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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입학식 . 교무지원팀에서 전화가 왔다. 입학생 선서를 하라신다. 까라면 까야지 .

 

옆에 나란히 여자 동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반말로. 얼굴을 가지고도 반말을 들을 있다니, 왠지 이득인 같아 반박하지 않았다그러나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게 묻는다.

 

그런데, 00년생 맞지?”

 

웃음 얼굴로 답했다.

 

뒤에 0 맞는데, 앞이 달라. 90년생이야.”

 

나도 웃고, 동기도 웃었다. 그렇다. 90년생, 올해 서른이 된 나는 19학번 불교문화학부 새내기가 되었다.

 

이제는 그래도 제법 딴지 짬을 먹은 나는 편집부의 기묘한 취미를 발견했다. 타인의 인생사에 뭐가 그리 관심이 많은지, 남의 인생사를 쪽쪽 빨아먹는 악취미가 있다. 얘기를 하자니 불편하지만, 아무래도 까라면 까는 삶을 사는 편이 대학 생활하기에도 유리하지 않나 싶어서 앞으로는 그렇게 살기로 했다.

 

지난 10년 간, 나는 고졸로 살았다.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계의, 문과 졸업생. 학교생활 동안 알바 경험 전무, 자격증 전무. 상장이라곤 뻔질나게 들락거린 도서관 죽돌이 인생 덕분에 얻은 다독왕 3관왕 뿐. 분명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럴싸한 대학에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남은 것은 2 반짜리 골방에서의 게임 폐인 생활뿐이었다. 나름대로 촉망받고 신뢰받는 인재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게담뱃값이 없어 아버지의 담배를 훔쳐 피다 귀싸대기를 맞는 일상만 남아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졸라게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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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 전만 해도 아버지께서는,

 

일단 ㅇㅇ고 들어가서 죽어라 공부 . 대학은 어떻게든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

 

라며, 확신에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나이에도 도대체 무슨 배짱이신 건지, 어디 가족들 모르게 금송아지라도 묻어두신 건지 싶었지만, 괜히 말대꾸했다가 혼날까 죽어라 공부만 했다. 목표로 하던 ㅇㅇ고에 입학했고, 2학년 초반까지는 몇몇 과목은 상위권을 다투며 괜찮은, 적어도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학) 이상의 대학은 있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게 되는 일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여름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 아버지는 중병을 얻었고, 나를 제외한 가족은 생존과 치료를 위해 이사했다. 5일을 기숙사에서 보낸 집에 돌아가면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 차디찬 냉골 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며 청소를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지만 학교도 편한 곳은 아니었다. 가지는 알고 가지는 모르는 이유로 나는은따 당했다.

 

계절이 차례 지나자 가세 기울다 못해 180도로 질펀하게 누웠고, 나에겐 모의고사 비용도 돈이 없었다. 결국 담임쌤에게 대학진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있을 없는 일이었고, 담임쌤도 꽤나 당황하셨다. 선생님 설득하려면 그럴싸한 이유와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명분으로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출가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간단히 말하자면, 길러주신 부친은 승려였고 우리 집은 절간이었다. 이것과 관련된 자세한 썰은 나중에 자세히 적을 때가 있으리라고 본다. 어쨌든, 1 때부터 장래희망으로 꾸준히 승려를 적었던 지라 담임쌤은 진심이란 걸 알고 계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담판은 쉽지 않았다. 담임쌤은 번이고 출가방법과 제도에 대해 물었고, 나는 바로바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무실을 떠나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과 표정은 아직도 기억난다.

 

빵꾼아, 후회하지 않겠니?”

 

피곤에 쩔은, 그러나 교사의 의무감이 담긴 걱정스러운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었다. 나는 대학에 너무나 가고 싶었. 근자감에서 피어오른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도 함께.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학자금 대출(당시엔 국가장학금 제도가 없었다.), 대학 교재비용, 기숙사비, 식비, 기타 생활비 돌파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판단은 틀리지 않아서, 그해 수능 원서 접수 기간 몰래 찾아본 우리 통장 수능 원서 비용만큼의 금액이 남아 있었다. 수능을 볼까 말까 고민하던 나의 마음은, 동생의 '이달 급식비를 내고 나면 다음 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이후로 깔끔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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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환경뿐 아니라, 내면적 고민도 있었다. 차마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당시엔 출가하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고 역사학자나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러나 대학진학에 필요한 비용을 어떻게든 마련하고 돌파하여 기껏 역사학과에 가더라도, 길로 업을 삼는다는 초특급 에이스조차도 쉽지 . 성적과 능력을 고려해봤을 너무나 벽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역사학자가 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되지 말자. 괜히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 하러 대학가는 따위 하지 말자

 

돌이켜 생각해봐도, 나는 역사학과나 철학과, 혹은 문예창작과가 아니라면 대학을 갔을 것이다. 며칠, 아니, 주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 타당했는지 어쩐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구들이 모두 인정하듯 뼛속까지 문과였고, 취업 준비가 아니라 학문을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좌절했.

