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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쪼는 듯한 햇빛에 미세한 먼지는 눈에 보일 정도로 허공을 맴돌았다. 음습한 기운이 맴도는 거리엔 온갖 종류의 비닐봉지와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길거리의 개들은 말라 비틀어져 병에 걸린 듯 털이 빠져 보기가 흉했다. 정돈되지 않은 길과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남루한 건물이 말라 비틀어진 듯 앙상했다. 도시는 혼돈의 늪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멀리서 AK-47 총소리와 포 소리가 혼란스럽게 어울려 허공을 갈랐다. 혼란과 광기가 브라자빌과 킨샤사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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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96)과 콩고 내전(97)

 

310개월 차 근무 중인 효도는, 2공수 1중대 근무를 하면서도 보스니아 내전에 참전 후, 말로만 듣던 두 번째 파병을 경험 중이었다. 내전 소식이 흉흉한 콩고 브라자빌에서 정신 없이 지낸 한 달 동안 제 8해병 공수보병 연대와 임무 교대해 투입되자마자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과 프랑스인들 1.600여명을 프랑스로 철수시키고 콩고 강 하류의 르완다 난민들을 브라자빌 북쪽 캠프로 철수 시키는 미션을 완료했다. 반군들의 예상로를 차단하고 통행을 통제하는 미션을 수행 중에 있었다.

 

반군 로랑카빌라에 의한 킨샤사 점령은 파병되어 오던 5월에 이미 끝났고 시내는 잠시 동안이지만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킨샤사가 아닌 브라자빌에서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훈련이 연대 병력 위주로 실행되고 있었다.

 

르완다 내전이 가져다 준 나비효과로 중앙 아프리카의 9개국이 내전에 참여해 콩고를 필두로 아프리카 대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지만 사실은, 인종 청소 전쟁이었다. 그 여파가 킨샤사의 민주콩고를 넘어 브라자빌의 콩고 공화국으로 번져 오고 있었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 국가와 종족 사이를 오가며 위험하지만 짜릿한 자원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중앙 아프리카 챠드와 세네갈, 코트디부아르등의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대표적인 친 프랑스 정권이어서 모든 정보는 프랑스가 쥐고 있었다. 따라서 각 국가의 주요 거점마다 프랑스의 군대가 공군의 미라쥬 전투기까지 동원해 장악을 하고 있었고 한 개 여단 병력을 파병해 주도권을 쥐며 서 아프리카에서 맹주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고 있었다. 뛰어난 아프리카 인재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문화에 스며들게 하고 고급 프랑스어를 가르쳐 문명의 혜택을 보게 해주는 전략이 통했지만 서 아프리카인들은 그 정책에 환멸과 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이미 프랑스 군대는 남대서양 해안의 석유산지인 푸앵트누아르의 프랑스 정유회사 엘프-아퀴텐의 직원들과 가족들을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로 옮기는 작전을 비밀리에 수행 중이었다.

 

콩고 브라자빌엔 프랑스의 한 개 여단 병력이 주둔하여 제 2외인보병연대가 공항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제 1외인기갑 연대와 제 1외인공병연대가 공항 방어 임무를 지원했다. 효도가 속한 2외인공수연대 1중대는 시가전 전문 중대로, 시가전에 대비하고 명령이 떨어지면 UN 산하 연방 국들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 시키기 위한 작전 지역에 투입됐다.

 

수륙양용 장갑차(VAB VTT)로 기동성을 살렸고 12.7mm, 20mm 기관총, 기관포와 84mm 휴대용 로켓 무기까지 장착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 임무는 인도주의 단체를 물류 분야에서 지원하는 임무와 6,000여명의 유엔 상임이사국 철수 작전이었다. 공군 전투기에서부터 해군 상륙함까지 집결했고 미국과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 군대도 투입된 이 작전을 펠리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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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 중인 외인보병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인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수도가 붙어 있는 희귀한 콩고는 브라자빌 콩고와 킨샤사 콩고로 부르기도 했다.

