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다. 지인과 술을 몇 잔 기울이다 사람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이야기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가난을 겪을 수밖에 없고, 성인이 되어 가난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가난했던 과거를 자꾸 되돌아보게 되며, 요새와 같은 가난의 대물림 사회에서는 평생 가난을 이고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제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제주4·3을 들을 수밖에 없고,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난다고 해도 4·3을 기억하게 되며 그 기억의 의미도 각별할 것이라는 것.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제주 출신인 나를 빗댄 거다.
그렇다. 제주 출신인 나는 어릴적부터 4·3을 들었다. 들었으나 명확히 듣지 못했다. 4·3을 이야기할 때면 어른들은 얼굴이 찌그러졌고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을 속삭였다. 그건 모두 죽음과, 죽음을 피해 다녔던 기억들이었다. 이런 구술들이 활자로 인쇄되어 있던 “이제사 말햄수다”를 읽을 땐 참담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사람이 사람에게 자행했던 일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4·3의 전후 맥락을 몰랐던 내겐 이건 당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육지 사람들’과 ‘육지 것들’의 뉘앙스는 분명 다르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이라는 의존명사에는 대상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다. 4·3 발생 직전 이승만의 비호로 세력을 이루어 제주도에 내려왔던 서북청년단과 4·3 발생 이후 무장대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됐던 토벌대. 이 ‘육지 것들’은 30만 제주 인구의 10%인 3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주가 피로 물들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육지 것들’의 (부정적)의미는 모르는 새 내게도 스며들어 공부한답시고 상경했을 때, 한 동안 사람들을 멀리했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4·3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주와 오사카 간 직항선이 생기며 상당한 수의 제주도민이 일본으로 가 일을 하고 유학을 하며 당시 사상적 유행이었던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채 제주로 돌아왔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남로당 제주도지부를 구성했고 당시 제주도당책이었던 김달삼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 무장대 역시 살상을 자행했다.(전체 희생자의 약 15%) 토벌대는 ‘육지 것들’로 이루어진 반면 무장대는 ‘제주 것들’이었다. 명분이 어떠했든 ‘제주 것들’이 ‘제주 것들’을 죽였다. 도민들은 그렇게 갈라섰다.
어머니와 외삼촌들은 일본에 유학한 본인들의 할아버지 형제들이 집안을 다 망쳐놓았다 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후 외가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가 잠시 제주에 내려왔을 때 사복 경찰들이 따라붙었던 어릴 적 외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4.3 당시 어떤 노선을 택했을지는 예상 가능하다. 나를 유난히 예뻐했던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는 그 시절 전기고문을 받으며 허벅지 살이 다 타버렸다.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노인은 평생을 그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했고, 외가 식구들은 이중의 굴레를 쓴 채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제주를 두고 ‘평화와 화해의 섬’이라고들 한다. 누가 먼저 작명했을지 모를 이 별칭은 내겐 일종의 마취제처럼 다가온다. 4·3만 해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이를 두고 평화와 화해만 강조해서 될 일인가 말이다. 가해자들을 단죄할 수는 없을지언정 피해자와 그 유족에게는 국가 차원에서 철두철미하게 배상하고 보상해야 할 것이고,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일련의 제도들을 갖추어 놓아야 한다. 여전히 야당 원내대표가 색깔론을 공공연하게 들고 나오는 현실에서 저런 법제도들을 입법화 하는 건 평화와 화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수십 년 전 폐기된 쓰레기를 주둥이로 물고 와 뱉는 저 비열한 쇼를 잠재울 수 있을 만한 정치적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글을 쓰다 분노가 밀려왔다. 위의 문단은 쓸 생각이 없었는데 머리와 손가락이 이끌었다. 이렇듯 제주 사람인 내게 4·3은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각인이다. 겪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어떤 묘함이 있다. 4·3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매해 4월 3일이 되면 착잡함이 심신을 지배한다. 여전히 ‘항쟁’이냐 ‘학살’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고, 색깔론으로 4·3의 역사적 의미를 덧칠하려는 시도들이 난립하고 있는 현실 속, 나는 아주 오랫동안 4·3에 대한 태생적 기억과 감정들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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