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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싱] 추억의 명승부(11)
- 전설의 4인 마지막 빠따 토머스 헌스 편

2003.11.16.일요일
딴지 복싱부




목 빠지게 기사 기다리셨던 독자제위분들께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필자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업데이트가 무지 늦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해 바란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우리 선수의 세계타이틀전이 두 번 있었다. 지인진 선수는 이긴 경기를 하고도 적지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판정이 번복되는 소동 끝에 무승부로 타이틀을 가져오지 못했다. 하지만 리매치가 약정되어 있고 다시 붙는다면 지선수의 기량으로 충분히 타이틀을 딸 수 있다고 본다(며칠 전 지인진 선수와 만났었다. 너무 겸손하고 성격이 좋아 필자 감동 만빵 먹었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복싱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으면 식당과 술집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아무도 지인진 선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11월 15일 최요삼 선수의 도전전이 있었다. 중계를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작전 미스와 기량 차에 의한 완패였다. 할 말이 없다. 최 선수 너무 질책하지 말길 바란다. 갑갑하다. 언제 No챔프국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하루 빨리 지인진 선수의 재대결이 열리길 바란다.


자.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기사는 4인방 마지막 편인 토머스 헌스 편이다. 이번 회를 끝으로 4인방 시리즈는 끝난다. 앞으로는 한 선수의 일대기 형식이 아니라 이전처럼 시합 위주로 쓸 것이다. 일대기를 다루려니 내용이 너무 방대해져서 부담이 많다. 각설하고 우리 함께 토머스 헌스가 펼쳐냈었던 드라마틱한 복싱세계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흑인 빈민가의 모범소년


1958년 네바다주 멤피스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토머스 헌스는 여느 흑인 복서들과 마찬가지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날 나던 해 아버지 존 헌스는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고 이후 영영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던 어머니 로이스 헌스는 흑인 폭동을 계기로 1964년 네바다를 떠나 디트로이트에 정착하게 된다.


헌스가 살던 이스트사이트 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강력 범죄가 들끓는 전형적인 빈민굴이었다. 헌스의 어머니는 청소부, 미용실 보조 등 허드렛일을 하며 어렵게 9남매를 길렀다. 대부분의 빈민가 흑인 소년들이 범죄와 탈선의 유혹에 빠져 험난한 청소년기를 보내는데 반해 소년 헌스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모범생이었다. 홀로 9남매를 키우는 어머니의 고초를 어린 헌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크롱크짐에서 복싱을 시작할 무렵의 소년 헌스


소년시절 헌스는 기실 복싱과는 거리가 먼 유순한 아이였다. 키가 커서 어릴 적부터 농구선수가 되려고 노력했었는데 문제는 헌스의 큰 키였다. 큰 키로 인해 헌스는 주위 스트리트 파이터들의 표적이 되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복싱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어머니는 유순하고 착하기만 한 큰 아들이(헌스 위로 누이가 둘 아래로 3남 3녀가 있었다) 사람을 패는 과격한 운동을 하려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헌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고 1970년 디트로이트 시내의 킹솔로몬 바티스타 교회의 복싱팀에 들어가게 된다. 20세기를 빛낼 위대한 복서의 첫걸음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1974년 자신을 지도했던 코치가 팀을 떠나자 헌스는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기 위해 좀 더 큰 체육관을 찾게 된다. 바로 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그 이름도 유명한 크롱크짐 레크레이션센터였고 헌스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스승 엠마뉴엘 스튜어트와 조우하게 된다.


"토미를 처음 본 건 킹솔로몬 바티스타 교회에서였다. 복싱을 배운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너무 키가 커서 토미가 11살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큰 키에 비해 몸은 매우 가냘퍼 체중은 겨우 25Kg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열의가 넘쳤고 강단있어 보였다."


                                                - 엠마뉴엘 스튜어트



  출발은 미약하였으나...


밴텀급으로 데뷔한 헌스는 데뷔 6전까지 2승 4패를 기록할 정도로 부진한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스튜어트의 지도를 받고 숨겨진 재능이 빛을 발하면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크롱크로 옮긴 첫 해 주니어올림픽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감을 얻은 헌스는 서서히 기량이 향상되면서 미시간주 일대에서 가장 강한 아마복서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75년 AAU 라이트급 결승에서 아론 프라이어를 만나 선전했지만 아쉬운 판정패로 물러났고 이어진 76년 몬트리얼 올림픽 라이트급 미국 대표 선발전 결승에서 하워드 데이비스를 만나 한 차례 다운을 뺏는 등 분전했으나 판정패,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다(후일 데이비스는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키가 더 자란 헌스는 라이트웰터급으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라이트급에 비해 선수층이 얇았던 라이트웰터급은 헌스의 독무대였다. 같은 체급의 슈거 레이 레너드는 몬트리얼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잠시 복싱과 멀어진 상태여서 헌스는 마땅한 라이벌 없이 라이트웰터급 무대를 평정하게 된다. AAU, 골든글러브 등 굵직굵직한 대회를 모두 휩쓴 헌스는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아마추어에 미련을 버리고 77년 11월 프로로 전향하게 된다.