 

효도는 한 때, ‘자이르라고 불렸던 브라자빌 콩고뿐만 아니라 전체 아프리카에서 종족간의 분쟁이 국가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잘 알았다. 거기에 민주콩고 모부투 대통령이 온갖 부패와 인권탄압에 연루된 독재정권이었지만 공산당 세력인 정적, 로랑카빌라를 동부 산악지대로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와 미국은 절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앙골라의 지원을 받은 로랑카빌라의 반군이 공격했지만 프랑스는 외인부대를 보내어 또다시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의 나라를 통째로 거덜낸 부패와 정치적 무능력은 결국, 군·검·경에게 월급도 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에도 서방 강대국들의 지원으로 쿠데타는 물론, 정적까지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런 모부투가 콩고를 비운 사이, 로랑카빌라의 반군이 민주콩고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모부투는 돌아오지 못하고 모로코에 머무르면서 프랑스 망명을 시도 했지만 프랑스가 거절한 상태였다. 그때가 1997 5, 효도가 처음으로 콩고에 발을 내딛던 시기였다. 이 내전을 1차 콩고 전쟁이라 했다. 교전국들이 9개 국이어서 아프리카 대전으로도 불렸다.

 

어찌도 한국의 역사와 그리도 닮았는가 하고 효도는 생각했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 미국을 위한 남한과 러시아를 위한 북한과의 대리 전쟁,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와 부패, 전두환의 쿠데타, 종북 한마디면 다 통했던 만능 열쇠를 가진 이승만 세력이 가한 4.3사건과 모부투의 종족 전쟁, 미국의 철저한 국가 분리주의 정책에 따른 이승만처럼,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37년 간의 독재는 허무하게 끝났지만 종족 분쟁과 내전, 그렇게 한국 전쟁이 일어났듯 아프리카는 제 2차 대전의 양상을 띠어 가고 있었다.

 

2외인공수연대 연대장 퓌가 대령은, ‘2차 콩고내전이 필히 일어날 것이며 외인부대 1개 사단이 주둔한 ORSTOM 진지도 안전하지 않고 브라자빌 콩코도 안전하지 않으니 모두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미 1차 내전으로 인한 사상자 수가 군인과 민간인을 모두 합쳐 백만 명에 이르렀고 실종 피난민만 해도 20만이 넘었던 끔찍한 상황이었다. 콩고 강을 사이에 둔 브라자빌과 킨샤사는 그렇게 전쟁과 평화를 가르고 있었다.

 

로랑카빌라 정부는 집권 후, 철권통치를 휘둘렀고 또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부패의 길로 접어들었다.

 

콩고 군은 마약에 취했거나 알코올에 취한 듯 눈에는 초점이 없고 태도는 전쟁중임에도 태만함이 묻어났다. 거의 모든 군인들이 그랬으므로 멀쩡한 정신으로 싸운다기 보다, 약에 취하거나 혼미한 상태였다. 의식주를 해결하지 않는 군주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유명한 소년 병들의 모습도 보였다. 소년 병들은 외인부대를 동경했으나 존중하지는 않았다. 소년 병들은 위험해 보였고 언제든지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눌 것만 같았다. 눈빛은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모든 언행은 충분히 도발적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군대, 통제력을 잃은 군대는 온갖 약탈과 강간, 방화를 일삼았다. 강간과 약탈의 한 가운데는 집단의 광기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콩고 군인들은 전의가 상실된 퇴폐한 군대 자체로 권력의 하수인을 즐겼지 의무나 책임이 없었다. 모부투 부패 정부 때, 월급도 받지 못하던 군인들이 싸울 의지는 물론, 새로 집권한 카빌라의 철권 통치에 이은 반정부 인사 탄압으로 인원이 많았음에도 서방 지원군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오합지졸들, 그 현장을 눈 앞에서 프랑스 군인의 모습으로 효도는 목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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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

