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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일 추천0 비추천0




[단상] 부채춤을 폐하라

2002.9.8.일요일
딴지 문화부

본 기자 한국의 밤 행사에 초청되었다. 물론 한국의 밤 행사는 국내에 초청된 외국인을 위한 행사였다. 그들에게 저녁만찬과 한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행사가 그 날의 주된 내용이었다. 독자제위도 짐작하듯 프로그램은 가야금 연주와 부채춤, 살풀이, 승무 등 흔히 "전통적이고 한국적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본 기자, 한국의 밤 행사에서 만찬을 하며 좆이 서버리는 경험을 하였다. 물론 신체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기에 발딱발딱 서버리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나 이번엔 그 기립의 대상이 부채춤이었다. 다른 외국넘들도 나와 똑같은가 살펴보니 그들은 헤벌레 웃고만 있더라. 이후 본인, 과연 본인은 변태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봉착 이 글을 딴지에 기고하는 바이다.



아아 기립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부채춤이 야기하는 성적 흥분


과연 부채춤이 머길래 본인 기립하였는가? 우선 제시할 수 있는 가설은 부채춤을 추는 걸들이 졸라 이뻤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있던 위치에선 부채춤 추는 걸들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뇬이 그뇬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본인 우선 부채와 무희의 색을 문제 삼는다. 부채의 색은 너무나도 익숙한 분홍빛이었다. 부채춤을 추는 걸들이 입고 있는 한복도 진한 주홍빛이었다. 독자들은 왜 적색 계열 색들이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지 아나? 나도 몰겄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곳은 대개 정육점 빛깔을 띈다. 아마 이것이 반복돼서 파블로프의 개마냥 본인 기립했나보다. 미안타. 본인 조금 경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또 다시 제기하는 것은 부채의 깃털이다. 십 수명이 군무로 추는 부채춤에서 주된 동작은 술이 달린 부채를 연결해서 나플나플 거리는 동작이다. 본인 절대로 페티쉬즘 환자는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페티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도 페티쉬즘일지도 모른다. 난 그녀의 어디어디가 좋다라는 말 자체가 페티쉬즘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좋으면 전체가 다 좋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페티쉬즘이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 부드러운 털을 박아넣은 부채들이 한 줄로 도열해서, 그것도 박력있게 움직이는게 아니라 남성의 심성을 간지르듯 흐르는데 어느 넘이 기립하지 않겠는가? 덧붙여 무엇보다 압권이었던 것은 부채춤의 클라이막스에서 십 수명의 무희들이 부채로 꽃을 만들어 커다랗게 회전할 때였다. 가운데 한 걸이 있고 나머지 걸들은 원을 만들어 회전한다. 그것은 거대한 분홍빛 꽃이 된다. 꽃잎들은 너풀거리고 함께 앉은 외국넘들은 기립박수를 쳐댄다. 본 기자 기립했다.


 


꽃은 여성 성기의 메타포이다. 알란 퍼커의 더 월을 떠올려 보자.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중에서 무엇보다 독자를 사로잡은 충격적인 이미지는 꽃이 빠구리 트는 장면이다. 퍼커는 왜 섹스를 표현하며 그 대상을 꽃으로 하였을까? 졸라 어렵다고? 그렇다면 단순하게 무협지를 생각해 보자. 김용의 정통 무협지 말고 대여점에서 볼 수 있었던 빛 바랜 섹스 패너지 아방가르드 무협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꽃잎이란 단어다. 촉촉한 꽃잎, 만개한 꽃잎, 분홍빛 꽃잎 등등....더 노골적인 예를 들어보자. 다음은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의 첫 소절이다. 님주신 밤에 씨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꽃은 그 자체로 여성의 성기를 은유한다. 하물며 부채춤의 거대한 꽃은 어떠한가. 그것은 은유라기 보단 직유이다. 가운데 홀로 회전하는 한쌍의 부채는 여성의 클리토리스요 주변부 회전하는 부채들은 음순이다. 더구나 그 음순들이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나긋나긋 회전하고 있었다. 오호라 그래서 본인, 부채춤에 기립 박수를 쳤구나.


 


    부채춤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그렇다. 기실 여태껏 한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예술품은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부채춤 뿐만이 아니라 그 날, 한국의 밤 행사에서 보여진 살풀이 승무, 가야금 연주도 이런 식이다. 여성적이고 하늘거리고 힘없는 것들. 순종적이고 처연하며 도대체 알 수 없는 한이라는 정서가 그간 우리네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우리네 민족적 정체성은 그런 것일까. 본인 물론 여성적인 것이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다. 여성적인 거 좋다. 감성적이고 화합적이고 얼마나 좋은 것들인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민족성을 긍정하자는거 아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런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살펴보고 왜 그런지를 체킹해보자는거다.