  솜방망이에서 슬러거로


아마추어시절 헌스는 155승 중 KO나 RSC는 12회에 불과할 정도로 솜방망이였다. 그러나 프로로 데뷔 후 체격이 완성되면서 파워가 붙기 시작한 헌스는 연전 연KO승을 거두며 무서운 슬러거로 변신하게 된다.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프로 데뷔전에서 제롬 힐을 2회 KO로 박살내며 첫 승을 신고한 헌스는 데뷔전을 포함 17연속 KO승을 기록하며 주가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절 헌스의 전적은 다소 거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튜어트가 헌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철저히 약체 선수들과 매치업을 시켰기 때문이다. 2전 째의 제리 스트릭랜드는 7승 24패 1무, 4전 째의 안소니 하우스는 3연속 KO패 후의 시합이었고 6전 째의 빌리 굿윈의 전적은 13승 20패 2무로 데뷔 초엽 헌스의 상대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대부분이었다.


78년 중엽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주() 챔피언급들과 주먹을 섞기 시작한다. 이즈음 헌스는 스튜어트의 지도 아래 레프트잽과 라이트스트레이트가 더욱 정교해지면서 나날이 실력이 업그레이드되기 시작한다. 펜실바니아주 챔피언이었던 지미 로스웰을 1라운드에, 텍사스주 챔피언 라울 아기레를 3라운드에 일축한 헌스는 동년 8월 WBA 8위에 랭크된 강타자 에디 마르셀을 맞아 2라운드 들어 깨끗한 라이트 더블로 KO승을 거두고 비로소 세계 랭킹에 진입했고 레너드와 싸운 적이 있던 브루스 핀치 역시 3라운드에 정리하고 기세를 올린다.


핀치전을 통해 Hit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헌스는 78년 10월 WBC 웰터급 3위에 랭크되어 있던 페드로 로하스와 격돌, 1회 KO승을 거두고 WBC 랭킹 7위로 부상한다. 당시 이 경기를 지켜본 명트레이너 안젤로 던디는 "향후 웰터급은 레너드와 헌스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그 예언이 실현되는 데는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79년에 접어들어서도 헌스의 연승행진은 멈출 줄 몰랐다. 1월 13일 호세 나폴레스, 앙헬 에스파다, 피피노 쿠에바스 등 세 명의 세계 챔피언에게 도전해 물러난 바 있던 캐나다의 노병 클라이드 그레이를 맞아 그레이의 힘에 밀려 시종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그레이의 눈부상에 의한 출혈로 10라운드 TKO로 힘겨운 승리를 거두게 된다(훗날 헌스는 자신의 복싱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합으로 그레이전을 꼽았다).  


그레이전 이후 두 번의 KO승을 더 보태 연속 KO기록을 17로 늘린 헌스는 18전 째 한 번의 판정을 경험했지만 19전 째 윌프레도 베니테스, 피피노 쿠에바스 등과 싸운 이력이 있던 백인 터프가이 해롤드 웨스턴을 맞아 6회 부상 TKO승을 거두면서(웨스턴은 이 경기를 끝으로 링을 떠난다) 다시 KO퍼레이드에 가속을 붙여 레너드의 타이틀에 도전한 바 있던 만년 세계 랭커 브루스 커리를(3회 KO승) 비롯 호세 피구에로아(3회 KO승), 우리 김상현 선수에게 패한바 있던 태국의 괴물 사엔삭 무앙수린(3회 KO승) 등을 꺾으며 5번의 KO승을 추가한다.
 






헌스 VS 브루스 커리 주요장면








헌스 VS 호세 피구에로아 주요장면



5연속 KO승 이후 79년 마지막 경기가 된 마이크 콜버트전에서 다시 판정승을 기록한 이후 80년을 맞이한 헌스는 전 세계 챔피언 앙헬 에스파다(4회 KO승)를 꺾고 USBA 웰터급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5월에는 역시 전 세계 챔피언 에디 가소를 1회에 셧아웃시키며 대망의 WBA 웰터급 타이틀에 도전하게 된다. 챔피언은 그 유명한 멕시코의 턱분쇄기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였다.