 

콩고내전은, 종족 전쟁에 이은 자원 전쟁이기도 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서 비롯된 인종간의 대학살은 19세기 말,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후투족과 투치족을 구분하면서 시작됐다. 평화롭던 원시사회가 서로를 구별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르완다와 브룬디를 식민통치 했던 벨기에가 있었다. 르완다와 콩고내전 2차에 걸쳐 일어난 아프리카 대전의 원흉은 벨기에였으나, 르완다 학살이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 상정되는 것을 막은 것은 아프리카를 실질적으로 식민통치하던 유럽과 미국이었다.

 

콩고를 비롯한 우간다, 탄자니아를 국경으로 둔 두 나라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 사고로 동시에 사망하고 3개월간 100만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에 버금가는 최악의 학살이었다. 두 종족간의 학살은 너나 할 것 없는 희생자를 만들었고 학살의 수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선 것이어서 4.3 사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벨기에가 만들어 놓은 이 인종 청소는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말살이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 대한 공격과 백인들, 다른 국가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복이나 국가와는 무관했던 후투족은 투치족이 전선을 형성하며 반격을 시작하자 민주콩고로 피난을 시작했다. 그 인원이 300만에 달했다. 이어서 르완다는, 자국민의 불행을 민주콩고의 불행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후투족 병력들이 피난민에 섞여 난민촌을 병영화 시키는데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다. 그 지원을 받은 사람이 현 대통령 로랑카빌라(미국)였고 대통령이 되자 요구가 점점 많아지는 르완다와 우간다(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협력관계를 철회하는데 이어,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졸지에 자동 침공이 되어버렸다.

 

물론, 거기에는 자원 전쟁도 포함되어 있었고 배경은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프랑스는 공식적인 프랑스 육군, 외인부대 외에도 자원을 관리하던 세르비아 용병을 운용했다. 미국이 그 자원을 뺏으려 했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의 대리전쟁 양상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내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빌라의 쿠데타 성공은 프랑스에 상당한 타격이었다. 르완다를 미국에 잃은 것처럼, 콩고도 미국에 잃을 서막이 열린 것이다. 가봉, 세네갈 등 전통적인 프랑스 우방도 위험했다.

 

퓌가 대령의 전술 참모부는 브라자빌의 각 주요 루트와 거점들을 장악한 뒤, 두 개 중대로 하여금 킨샤사에서 브라자빌, 콩고 강 도강 훈련을 실시한 후, 새로운 야영지를 구축하는 훈련도 실시했다. 대피해야 할 인원은 많았고 총을 들지 않은 적들은 피아식별이 어려웠다. 프랑스 군 안전지대로 들어온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비행기를 통해 탈출했고 마지막까지 탈출을 위해 공항을 점유하는 일에 사단 병력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2외인공수연대의 2개 중대만이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효도는 본능적으로 이번 전투는 반드시 적과의 교전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효도는 한국 군대에 대한 악몽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군대 생활이 자신에게 군대에서 배워야 할 대부분의 기술만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인부대는 자신에게 단지 어울리는 옷과 복지 혜택뿐만 아니라 외인부대라는 거대한 가족을 안겨준다고 믿었다. 훈련도 한국에서 받은 것에 비하면 양호했고 내무반 생활은 한국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효도는 이미 한국에서 완성된 군인의 모습으로 외인부대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혜택과 자유, 프랑스 문화를 마음껏 즐겼다. 외인부대는 효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절정은 실전에 있다는 것을, 콩고에 파병된 이후에야 깨달았다.

 

시가전 훈련은 힘든 것이 없었다. 훈련이 거듭되면 될수록 살고 죽는다는 것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매복과 매설된 지뢰, 수류탄, 저격수 등에 의해 처절하게 깨달았고 반복된 훈련만이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효도는 한국에서 요인 납치, 사살, 극한에서 생존법, 고공낙하와 잠수에 이르는 대부분의 훈련을 받았지만 인간적인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아서 생각할수록 끔찍하고 몸서리 치는 증오가 피어 올랐다.

