 천하 없는 사태가 벌어져도 대통령 동정만큼은 9시 뉴스 앞에 내거는 게 상식이었던 케이비에스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런 진통 속에 1990년대가 밝아 왔다. 그리고 1990년에 들어서자마자 정부는 본격적으로 케이비에스를 손보기 시작했다.

못마땅한 변화의 정점에 사장 서영훈이 있다고 생각한 정부는 서 사장 몰아내기에 힘을 기울인다. 회사 직원들에 대한 수당 지급에 예산을 변칙적으로 사용했다는,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 혐의를 걸어 서영훈 사장을 낙마시킨 것이다. 그 뒤 정부가 택한 인사는 서울신문 사장 출신의 서기원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 통반장 집에는 어김없이 ‘서울신문’이 공짜로 들어왔다. 정부의 시책을 가장 잘 납득하고 이해하며 미진한 점이 있으면 앞장서서 설명하고 대변했던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케이비에스 노조는 “서기원만은 안 된다”는 입장이 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서기원”이어야 하는 정부와 충돌했다. 4월 6일 이미 “관제 사장 저지대”가 결성되어 서기원 사장의 출입을 막았고, 서 사장 역시 대단한 뚝심을 발휘하여 출근 투쟁(?)을 전개한다. 4월 12일 서기원 사장은 노조원의 눈을 피해 사장실에 들어간 뒤 사장실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봉쇄하고 엘리베이터 작동마저 중단시켰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노조원들은 셔터를 뜯어내고 사장실로 통하는 복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서기원 사장은 112 다이얼을 돌렸고, 공영방송 케이비에스의 그 우람한 경내에 공권력이 들이닥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이에 저항하던 117명의 노조원이 그들의 일터에서 체포되어 유치장으로 옮겨진다. 그들이 끌려간 뒤 서기원 사장은 취임식을 강행했다.

그날 오후 4시, 교양국과 기획제작국에서 봉화가 올랐다. “전면 제작 거부!” 그리고 이 불길은 직종별 사무실로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다음날인 4월 13일 전국의 케이비에스 지역국 사원들까지 상경하여 8도 사투리가 로비에 그득한 가운데 케이비에스 비상사원총회가 열린다. 케이비에스 전체가 뒤집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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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말려야 할 실장, 국장급들까지도 동참하는가 하면, 방송 송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력이 일손을 놓았다. 조연출 시절에 모시던 케이비에스 출신 선배에 따르면 “경비부터 부장까지” 격노했다고 한다. 그분은 이렇게 표현했다. “민중봉기였지 민중봉기.”

심지어 탤런트들도 ‘KBS 탤런트 일동’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에서 이렇게 노호한다. “관제 사장 서기원의 공권력을 빌린 만행에 분노를 표한다. 비록 사원의 신분이 아니라 직접 참여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여러분과 같이 있다.”

마침내 정규방송이 불방되기 시작했다. <보도본부 24시>도 <사랑방 중계>도 방송되지 못했다. 인기 드라마도 전파를 타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방송이 펑크가 나고, 시청자들은 ‘볼 권리’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료 거부 운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청료 거부는커녕 인삼즙을 싸 들고 온 시장 상인들, 우유 몇 갑을 보내며 힘내라고 응원하는 주부 등 시민들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고, 그 가운데에는 시청료 거부 운동을 주도하던 여성단체 대표단도 끼어 있었다.

노동조합에는 수백 통의 격려 전화가 쏟아졌는데, 그 가운데는 방송 초유의 케이비에스 파업에 들뜬 나의 전화도 있었다. 그런데 내 격려 전화는 케이비에스 노동자에게 다소 실례였을 터이다. “파업 지지합니다!”라고 한 다음에 “요즘 방송 너무 재미있어요!” 하는 요령부득의 멘트를 내뱉어 버린 것이다.

사연인즉슨 정규방송이 불방되면서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오래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수시로 재방송됐는데 영화 전문 케이블티브이 따위는 흔적도 없었던 시절,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를 통해서나 영화의 지평을 넓힐 뿐이었던 ‘명화극장 키드’인 나에게 그 파업 기간은 실로 환호작약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미욱한 대학생의 엉뚱한 인사에 “네?”라고 황망하게 되묻던 이름 모를 노조원에게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게 범국민적인 지지를 불러일으켰던 당시의 분위기를 가장 잘 전달하는 사연 가운데 하나로 하종강 현 성공회대 노동대학원장의 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노동 상담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찾아온다. 하종강 원장은 당시를 이렇게 말한다.