독자제위도 아리라 생각되지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양키넘들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을 말한다. 문제는 그것이 대개 왜곡되어 있으며 주로 동양을 빠구리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오리엔탈리즘은 양키넘이 동양을 볼 때 꼴려버린다는 것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미국의 해군사관 핑카튼이, 집이 몰락해 기녀가 된 15세의 나비아가씨와 결혼한다. 얼마 후 핑카튼은 곧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떠나버린다. 3년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재혼할 것을 권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그러던 어느날 핑카튼이 탄 배가 입항한다. 나비 부인은 그의 아들과 함께 핑카튼을 기다리는데 그는 부인 게이트를 데리고 나타난다.(이런 조카튼 경우가 있나!!) 모든 것을 알아차린 나비부인은 아들을 게이트 부인에게 맡기고 단도로 자결한다.


동양걸 졸라 착하다. 이지적이고 멋진 제복의 양키와 기녀인 신비로운 동양걸. 양키는 동양 걸을 성적으로 정복하고 졸라 무책임하게 떠나가지만 동양 걸은 그런 양키를 못 잊어 한다. 대단히 순종적인 여성의 상. 서양은 이렇게 동양을 바라본다. 이런 예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부지 기수로 볼 수 있다.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전통 복장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은 단순히 박음직한 걸로 비춰질 뿐이다.


본 기자는 부채춤과 같은 한국적 정체성에서 이런 오리엔탈리즘을 본 것이다. 마치 서양이 동양을 인식하듯 우리 스스로 우리를 여성적인, 즉 꼴려버릴만한 무언가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닌었던가. 그걸 다시 한국의 날 행사라는 이름으로 양키 넘들 앞에서, 그네들의 시각에 맞게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여기서 우리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한국은 남한을 의미하는가, 북한을 의미하는가. 또는 한국은 조선을 의미하는가 고려를 의미하는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해방 이후의 한국만을 말하는 것인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한국의 근대성이 일제 때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보다 자세한 것을 책을 봐라. 그러나 본 기자 이 책의 주장에 동조한다. 그리고 같은 의미로 지금의 우리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일본이라는 일종의 양키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일본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 하나의 거대한 타자가 식민지 국가를 바라보는 방식.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이었다. 한국을 한반도로 규정하고 국토의 모양을 토끼에 비유하고 여성을 위안부로 끌고 가는 이러한 방식들은 양키넘들이 일본을 보던 오리엔탈리즘의 변형일 뿐이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방식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부채춤이라는 것도 고래로부터 내려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제시대 최승희등이 일본 무용가의 영향을 받아 신무용운동의 일환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본인 부채춤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잔상을 보고 꼴려버리며 우리네 민족 정체성이 서구 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되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해보는 것이다.


 


    맺는 말


민족 정체성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라는 영국넘은 민족국가가 상상적 공동체라고 했다. 한마디로 지 꼴린대로 결합한게 민족국가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논리다. 민족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민족이라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현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고조선 이래 숱하게 명멸한 고대 왕조 중 어떤 것이 우리네 정통적 민족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하다못해 발해의 경우도 중국사와 한국사 속에서 애매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앤더슨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기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인들이 다른 나라 백성을 같은 민족이라고 여겼는지도 궁금하다.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가 죽일 듯이 싸우고 있는데 그 때는 더욱 심했을 지도 모른다. 어쨋든 본론으로 돌아와 현재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에 의해 모양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다.


이는 졸라 비관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본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은 민족 정체성이 단순히 꼴려있는 딱딱한 것이 아니라 발기와 수축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해면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새롭게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비단 지금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적 정체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혼성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의 축제가 우리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 다이나믹 코리아. 좋지 않은가. 80년 5월 광주도 우리의 민족 정체성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과연 누가, 어떠한 의도로, 그러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이다. 마치 일제가 한국을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했듯 6월의 축제는 졸라 열심히 일하라는 산업 경쟁력의 방식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의 아버지로 숭배되어져야 하는 무언가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아예 삐딱하게 나가서 우리가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이유도 없다. 어쩌면 이 모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서 쉽게 통제하려는 거대한 음모일 수도 있다. 정말 포스트 모던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자. 자칫 방심하다간 허무한 몽정만이 남을 뿐이다.



엉겁결에 기립했다가 민족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홍성일(hongsungil@mail.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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