헌즈 VS 앙헬 에스파다 주요장면



  Motor City Cobra VS Joe Breaker


이 무렵 헌스는 몇 개의 재미있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자동차의 고장 디트로이트 출신에 장신에 긴 리치를 이용한 경기스타일로 인해 명명된 Motor City Cobra와 브루스 핀치전의 강렬한 KO씬으로 인해 얻게 된 The Hitman이었다.


정작 헌스는 Hitman이라는 별명을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저격수, 암살자라는 뜻 이외에 살인강도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까지는 Hitman이라는 링네임보다 주로 Motor City Cobra로 불리워졌으며 후에 Hitman으로 부르는 팬들이 많아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쿠에바스를 기억하는 올드 복싱팬이 상당히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76년 7월 푸에르토리코의 앙헬 에스파다를 2회 TKO로 때려잡고 WBA 웰터급을 타이틀을 거머쥔 쿠에바스는 11명의 도전자 중 10명을 종료 공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으며 그 중 두 명의 턱뼈를 으깨어버린 전력이 있던 해머펀치의 소유자였다.









쿠에바스의 턱에 헌스의 스트레이트가 터지고 있다!


경기 전 예상은 28연승(26KO)가도를 달리던 헌스의 8 : 5 우세였다. 쿠에바스가 비록 강력한 챔피언이긴 하지만 헌스의 기세가 욱일승천이었고 신체조건 및 스타일상 헌스의 우세가 예견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8월 2일. 디트로이트 조 루이스 아레나에선 세계타이틀 트리플헤더가 열리기로 되어있었고 메인이벤트인 헌스VS쿠에바스전은 맨 마지막에 배정되어 있었다. 먼저 열린 두 번의 타이틀전에서 일본의 우에하라 야쓰쓰네는 사무엘 세라뇨에게 통렬한 6회 역전 KO승을 거두는 이변을 일으키며 WBA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했고 헌스와 동문인 힐머 켄티는 우리나라의 오영호를 맞이하여 9회 TKO승을 거두며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다.


레너드VS두란전이 세계대전으로 불리워지며 프로모트 된 것을 패러디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미있는 캐치프레이즈로 개최된 헌스와 쿠에바스의 타이틀전은 너무도 허무한 헌스의 일방통행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궁극의 2대8 가르마에 특유의 무표정으로 링에 오른 쿠에바스는 헌스의 잽과 라이트스트레이트에 막혀 주먹 한 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하다 채 6분을 견디지 못하고 허무하게 낙마하고 만다.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던 챔피언의 처절한 몰락이었다. KO왕은 KO로 무너진다는 복싱계의 속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쿠에바스는 상대성 측면에서 헌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헌스는 단신의 인파이터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쿠에바스는 어떻게 하든 인파이팅을 펼치려고 시도했지만 헌스의 스피드와 13.5cm의 리치 차이는 도무지 넘기 힘든 벽이었다.
 






헌스 VS 쿠에바스 주요장면



링에 오르기 전 무하마드 알리는 헌스에게 잽과 원투를 위주로 히트 앤 어웨이 전법으로 임하라고 충고했고 헌스는 대선배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며 일방적인 승리를 이끌어 낸다. 경기 후 헌스는 알리와 동석한 기자회견에서


"나는 어떤 스포츠를 했더라도 성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리 선배의 충고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알리 선배의 충고대로 시합했더니 그냥 경기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시합 전 쿠에바스는 나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링슈즈에 신경 쓰는가 하면 플로어쪽에 눈을 돌리기도 하고 계속 아래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승리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웰터급 타이틀 획득은 내 목표의 1/4에 불과하다. 나는 앞으로 주니어미들, 미들에 이어 라이트헤비급까지 손에 넣겠다"


라며 사자후를 터뜨렸고 타이틀을 뺏긴 쿠에바스는


"완패다. 처음에 헌스가 탐색전으로 나올 줄 알았다. 백-어웨이 전법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초반부터 대쉬해 들어와서 당혹스러웠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강한 레프트잽을 허용했는데 그때부터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루이스 프리메라를 6회 KO로 보내고 1차 방어에 성공한 헌스는 랜디 실즈를 맞아 다소 루즈한 경기 끝에 힘겹게 13회 부상 TKO승을 거두고 2차 방어를 마쳤으며 81년 6월 25일 레너드와의 통합전에 앞서 파블로 바예스를 맞아 4라운드 라이트 스트레이트 일발 녹아웃을 거두고 최종 점검을 마치게 된다.