 

외인부대에서 배우는 전술은 그에 비하면 실전 위주였고 실용적이었다. 자잘한 군더더기 다 없애고 실전 위주의 실탄 사격에 정신을 괴롭히는 것은 오로지 피곤함뿐, 무엇보다 실전에 기초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들이 하나 둘씩 습득될 때마다 너무도 다양한 기술들에 피곤함과 짜증이 묻어났다. 인내가 한계에 이르는 것이 육체적인 고통도 아니었고 괴로워 그대로 죽고 싶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인간의 기술로, 전투에서 죽거나 다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평온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잠들 듯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시가전 전문가나 훌륭한 군인이라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 한 발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은, 하늘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운명의 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는 것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프랑스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효도는 펠리칸 작전이 묘하게 긴장을 주긴 하지만 여유가 있었다. 실전은 언제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쓰러질지 모르는 데다 내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총알 한 발이 내가 쌓아 놓은 운명을 송두리째 갈아치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졌다.

 

방탄 조끼를 입고 탄창 6개에 25발씩 실탄 장전을 하고 수류탄까지 지급 받고 전투 배낭까지 메면 무거웠다. 24시간 비상 근무에 쪽잠을 자면서도 혼란의 한 가운데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초계를 나갔다. 안전한 지역이긴 했지만 명령이 떨어지면 곧장 전투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료들도 모두 교육대에서의 어리버리 신병의 모습을 벗고 점점 랩맨’(외인공수부대원)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효도는 지난 3년 간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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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팔리 캠프와 몽떼 신또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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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세워진 Citadelle과 해수욕장, 칼비 만을 배경으로 낙하하는 공수부대원

 

효도는 칼비 라팔리 캠프에 도착한 뒤, 시가전 전문 1중대에 배치 받고 중대로 입소하기 전, 2주간의 공수 교육을 받고 6번의 낙하와 8천미터 공수무장 구보를 50분 안에 통과하는 테스트까지 끝마쳐야 중대와 소대에 배치 받을 수 있었다.

 

1중대가 시가전, 야전, 폭도 진압 전문 중대이고 나머지는 산악전문 2중대, 수륙양용의 3중대, 정밀 저격(800M)과 폭파 전문의 4중대, 그리고 사막 전문 중대인 5중대(새로 생김), 공수특공 팀(GCP)과 저격용 12.7MM PGM 저격수(2km) 소대, 휴대용 미사일 MILAN ERYX를 운용하는 소대를 보유한 옛 C.E.A는 지원 중대(C.A)로 이름을 바뀌었다. 사령부 CCL과 행정지원 및 연대 서비스 중대 CAS, 그리고 6중대로도 불리는 산불 감시 중대까지 포함해 1,200여명의 연대원들이 근무하고 한국인도 20여명에 달했다.

 

외인부대는 각 중대 별 전문성을 갖춘 2 공수연대 중에서도 공수특공 팀을 최고로 뽑았다. 각 중대 별로 GCP 팀원을 지명하고 뽑는 테스트에 관심이 많았지만 지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조건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어느 중대 누군가가 테스트를 받는다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 그런 친구가 받을 수 있느냐며 선별의 공정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선별은 교육대를 지나오면서 받았던 모든 테스트와, 개인 성격, 취향, IQ, 개인 전투 능력, 상황 별 대처 능력까지 포함되어 연대장이 후보자를 지명하면 11 공수 사단의 선별 훈련소로 가서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최소 병장 계급과 해외 파병이 4개월 이상이어야 했다. 선별은 쉬워도 팀원이 되기엔 너무 어려운 과정들이 많았고 단 한 명의 한국인도 그 팀에 들지 못했지만 자질은 충분하다고 믿었다.