 

대학진학을 포기한 뒤로모의고사 시간에 책을 읽었다. 학교 특유의 엘리트적 분위기 때문에(사실 전국 성적으로 따지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나 과거의 후광이 남아 있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운동 특기생조차 모의고사를 보기 위해 들어오는 교실에서 나는 유일하게, 책상 위에 대중 역사서나 일본소설을 올려놓고 시간을 때웠다.

 

물론 이걸 이해해주는 사람은 담임쌤 뿐이라서,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놈으로 쳐다봤고,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학생주임쌤은 공개적으로 나를 모욕했다. 정신머리 나간 놈이라고.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 있냐고. 당장 학교 때려치우라고. 지금의 나였다면 교무실로 찾아가 따박따박 따졌을 텐데, 그러지 못한 화장실에서 억울한 눈물만 쏟아내던 11 전과 9 전의 빵꾼이는 정말 바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으이구, 한심!

 

하나의 수시와 정시 원서도 쓰지 않은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끝났다. 역사학과를 가지 못할 거라면 어떤 대학도 가지 않겠어!’라고 결심한 현실 인식 제로의 스무살이 있었겠는가. 골방에 틀어박히는 것이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였. 큰 맘 먹고 도전했던 시급 3,500원짜리 편의점 야간 알바는 계속되는 계산 실수에 만에 짤렸고, 강인한 육체와 강인한 정신을 기를 있다며 아버지께서 보낸 노가다 현장에선 '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했다. 나를 데리고 다니셨던 사촌 형도 그건 인정했다. “빵꾼아 너는, 아무래도 잡는 일밖에 하겠다.”

 

뒤로 차례 단발성으로 일을 했다. 반도체 공장의 증설 현장에서 설비일을 적도 있었고(그나마 이때는 아재들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아서 자존감은 상승했었지만, 정말 정말 하기 싫었다), 여전히 시급 3 선인 아르바이트도 이것저것 시도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이에 군대를 다녀왔고, 게임 폐인 생활을 하기도 하며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고졸이 가질 있는 직장은 비정규직 건설 현장, 주야 2교대 공장의 단순 생산직, 폰팔이 또는 차팔이라 불리는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영업직, 서비스 유통업의 말단 사원 밖에 없단 걸 알게 되었다. 20 초반을 갈아 넣어 고작 정도의 결론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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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학력 조건에 고졸 이상이라 쓰여 있음에도 같은 놈을 뽑을만한 사장님은 없어 보였다. 체력 약해, 의지 약해, 현실 감각 제로, 스펙 쌓으려는 노력도 없는 사람을 뽑아서 어따 쓰겠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력서 내는 것조차 하지 않았.

 

그래도 마냥 버틸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눈물콧물 흘려가며 지은 담판 끝에 출가는 때려쳤다. 육체노동은 죽어도 하기 싫었고, 자신도 없어서 제외했다. 그랬더니 남는 배달부, 종업원, 편의점 자영업자 사장님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현실 감각은 안드로메다로 보낸 오래라, 그나마 로망이 조금이라도 묻어있는 카페를 택했고, 어찌어찌 24살에 꾸준히 고용보험료를 있는 직장이란 것을 가졌.

 

커피 브랜드 가맹점의 매니저로 일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혹독했다. 제대로 점심시간 없이 9시간 6 근무, 월급 120만 원, 4보험은 6개월이 지나서야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고용조건이었지만 주변의 카페 모두 고용조건은 비슷했다.

 

계약 기간은 1년이었다. 이제 들어온 신입 매니저에게 일이 계속해서 몰리는 현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악착같이 버텼다. 이력서에 1 이상 근무했다는 기록을 줄이라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는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투석환자이신 아버지와 아직 중학생인 동생이 있었다. 때는 1년짜리 이력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몰랐지만, 좌우간 뭐라도 해야 같아서 버텼다.

 

1 , 사장님이 점장 자리와 급 200 제의했지만 거절하고 나왔다. 드디어 현실 감각이란 쥐꼬리만큼 생겼는지 기술을 배워야다는 마음 뿐이었다. 당시 우리 가카, 뒤이어 제위에 오르신 영애님께서 고졸 채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직업훈련원이나 폴리텍대학이란 데를 가면 어쨌든 높은 연봉을 받으며 있을 같다는 판단이 섰다. 이미 역사학자 같은 꿈은 아주 희미해져 있었다.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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