“불법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집단 해고를 당했다고 했다. 이른바 ‘집단 월차휴가 내기’라고 불리는 ‘준법투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이나 들었지만 불법 파업을 한 원인을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뒤 오랫동안 꽤 여러번 그 노동자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좀처럼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어느 날 기다리다 못한 내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그쳤다. ‘왜 파업을 결의했어요? 솔직히 좀 말해 봐요."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눈짓만 주고받고 쿡쿡거리며 웃을 뿐 속 시원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 노동자가 참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울산 지역하고 케이비에스에 공권력을 투입했잖아요. 그거 모르세요? 왜 우리가 우리 회사 문제만 갖고 파업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케이비에스의 파업은 스물 안팎의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걸고 집단 월차를 낸 이유가 됐던 것이다. 자신들보다 두세 배의 월급은 족히 받았을 방송사 직원들임을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들에게 투입되는 공권력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방송사 직원들이 파업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욱더 공감했기에 그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너 잘리고 싶어?”의 협박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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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반이 더 변할 시간에 이르러 1990년의 케이비에스 ‘민중봉기’를 돌아보매 “그때는 그랬지”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격세지감의 뜻을 음미해야 마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격세지감은커녕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기시감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다. 서기원 사장 앞에서 일치단결하여 관제 사장 물러가라를 부르짖으며 실장과 국장들까지 나서서 사원들을 지지하던 모습은 사장의 이름만 바뀐 채 다시 여의도 케이비에스 마당을 달구고 있다. “우리는 기레기였습니다”라고 울먹이는 21세기 기자의 모습은 ‘기레기’라는 신조어만 제외하면 “특정 정치권력의 대변인으로서 여론조작의 하수인 역할”을 했노라 가슴을 치던 당시 케이비에스 노조 위원장의 탄식과 다를 것이 없다.

노조가 맞서고자 하는 사장의 뚝심 또한 쌍둥이 같고 불법 파업이라는 으름장 또한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글자 몇 개 수정하는 수고로움 없이 빼닮았다. 상기된 목소리로 “파업 지지합니다!” 격려 전화를 했다가 “요즘 방송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헛발질을 했던 대학생은 24년 뒤 냉면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케이비에스 선배에게 “파업 잘하슈. 파이팅! 근데 냉면은 형이 사!”를 외쳐 주었다. 뭐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가.

그러나 역사는 때로 재연되지만 반복되지는 않는다. 1990년 케이비에스의 ‘민중봉기’ 때에는 대부분의 방송이 파행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외주제작의 비율이 높고 당시에는 별로 존재하지 않았을 단어 ‘비정규직’들이 방송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방송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도 케이비에스 방송을 만들고 있고 차질을 빚는 부분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 케이비에스에 공권력이 투입됐다고 하여 자기들의 밥줄을 끊을 수 있는 일에 동참한 야무진 여성 노동자들도 더 이상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24년의 세월 동안 보여온 부침 때문일까, “달라지겠습니다”라는 선언은 24년 전처럼 열화와 같은 호응에 휩싸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 ‘변화’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케이비에스 구성원에게 있고 그 변화에 대한 대응은 그들의 숙제로 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날 진행되는 케이비에스의 파업에 방송인으로서 지지를 보낸다. 그 지지의 이유는 무엇보다 1990년의 4월 케이비에스 ‘민중봉기’에 있다. 그것은 시위 현장에서 돌을 맞고 침을 맞으며 굴욕감에 몸을 떨었던 ‘언론’ 종사자들의 폭발적인 저항이었고, 더 이상 ‘오늘’ 전두환 대통령과 ‘한편’ 이순자 여사를 모든 뉴스의 앞머리에 놓는 망신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는 자각이었고, “여당 대변인이 믿고 사랑하는” 방송을 거부하는 결의였다. 동시에 그런 언론을 거부하는 시청자들, 케이비에스에 투입된 공권력에 항의하다가 해고 통보를 받은 여성 노동자들의 희망이 덧붙여진 사건이기도 했다.

2017년 MBC도 비슷할 것이다.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을 대신해 방송을 만들고 있는 비정규직들, 프리랜서들에게 MBC 노조원은 또 하나의 갑이었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응원해야 하고 지지하며, 승리를 따낼 것을 빌어 마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난 9년 동안의 기억 때문이다.

방송은 공기(公器)다. 전파는 공공재다. 그 사업권을 누군가 가질 따름이다. 지난 9년간 방송은 공공재임을 포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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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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