 

외인부대에는 GCP 세 개 팀 외에도 제 1외인공병연대에는 12명으로 구성된 디놉스(DINOPS, 현재;PCG)라고 불리는 수중 폭파물 탐지,해체,폭파 팀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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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A

 

2외인 공수연대는 공수 보병으로 제 11공수여단 소속이었다. 1외인공병연대, 1외인기갑연대, 2외인보병연대, 13DBLE는 제6 경 보병여단에 속했고 새로 생긴 제2외인공병연대는 제27산악보병여단에 속했다. 따라서 훈련 받는 곳들이 모두 달랐다. 프랑스 육군 보병 훈련소가 있는 라르작(Larzac)에서 실시하는 시가전 훈련, 시가전 전술 훈련, 보병 전술 훈련(CENZUB, CENTAC, CEITO)에 이르기까지 주야를 불문하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실탄을 쏘고, 몸에 익숙해질 정도의 훈련이 거듭되었다. 그 훈련은 코르시카 섬의 산과 바다, 카스타에서도 3개월마다 한 번씩 실시되었다.

 

그리고 전 대원은 중대별로 각 중대의 기본 훈련을 교대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필히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제 27사악보명사단의 고산 전문 군사학교의 훈련도 받아야 했다. 모든 훈련이 힘들었지만 산악지대 훈련이야말로 짜릿하면서도 즐겁고,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열이 느껴졌다. 특히 마지막 5일은 알프스 고산지대를 전투행군과 혹한 속 보초, 시도 때도 없는 적과의 교전, 암흑 속에서 전우의 배낭 끈을 붙잡고 통과하는 길고 긴 동굴, 절벽을 통과하는 과정과 고산지대를 뛰어 다니며 헬기 이동을 통해 보는 알프스의 아름다움은 모든 피곤함과 고통을 잊어도 좋을 만큼 황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한계는 극에 달하고 미칠 것 같은 졸음은 그대로 죽고 싶을 정도의 황홀한 경지에 이르게 했다. 훈련은 힘들지 않았다. 효도는 졸음이 극대화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시로, 죽음이 그렇게 허무하고 부질 없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남의 얘기처럼 각인되고 있었다.

 

『지중해에 떠 있는 거대한 항공모함』

 

어떤 기자는 코르시카 섬, 칼비에 위치 한 제 2외인 공수연대(2eme R.E.P) 를 그렇게 불렀다. 전 세계를 통틀어 24시간 이내에 실전에 투입될 준비가 된 유일한 부대가 공수연대였다. 공수연대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스스로를 랩맨이라 부르며 자부심을 즐겼다.

 

원래 이탈리아 땅이라 모든 지명이 이탈리아어이고 나폴레옹의 탄생지로도 유명한 코르시카 섬은 코르시카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코르시카 민족해방전선이란 무장세력까지 존재했다. 거기에 이탈리아계 프렌치 마피아까지, 프랑스도 학을 떼던 곳에 제2외인공수연대를 주둔 시키자 표면상 평화가 찾아왔다.

 

코르시카는 또한 천혜의 관광지이기도 했지만 부대원들에게는 동상의 공포를 가져다 주는 몽떼신토를 가진 산악지대이기도 했다. 그런 척박한 산과 지중해를 볼 수 있는 탁 트인 바다, 6km에 이르는 해변의 해수욕장, 13세기에 지어진 성채와 세례자 요한 대성당, 총독 궁전까지 포함해서 관광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외인부대원과의 염문을 뿌리기 위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세계의 미녀들이 해변에서 몸매를 자랑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해변을 부대는 자주, 조깅하며 일반인 같지 않은 우람한 근육으로 뜨거운 밤을 기대로 설레게 만들었는데 일과가 끝나는 18시 이후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나가 여체를 탐닉하는 부대원들도 많았다.

