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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 9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그 시간쯤에 경남엔 억수 비가 쏟아졌다. 

 

10시, 갑자기 비가 그치고 햇볕이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봉하로 향했다. 

 

10시 30분 부전 발 순천행 1941호 기차엔 평일 오전치곤 꽤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많은 승객의 가방에 노란 리본이나 노란 배지가 달려 있었는데, 진영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자 이들은 예상대로 내릴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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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역은 귀빈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검은 양복 차림의 사람들과 시민들,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원작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홍보를 하러 나온 관계자들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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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남았고 날씨도 좋길래 버스 대신 화포천 아우름길을 걸어 봉하에 가기로 했다. 진영역 구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화포천 아우름길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이 길로 봉하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린다. 

 

한림정역에서 내려 화포천 습지의 동물들을 구경하며 가는 코스도 괜찮다. 이날도 가는 도중에 뱀 한 마리를 봤는데, 초록빛이었던 걸로 봐서 유혈목이었던 것 같다.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날쌔게 수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쪽이 귀빈용 도로로 사용되었는지 경찰이 차량 통제를 했다. 길이 막혀 항의하는 경운기 운전자와 경찰 사이의 작은 소란이 있기도 했다. 걷다 사이 경찰차의 호위를 받는 검은색 세단들 여러 대가 옆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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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현수막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추모객들의 버스가 줄줄이 들어선 게 보였다.

 

행사까지 2시간이 남았지만 이미 봉하마을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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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 세월호, 스텔라 데이지호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켓들이 있었다. 추모용 국화를 파는 상인들, 통기타로 민중가요를 부르며 버스킹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노무현재단 후원회원 모집 안내, 6.13 지방선거 독려 캠페인, 노무현재단 노랑풍선 배포, 특별전시 등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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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전시관 추모의 집에서는 <한반도 평화의 이정표를 그리다> 특별전시 중이었다. 바깥 벽면엔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이 붙어 있었다.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게 각국 정상들이 제발 좀 협력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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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판매소에는 지난 9주기 추도식의 대형현수막이 나풀거렸다. 판매 중인 우산은 강렬한 햇빛 때문에 잘 팔려나갔다. 우산에는 만화가 강풀 씨가 그린 일러스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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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선 다큐 영화 '바보들'을 홍보 중이었다.  노 대통령 서거 10주년에 맞춰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노사모'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다. 혹시 펀딩에 생각이 있으신 분은 링크를 누르시면 되겠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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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방앗간 앞 공터에는 재단 측이 참배객들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 1000개가 놓여 있었다. 그닥 출출하지 않아 패스했는데 그래도 한 번 먹어볼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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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는 많은 시민이 국화를 들고 차례를 기다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노사모의 화환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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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한 쪽에는 각 지역 노사모 모임 등지에서 보내온 소형 화환들과

 

신해철 팬클럽 및 유족, 이낙연 총리, 강경화 장관, 정세균 국회의장, 추미애 민주당 대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김성곤 국회 사무총장 등이 보내온 화환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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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식장 입구는 기념 촬영을 하려는 추모객들로 붐볐다.

 

김해 노사모에서는 종이 모자와 인절미, 생수를 추모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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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시작 1시간 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리허설이 있었다.

 

무대 왼쪽엔 2000년 6월 15일, 오른쪽엔 2018년 4월 27일, 두 대통령의 남북회담 날짜가 적혀있었다.

 

미리 와서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도, 뜨거운 햇살에 그늘을 찾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곳곳에서 파란색 점퍼를 입은 지방선거 민주당 후보들의 모습도 보였다.

 

같은 시간, 방금 막 재판에 출석한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다 같이 돌려보고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추모식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귀빈석 자리도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1시 50분쯤 화면에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내려온 날의 영상이 나오자 현장에 있던 추모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다.

 

몇 분의 영상이 끝난다음 가수 이승환씨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왔고 곧 본 행사가 시작되었다.

 

 

박혜진 아나운서의 진행에 따라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묵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이어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추모객들의 목소리엔 표현 못 할 비장미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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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기 앉아계시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 가셨다가 돌아오시는 길입니다.

다른 두 분 대통령은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가 이렇게 전진하고 발전합니다."

 

현장에선 웃음과 환호가 터졌다.

 

이해찬 이사장은 건강이 안 좋은지 마이크를 잡은 두 손이 떨렸지만, 말에는 막힘이 없고 오히려 총기가 느껴졌다. 영상 없이 음성으로만 듣고 있었다면은 손이 그렇게 떨리고 있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다.(이해찬 이사장의 추도사 전문)

 

이해찬 이사장의 추도사가 끝난 후엔 가수 이승철씨의 추모 무대가 이어졌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얼마전에 발매된 노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가 불러졌다.

 

이승철씨는 이 노래에 대해 “노래는 생명이 있고 임자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사회 분위기가 굉장한 역할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가 일주일간 370번 방송됐다. 곡도, 가수도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 같다.” 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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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국회의장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장문의 추도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현장에서는 여러 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난해 5월 9일, 촛불의 힘으로 다시 새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이 말은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는 지역주의의 강고한 벽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결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여기 당신의 고향을 시작으로 제2, 제3의 노무현이 당신의 꿈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못다 친 박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추도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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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론 이날의 주제 '평화가 온다'라는 영상이 나왔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일, 김정은과 악수하는 장면을 편집해 대통령 서로가 악수하는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 장면이 참 감동적이었다. 

 

 

이어 노건호 씨의 유족 인사말이 있었다.

 

"지난 1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머리가 다시 났습니다. 혹시라도 울적해 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사실 나도 풍족한 머리숱에 가장 먼저 눈이 갔다. 한반도 평화만큼 탈모 치료도 중대한 사안이라 생각한다.

 

봉하마을과 노무현 재단의 일들을 설명한 노건호 씨는 내년 10주기에는 북측 대표도 함께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이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마무리를 맺었다. 상상이지만, 상상만으로 감격스런 일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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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시민 합창단의 '아침이슬' 제창으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추도식을 마치고 귀빈들 먼저 묘소참배를 하러 이동했다. 이동 중에 박원순 서울시장, 김경수 후보, 오거돈 후보. 표창원 민주당 의원, 김경진 평화당 의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많은 시민들이 응원한다는 말을 던졌지만, 한편에는 염동열·홍문종 체포동의안 부결에 항의하는 시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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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에서 추모행렬을 내려다보았다. 묘소 참배를 하기 위해 길게 선 시민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봉화산에서 추모행렬을 내려다보았다. 묘소 참배를 하기 위해 길게 선 시민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참배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줄이 무척 길었다. 이런 날은 진영역이나 진영 시내 간의 셔틀버스나 임시 증편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만원 버스에서는 승객들은 대화를 나눴다. 낯선 사람과 버스에서 대화하는 일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의 벽이 많이 낮았던 것 같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찾아온 온 여성분도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지방선거로 이어졌는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독재세력을 욕하며 민주당을 응원하는 모습은, 경상도 사람인 내게 있어선 낯설고 재밌는 풍경이었다. 

 

어느 대통령 구속 후 첫 기일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던 추모식이었다.  

 

10주기가 기대된다. 지방선거 압승과 동북아시아의 성공적인 평화협정이 이루어져 내년 추도식은 더욱 기쁜 분위기에서 열리길 소망해본다.

 

노건호 씨의 바람처럼 북측대표가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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