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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발적 복종

2014-05-2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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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5. 27. 화요일

범우










별것도 아닌 잡문을 쓰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시간이 좋다. 모호하게 체득한 세상의 이치를 명쾌한 해석으로 가르쳐주는 문장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다. 갖가지 방법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보면 경이롭다. 세상에 진득하게 자리 잡은 온갖 부조리와 병폐들을 해결하려는 사고와 노력들도 존경스럽다.


사람이 자연의 경쟁자들과 시련에 맞서느라 사회를 조직하고, 그렇게 조직화된 사회 속에 기생충처럼 자라나는 부조리와 병폐들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은 삶을 마냥 비관할 수 없게 한다. 습관적으로 책을 몇 페이지 읽지만 글자만 읽을 뿐 내용을 진득하게 반추하고 작가의 입장에서 때론 반문을 던지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조선은 망한 게 아니라 권력자들에 의해 일본에게 팔린 거였고, 일본은 졌지만 승복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패배는 조선의 승리가 아니었어도 조선의 건국이념은 꿈틀거리며 살아남은 걸 느낀다. 만수산의 드렁 칡처럼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이 얽히고 설켜 천년만년 살기 위해 세운 나라 조선은 정도전의 나라가 아니라 이방원의 나라였다.


백두혈통을 중심으로 혁명 귀족들이 얽히고 설킨 북조선 인민공화국이나 조선일보의 철학과 이익으로 얽힌 남한은 칡 덩쿨만 그물처럼 우거져서 어떤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산 같다. 보이는 곳의 이리 저리 꼬인 칡넝쿨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구렁이처럼 똬리를 튼 뿌리가 끝도 없이 깊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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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시신을 아직 다 건지지 못했고, 세월호 참사의 책임 규명도 아직이지만, '즐겨라 대한민국'이란 구호와 월드컵 응원용품들이 세일 행사를 한다. 상갓집이 조용하면 망자를 욕되게 하는 거라고 떠들썩하게 놀아주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밤새 술을 먹고, 화투를 치고 그랬던 것 같다. 그건 그나마 호상소리 들을 만한 곳에서나 그랬던 것 같은데 아직은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자영업을 하는 소상인들도 어서 상황이 마무리 지어지길 바란다. 어떻게 마무리 지어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 지어지길 바라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슬픔과 분노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가 싫은 것도 있겠지만 그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조금 덜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애잔하고 불쌍해서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대통령의 눈물은 심금을 울리는 묘약이었을 게다. 화랑유원지 앞으로 흐르는 화정천 윗목에 '대통령을 사랑합시다. 정부를 사랑합시다. 국회의원을 사랑합시다'하며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플래카드가 붙었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폭력에 의해서건, 선출에 의해서건, 상속에 의해서건, 폭군의 출현 방법이 어떠하던 간에 독재적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의 주위에 권력의 달콤함을 나누어먹는 한줌의 무리들이 있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그들이 다시 주위를 그렇게 둘러치다 보면 먼발치에서는 받아 먹은 것 없이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무리들이 늘어나서 독재를 옹호하게 된다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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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의 글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서도 울림을 준다. 이런 글을 십대에 쓰다니 천재가 있긴 있다. 천재가 본 세상은 천재의 세상이고 천재가 본 세상을 바탕으로 내가 본 세상을 이해한다. 제아무리 천재의 시선이라고 해도 타인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면 편하긴 하겠지만 자유 의지는 의미가 없다.


무리를 짓는 인간에게 리더가 존재하는 건, 인류의 시작부터였겠지만 리더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시작했던 건 나무에서 내려온 인류가 단백질을 확보하기 위해 사냥꾼이 되기 전 청소 동물과 경쟁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초원지대에서 포식자들이 먹고 남긴 사냥감의 징조를 향해 두 발로 뛰어가서 고기를 발견했을 때, 기쁨으로 팔을 들어 올리고 무리들에게 여기에 고기가 있다는 확신에 찬 포효를 하던 이와 그 소리와 모습을 보고 모여들어 함께 기쁨을 나누던 무리들로부터 유전된 형질인 것 같다. 순수한 경쟁의 출발이고 승리의 기쁨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면 따르고 싶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과, 자신의 행동과 말에 믿음을 갖고 따라주는 사람들의 칭송에 환희를 느끼고 중독되는 리더 역할의 사람의 능력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각자 하던 생각을 멈추고 우두머리만 따라가다 보면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면 좋게 되기 쉽다.


여느 해와 다른 선거 풍속과 낯선 후보자들 때문인지 투표에 대한 질문들을 간혹 듣게 된다. 어느 당을 찍으라고 명쾌하게 말은 못하지만 되도록 재산 없고 병역에 하자 없는 사람들을 찍어야 당신들에게 해가 덜 갈 거라고 말해준다. 기권해도 그 자리 누군가 들어차서 세금으로 주는 월급과 특권을 누리고 할 수 있는 권한들을 사용해서 더 좋은 쪽으로 예산을 집행 할 테니, 기왕이면 주변머리 없어서 덜 해쳐 먹을 놈으로 뽑으라는 부연 설명을 한다.


박근혜대통령의 당선 뉴스에 절망을 품고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누리당을 찍으라는 소리는 차마 못할 노릇이고, 대선 투표 하던 날 일가족이 비행기타고 미국으로 날라버렸던 안철수 의원님의 새정치를 믿어보라는 말도 차마 못하겠고, 통진당은 고개가 돌려지고 노동당과 정의당은 애잔하지만 한숨이 나온다.


