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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카페 매니저를 그만두고, 폴리텍대학에 들어갔다. 폴리텍은 2년 전문대 과정과 1년 수료 과정으로 나뉜다. 한시가 급했던 나는 1년 과정을 택했는데, 아무래도 각오가 덜 되었던 것 같다. 그 희미한 역사학자 혹은 직업적 문돌이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나이 먹으면 4년제 대학을 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생각에 1년 과정을 택했다.

 

솔직히 말해서 1년 과정 교과 과정은 형편없었다. '컴퓨터기계과'라는 왠지 인텔리 느낌이 나는 이름이지만 정작 배우는 건 닦고 조이고 다시 기름칠하는 선반, 밀링 운용법뿐이었다. 그나마 컴퓨터스러운 것이 CNC와 머시닝센터 운용법인데, 요건 딱 자격증 취득할 정도만 알려주었다. 기술을 알려준다기에 뭔가 4차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인 줄 알았고 면접 볼 때도 그런 식으로 설명했었는데, 들어와 보니 옛날 사진에서 보던 기계들이 가득했다.

 

나의 사회적 위치를 절감할 수 있었다. 함께 들어 온 18살에서 25살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은, 한때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절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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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과정 수료 즈음이었다. 분명 입학할 때만 해도 '어떻게든 취업은 다 시켜줄 거니 취업 걱정은 하덜 말고 자격증만 열심히 따놓으라'고 하셨던 교수님이 취업상담만 하러 가면 말끝을 흐리셨다. ‘되는 대로 맞춰 가’란 말씀을 자꾸 하시기도 했다. 교수님이 말하는 ‘되는 대로' 갈 수 있는 곳은 꼭 1년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3인 이하 공장 정도였다. 아무튼 학교는 ‘고졸 채용’이란 시대적 과제에 맞게 열심히 애들을 빨아들였고, 열심히 자격증 2개를 달아줬으며, 100%의 취업률을 자랑했다. 그러나 대부분 반년 이내에 관뒀다.

 

그러니까 교수님 입장에선 한 사람이라도 취업하지 않은 수료생이 있으면 재임용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어떻게든 집어넣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꽤 개인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교수님의 전화를 무시할 수 없어 일단 취직했다. 어느 시골 자락, 50살이 넘으신 사장님과 사장님의 동생, 동생의 아내가 함께 운영하는 작은 공장이었다. CNC 한 대, 머시닝센터 한 대, 그리고 선반 밀링이 한 대씩 있었다.

 

50대 아재들 틈바구니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산천초목뿐인 곳에서, 나는 담배 피울 때마다 친구들의 페이스북을 봤다.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모조리 고향을 떠나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기름 냄새 맡으며 살아 숨 쉬는 기계로 사는 사람은 나뿐인 것만 같았다.

 

결국 한 달 만에 때려쳤다. 그 회사 입장에선 큰맘 먹고 뽑은 젊은 직원이 한 달 만에 관뒀으니 실망이 크셨을 터였다. 나는 받은 월급의 일정 금액을 교육비용을 낸다는 명분으로 돌려드렸다. 원래 없는 것들이 고상한 척은 더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스물 여섯. 원점이었다. 스무 살 때와 달라진 거라곤 자취방이 하나 생겼다는 것뿐. 당장 월세는 내야 하니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편의점 일 이야기야 뭐 다들 잘 아시는 것일 테니 생략하겠지만, 만났던 사장님들 중에 가장 좋으신 분들을 만나서 일이 꽤 즐거웠다. 때마침 카페에서 같이 근무하시던 점장님이 편의점을 차리셨고, 하루에 두 타임을 뛰어 150만 원 정도를 벌었다. 누구에게는 푼돈일지 몰라도 150만 원만 있어도 꽤 살만하더라. 저축은 못 해도 그걸로 한 달 살고 부모님께 가끔 돈도 보태드리고 동생에게 조금씩 용돈도 줄 수 있었다.

 

조금 지나자, 사장님이 되신 점장님이 점포를 맡아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망설임 없이 승낙해 편의점 점장 생활을 시작했다. 편의점 일이 쉬워 보이고, 쉬운 점도 분명 있지만 일은 일이었다. 수년간 야간 근무를 계속해서 대인 관계도 엉망이 되고(애초에 대인 관계라는 게 없지만) 건강도 많이 상했지만(애초에 자기관리 따위 하지 않지만), 좋은 사장님과 함께 일해서 스트레스가 적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낮에는 죽돌 편집장의 갈굼과 까임을 받으며 글을 쓰고, 밤에는 바코드 찍고 물건 발주하고 정리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잊고 살던 문돌이의 꿈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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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새내기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마저 하도록 하겠다.

 

투정으로 점철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나는 본디 의지가 박약하고 헛된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이라서, 스스로 개고생을 자처하고 구질구질하게 산 케이스다. 현명한 친구놈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근무 강도가 장난 아니라는 캐드 회사에서 오래 버텨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또 다른 놈은 같은 일반계 고교 고졸이었지만, 핸드폰도 팔고 차도 팔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뭔가 ‘그럴싸한’ 일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만들어가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선 많은 과정을 돌파해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지난한 과정을 온몸으로 맞서며 돌파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환경 탓도, 부모 탓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 하나쯤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떤 일자리는 목숨과 건강과 맞바꿔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근무 조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매일 9시간씩 주 6일 근무를 하며 받는 120만 원은 주휴수당은커녕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친다. 자영업 사장님들은 같은 시간으로 아르바이트를 쓰면 인건비가 훨씬 많이 나가기에, 그보다 법적 테두리가 모호하고 감시가 덜한 직원을 채용한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커피 업계에서 일할 수 없고, 미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미용실에서 일할 수 없다. 그나마 이번 정부 들어 최저임금 감시의 강화와 최저임금으로 계산한 최저월급이란 개념이 생겨서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10년간 고졸로 살면서 나에게도 사회적 안전장치가 있는지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세상이 진보하고 편해졌다 한들 우리 사회가 저소득, 저학력 청년층에게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돈이 없고 배운 게 없으면, 몸으로 때워라. 물론 안전장치는 비싸니까 못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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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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