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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트력제가..

 

5월 25일 새벽을 뜬 눈으로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키보드를 붙잡고 미친듯이 3편의 ‘북미회담 무산 기사(링크)’를 썼다. 완성된 기사는 바로 딴지 편집부로 날렸다. 기사는 실시간으로 편집돼 마빡에 올랐다. 그러길 4시간 정도 했나?

 

한숨 돌리고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 잠시 구청을 들렀는데, 실시간 뉴스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 되자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트럼프가 트윗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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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부터 따듯하고 생산적인 성명을 받았다"

 

“이런 미친!!”

 

욕이 나왔다. 전두엽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고마워 트럼프”

 

까놓고 말해서 트럼프도 ‘좀’ 불쌍한 면이 있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제대로 ‘사람 취급’ 받지 못 하고 있고, 언론 환경도 좋지 않다. 우리로 치면 TV조선 급이라 할 수 있는 폭스뉴스에서조차, 

 

“저거...공화당만 아니면...어쩌다 저런놈이 대통령이 됐냐?”

 

라 할 정도로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다(평가받을 만한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렇듯이 내부의 정통성을 얻지 못하는 이들은 외부에서 그 정통성을 찾으려 한다. 트럼프 역시도 자신의 성과를 외부에서 만들어 국내에서 인정받으려 한다)

 

 

2. 벼랑 끝에는 벼랑 끝으로

 

트럼프가 편지를 썼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 이거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트럼프를 너무 믿지 말라는 말들이 생각났고, 前 국무부 대북정책 조정관이었던 크리스토퍼 힐의 생각도 났다. 볼턴? 솔직히 말해서 볼턴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트럼프에게 있어 볼턴은 ‘쓰고 버리는 카드’다. 조선왕조로 치자면, 유자광 같은 존재이다. 학맥도, 인맥도 없고 오로지 ‘항성’이 있어야지만, 그 빛을 쬐 빛나는 존재. 즉, 쓰다가 버릴 수 있는 카드다(볼턴을 정통 네오콘이라 볼 수도 없다. 그냥 입만 살아서 떠든다. 통치자들이 적당히 뽑아서 쓰다가 버릴 수 있는 ‘스피커’ 같은 존재가 볼턴이다. 늘 그렇지만, 이런 존재들은 주변의 배경이 없기에 오로지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한다. 그러다 버림받는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 트럼프의 편지가 공개되고, 다시 8시간 30분 만에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가 발표됐다(이 부분은 지난 기사로 대체하겠다).

 

미국에 보내는 명백한 사인이었다.

 

“우리는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이 담화문이 트럼프를 움직였다. 밤 사이에 트위터가 올라왔고, 연달아 소식을 물어오는 종달새를 보며 환호작약했다. 마음 한편으론, 

 

“씨바, 미국 대통령 트윗질을 보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란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리고 이 기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씁쓸함은 뭘까?

 

“역시 미친놈을 상대하려면 미친놈밖에 없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바로 우리의 ‘단선적 사고’다. 특히나 국제정치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은 너무도 단순하고, 순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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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부터 시작된 북핵 위기에서 북한 외교관을 상대로 하는 이들은 언제나 북한 외교관들의 ‘읍소’에 넘어갔다. 

 

“북한 내 강경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명분이 필요하다.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을 달라. 그걸로 본국의 강경파들을 설득해 보겠다.”

 

외교관들은 비둘기파이고, 북한 내 군부세력은 매파란 단순한 공식. 일견 맞는 말처럼 보였다. 아울러 얼굴을 맞대고 직접 협상을 하는 모습을 보자니, 이들은 말이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번에 양보하면 북한 내에서 비둘기파의 입지가 올라갈 테고, 협상을 좀 더 쉽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거야.”

 

란 생각으로 양보했고,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북한은 수령 일당 독재. 아니, 이제 왕조국가이다. 김일성이든, 김정일이든, 김정은이든, 그들이 결정을 내리고 지시를 내린다. 우리와 같은 의사결정구조, 논의구조가 없다. 외교관들이 말하는 ‘강경파’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협상 재료일 뿐이다(굿캅, 베드캅의 북한 버전이다).

 

이는 비단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한 사람의 ‘성향’으로 국가차원의 의사결정사항이 결정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혀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리에까지 올라간 사람이 앞뒤 분간 못하고 개인감정을 우선할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란 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마이크 폼페이오가 국무장관에 올랐다고, 대북정책이 강경일변도로 흐를지 모른다고 걱정한 게 우리 언론이었다. 