 

그런데, 부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주말이면 부대 내로 들어오는 민간인 고공 낙하 클럽에 사비를 들여 고공 낙하를 즐겼고 효도와 한국인들은 태권도 격파 시범으로 부대원들의 신망을 얻어 태권도 클럽을 만들어 각국의 동료들에게 전파시켰다. 여유를 즐기기엔 충분치 않은 월급이더라도 병영 내에서는 맥주나 한 박스 사서, 안주 없이 먹거나 요리도 해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시내의 중국 슈퍼에서 구한 귀한 재료로 김치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각 중대 클럽에서 여럿이 모여 안주 없이 크로넨버그를 마시는 게 최고였다. 병을 들고 다니면서 마셔도 괜찮았다. 일과 후는 계급이 없었다.

 

병영을 떠날 순 없어도 중대 클럽에서 당구를 치거나 연대 피엑스에서 술을 박스로 사 마시는 일은 금지되지 않았다. 술을 통제하지 못하는 대원은 없었다. 입담이 센 한국인들이 모이면 주말에 '에덴 클럽'이나 '라 투르'에 나가 만난 여자들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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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에 참전하고 온 한국인들은, 건물들이 재건축하기 불가능하게 대각선으로 파괴되었고 더욱이, 이틀 동안의 외인부대 단독 작전 후, 납치한 방송국 요인과 자료들을 미군들이 모두 회수해 갔다고 했다.

 

거기에, 나토(NATO) 소속의 코소보 병력(KFOR), 사라예보 병력(SFOR)으로 24개국이 참전한 다국적 군 캠프는 그야말로 작은 세계였다. 국가 경쟁력뿐만 아니라 화폐의 위력까지도 알 수 있는 병영 생활은 외인부대원에게도 달러나, 파운드가 강세였지 프랑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했다. 전세계 국가 경쟁력을 보여주듯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순서였던 병력엔 여군들도 많아 전쟁터 속의 로맨스가 탄생되기도 했다.

 

내전이 거의 끝난 상태의 보스니아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황량한 산맥의 거점을 지키는 외인부대원들에겐 사람 냄새가 그리운 곳이었다. 그러나 외인부대는 명령에 복종할 뿐, 언제든, 어디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24시간 이내에 출동할 준비가 된 세계 유일의 부대였다.

 

효도는 의외로, 전 세계의 병력들이 모여 만든 캠프 생활은 세상의 어떤 경험과 비추어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믿었다. 전쟁터에 와 있다는 현실도 잊을 만큼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두 세계 속에서 폭격으로 폐허가 된 전쟁터와 술과 음악이 있는 캠프는 확실한 비교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료한 근무 등의 일상은 타이트하게 짜인 일정에 의해 잡념이 없었고 프랑스어가 익숙해지고 전우들과의 대화도 무리가 없어지자 오히려 대화가 줄어드는 기현상도 발생했다. 효도가 경험하고 있는 이 기이한 현상이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것 또한 미션 후에 만나는 다국적 군들과의 대화, 바쁜 일정과 동료들과 주고 받는 눈길 속에 까마득하게 잊혀졌다.

 

그러면서도 작전에 나가면 초년병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모든 것이 몇 마디의 명령과 손짓, 행동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실전에 익숙한 전문 군대를 보는 것 같아 내심 놀라웠다. 반복된 훈련과 언제나 곁에 있는 동료, 동고동락을 같이 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한국 군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전우애가 느껴지는 것도 신기했다. 그렇게 외인부대 생활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효도는 한국에서의 일상을 사는 삶에서 벗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고작 인생의 한 부분을 살면서도 다양한 세계의 삶과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간다는 생각에 외인부대원이 된 것에 대한 자긍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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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애묘, 40대를 위한 딴지미팅 목적으로 가입! 2018년 초 2개월간 탈퇴 후 재가입. 딴지 뇐네.
파뤼 거주
북아프리카 자주 출몰.
50 넘겨 꿈과 희망 잃은 독거노인!
잘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