자신들이 주입시킨 틀 속에서만 국민들이 사고하고 판단하고 자유로울 것을 원하는 기득권층의 바람대로 만들어지는 텔레비전 방송만 보는 사람들은 출마한 후보 중 최악과 차악을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낙선한 정치인은 좆도 아니게 되고, 사표는 의미가 없다. 선거 제도도 기득권층이 원하는 모습에서 바뀔 낌새도 안 보이지만 시스템이 침몰한 나라에서 선거와 개표과정이 공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언론과 권력이 시키는 대로 즐기거나 소비하거나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과 양심이 시키는 대로 추모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지난 주말에 2백여 명이나 연행되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거리로 나서라고 뜨거운 외침으로 가르침을 주던 분들은 그자리에 함께 하지 않는다. 경찰서마다 분산 수용된 사람들은 이리저리 치이고 모욕 당하고 조롱 당하며 시달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잊혀질 즈음에 벌금을 물고 냉소적으로 변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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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요구하는 정의를 갈구하는 시위에 동참하지 않는 체 게바라를 비난하는 친구에게 자신은 무기도 들지 않고 그들 앞에 나서지 않을 거라던 대답이 옳은 말 같다. 최소한 자신을 지킬 수 있거나 장애물을 부술 수 있는 무기는 쥐어주고 함께 나서자고 하는 게 옳지 싶은데, 바짝 마른 민초들에 불똥이 튀다 바람을 잘 만나면 큰불이 되어 칡넝쿨을 다 태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해경의 조직 해체를 선언했다. 해경, 언딘, 세모그룹, 항만청과 해수부, 선박보험, 검찰과 정치인들의 연결고리를 명쾌하게 잘라 각각의 뿌리로의 추적을 금지하는 건 아닐 것이다. 감히 대통령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금방 사태가 수습될 거라고 진언하여 대통령이 유가족 앞에 허언을 하게 만들고, 그 말의 여파로 천민 유가족들에게 대통령이 시달림을 당하게 만들었다는 노여움과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과시해서 지지자들에게는 안도감을, 역심을 품은 이들에게는 겁을 주려는 것 같다.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세몰이를 한다. 아직 미개한 국민들 중 일부는 가여운 대통령님이 눈물을 흘리게 만든 적들에게 분개한다. 세대 간의 의견이 갈수록 극명하게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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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명의 나이지리아 여학생들은 납치되어 우리 돈 2만 원에 이미 팔려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기공장으로 끌려가 생산한 아기를 인접국에 노예 또는 종교행위의 제물로, 장기제공 용으로 팔리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생중계로 300명이 넘는 목숨이 생으로 수장되는 모습을 보고서도 대한민국을 즐기고 찬미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이해가 갈듯도 하다.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이웃집 소녀들을 팔아 버리던 나라에서, 그래도 요즘은 불공정 계약이나마 하고 파는 형식으로 바뀌었으니 발전은 했다. 발전된 조국의 위상을 보면 뿌듯하신 분들도 있을 법 하다. 비록 일본 정치인이 몇 만 명의 한국인 매춘부가 일본에서 성산업에 종사한다고 비아냥거려도 그것은 그녀들 스스로가 대책 없는 빚에 의해 그러한 선택을 했던가 물질적 욕망 때문에 선택한 길이지 80년대처럼 납치해서 팔아먹은 건 아니니까 말이다.


오늘에서야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에 다녀왔다. 아직 찾지 못한 시신들의 영정은 배치 되지 않았다. 주차장도 한산하고 분향소도 한산하다. 아직 아이와 남편을 건지지 못한 며느리와 시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끝가지 포기하지 말고 찾아달라고 피켓을 들고 있다.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고단하고 처연한 모습은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증오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하는지, 사태해결을 위해 누구에게 피켓을 디밀고 하소연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책임감있고 확신있는 목소리를 듣게 되면 무작정 의지하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일 텐데 누구도 그러질 않는다.


구조책임이 있는 해경은 해체된다고 하고, 언론인들은 권력자 품에 안기는 게 소원이고, 정치인들은 미개한 국민들이 미개한 채로 있는 게 다스리기 편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고, 종교인들은 없는 집 것들이 배를 타서 나라를 우환에 빠트린다고 역정이다. 경찰은 정보과 형사를 배치해서 동향 파악을 하고 그나마 함께 눈물을 흘려주던 선량한 이웃들도 먹고 살기에 팍팍해 발길이 줄어든다. 이제 눈물도 말라버린 그들 대신 대통령님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한다는 결의에 찬 목소리들 앞에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소용이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의 청원에 서명을 하고 돌아섰다. 지방선거 공보물이 집에 도착했다. 투표를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하려했는데, 이스라엘 전차에 돌 던지는 팔레스타인 꼬마의 마음으로 할 것 같다. 무기라고 들을만한 게 맞아서 아플 것 같지도 않은 돌멩이다. 그래도 천 개, 만 개, 백만 개가 한꺼번에 날아가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 한 조각은 있다.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며, 권력에 충성하는 걸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건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고 삶에 대한 예의다.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고, 할 수 있는 걸 외면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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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이 왕성하던 시기에 들었던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노래는 애절한 후렴구가 인상적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는 부분이 '나랑 해~ 나랑 해~ 나랑 해~' 하는 발정 난 수컷의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플래카드에 적힌 '대통령님 정부님 국회의원님 사랑합시다'라는 글귀가 혈기왕성하던 소년시절의 기억을 살려내서 쓰게 피식 거린다.


사랑합시다. 나랑 합시다. 나랑 사랑합시다. 사랑 나랑 합시다. 주인아씨 무 다리를 붙잡고 헐떡거리는 거세된 수캐가 연상되기도 해서 짠하기도 하고, 지독한 충성심이 유병언 일가를 수호하는 구원파 교인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아서 답답해지기도 한다만, 인간 사회가 완벽하다면 나아지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범우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