 

어느 정도 ‘급’에 올라간 사람이라면, 그 ‘직’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게 기본이다. 이번에 맡은 역할이 ‘굿캅’이라면, 착한 경찰의 모습으로 담배를 건네는 것이고, 다음에 맡을 역할이 ‘베드캅’인 경우에는 책상을 내리치며 윽박지르는 거다. 

 

개인의 성향과 인생 경험의 편린이 묻어나올 순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오차범위 안쪽의 이야기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그렇게 믿고 있었다). 

 

트럼프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까지 쓴 말들이 모두 ‘개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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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는 트럼프다

 

북한은 1차 북핵 위기 때부터 벼랑 끝 전술을 사용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너무도 간단했다.

 

“아예 상대를 하지 말자.” (당시엔 상대할 여력도 없었지만)

 

미국이 무시하자 더 심한 앙탈(!?)이 이어졌다. 전략적 인내라는 ‘무시’ 앞에서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무색해졌다. 

 

문제는 이제 미국이 제대로 자리에 앉아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 거다. 그러자 슬그머니 자기들의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든다. 바로 ‘벼랑 끝 전술’이다. 

 

북한의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나라이고, 가진 게 없다. 그렇기에 민감하고, 예민하며, 극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히, '북한식 화법에 익숙지 않아서 생긴 오해' 라고 보기엔 어렵다. 북한은 국제외교 무대에서는 ‘상식 밖의 존재’다. 왕정 국가이면, 그에 맞는 품격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인격은 돈으로 살 수 있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의 여러 왕조국가들을 보라. 국제관례상에서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억지를 쓰지만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파트너들은 거의 없다. 왜? 그들은 돈을 쓰기 때문이다(그들의 두루뭉술한 약속 개념, 시간 개념들은...). 그런데 북한은 어떨까? 같은 왕조국가이지만, 이들은 돈이 없다. 가진 건 자존심밖에 없다. 

 

결국은 극단이다.

 

북한은 극단적인 모습을 계속 보였다. 이게 먹혔을 때도 있다. 그러나 지난 1차 북핵위기와 몇 번의 합의 파기로 북한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자존심을 내세웠고, “더” 미친놈을 만나게 됐다.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중략)...아주 좋은 뉴스를 받았다.”

 

김계관 담화 이후 나온 트럼프의 트위터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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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대로 개최될 수도 있다...(중략)...그들(북한)은 그것(북미정상회담)을 무척 원하고 있다. 우리도 그것을 하고 싶다...(중략)...어떻게 될지 지켜보자.”

 

기자들 앞에서 트럼프가 한 말이다. 

 

 '이게 뭐지?'

 

일국의 정상이다. 그것도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아니,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진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불과 하루 전에 정상회담을 파기한 대통령이, 이제 다시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기자 앞에서!!

 

한 사람의 말의 무게, 대통령의 말의 무게...뭐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는 트럼프다.”

 

정상회담 파기 카드를 블러핑으로, 협상카드용으로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다. 전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행보나(철도나 시찰하고 있고) 8시간 30분 만에 나온 극히 ‘이례적인’ 내용의 담화문을 보건데, 북한도 예상하지 못했고, 당황했다는 게 느껴진다. 역시나, 

 

 “그는 트럼프다.”

 

회담 재성사 가능성을 대비해 30명가량의 미국 측 선발대가 27일 출발하는 것도 아직은 취소하지 않은 상태. 이건...‘블러핑’이다. 트럼프는 여차하면, 판을 엎어버릴 수도 있는 인물이란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도, 워싱턴 정가의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냉랭한 기운도, 미 언론들의 비관적인 모습도 트럼프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는 트럼프다.”

 

앞으로의 행보를 예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는 트럼프이고, 대통령으로서의 체면도, 국가운영의 철학도, 미국의 상징이라는 무게감도 필요 없다. 

 

“그는 트럼프다.”

 

어쩌면 북한을 상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도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할 수 없는 일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하고 있다. 정말 대한민국의 국운이 틔이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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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트럼프의 인식은 문정권이 북의 편에 서서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판단한 것" 이라고 말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이제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건 개개인의 자유의사이니 뭐라 말할 수 없겠지만, 트럼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홍준표 대표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 대목이 궁금하다. 진짜 트럼프의 속내를 누가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