휴스턴에서 열린 바예스전은 레너드VS칼루에전과 함께 더블 헤더로 개최되었으며 두 경기 모두 국내에 녹화 중계되었는데 아마 헌스의 시합 중 최초로 국내에 녹화중계 된 시합으로 기억한다. 경기 후 헌스는 "이 시합을 레너드전에 튠-업하려는 생각은 없다. 바예스의 맷집은 매우 강했다. 레너드는 바예스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 안에 쓰러뜨릴 자신이 있다"며 라이벌인 레너드의 신경을 자극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바예스전을 통해 성능점검을 완료한 헌스는 숙원이던 레너드와의 꿈의 통합전에 나서게 된다. 지난 번 기사에서 자세히 다루었듯이 헌스는 초반 포인트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경기 후반 레너드의 불꽃 연타에 무릎을 꿇으며 생애 최초의 패배를 맛보게 된다.









레너드 VS 헌스 1차전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꼭 레너드에게 복수하고 싶다


레너드에 패한 후 헌스는 레너드와의 재전을 추진하는 한편 주니어미들급으로 전향을 노리며 3개월 후 어니 싱글태리를 재기전 상대로 맞이하게 된다. 싱글태리는 로베르토 두란이 재기 상대로 택했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한 적이 있는 네임 밸류에 비해 꽤나 실속 있는 선수였다. 헌스는 화끈한 시합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경쾌한 아웃복싱으로 너끈한 판정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한다. 이 경기 역시 MBC에서 녹화중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레너드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주니어미들급으로 무대를 옮긴 헌스는 지명 도전자의 자격으로 82년 12월 3일 3체급 제패에 빛나는 전파탐지기 윌프레도 베니테스가 가진 WBC 수퍼웰터급 타이틀 사냥에 나서게 된다. 이 무렵 헌스와 해글러와의 대전설이 몇 차례 오가곤 했지만 양측간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성사되지 않고 있던 차였는데 돈 킹은 200만 달러의 파이트머니를 보장하며 먼저 베니테스와 싸울 것을 권유했고 집도 절도(타이틀) 없던 헌스는 돈 킹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베니테스는 "인기가 바닥인 수퍼웰터급 타이틀은 조만간 반납하고 해글러의 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하겠다. 헌스를 물리치고 나서 곧바로 실행에 옮길 것"이라며 자신의 승리를 예언했고 헌스 역시 "나는 이번 경기에 한 손만 써먹겠다. 나머지 한 손은 다음 경기 때 써먹을 생각이다"며 호언장담.


레너드에게 웰터급 타이틀을 뺏긴 이후 체급을 올려 모리스 호프를 그림 같은 완빤찌 KO로 날려버리고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당시의 베니테스는 로베르토 두란마저 판정으로 제압해 잔뜩 기세가 올라있던 상태였다.


현지 도박사들과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베니테스의 근소한 우세를 예상하고 있었다.


첫째, 헌스는 레너드전 이후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어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헌스는 왼쪽 가드가 떨어지고 목이 길어 라이트훅에 걸리면 직빵이다. 이는 레너드전을 통해 입증되었으며 라이트훅을 피니쉬로 장전하고 있는 베니테스의 좋은 표적이 될 것이다.


셋째, 헌스는 펀치를 구사한 후 회수하는 동작에서 턱이 들리는데 눈이 좋은 베니테스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조건에서 헌스가 훨씬 유리하며 펀치력과 스피드면에서도 베니테스에게 꿀릴 것이 없다며 헌스 우세론을 펼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뉴올리안스 슈퍼돔에서 벌어진 이 시합은 두 선수의 네임밸류에 비해 다소 루즈한 편이었다. 각각 한 번씩 슬립성 다운을 주고받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불꽃 튀는 스파크는 일지 않았으며 후반 주도권을 장악했던 헌스의 판정승이었다.


146 : 136, 144 : 139, 142 : 142의 2 : 0 판정이 나왔는데 4라운드에 당한 헌스의 감점을 감안한다면(감점 선언이 조금 과하긴 했지만) 10점차, 5점차 채점은 헌스의 인기에 편승한 어거지 채점이라고 생각되며 필자의 채점은 2점차 헌스의 승리. 이 경기보다 차라리 언더카드로 열렸던 윌프레도 고메스와 과달 루페 핀토르의 수퍼밴텀급 타이틀전이 훨씬 밀도 높은 명승부였다.
 






헌스 VS 베니테스전 1R~5R 주요장면
(베니테스의 주특기. 눈싸움을 다시 감상해보시라)








헌스 VS 베니테스전 6R~10R 주요장면








헌스 VS 베니테스전 11R~15R 주요장면



머레이 서덜랜드(후에 박종팔과도 싸우게 된다)와 루이지 민칠로를 맞아 모두 판정승에 그치자 일각에서는 헌스의 주먹에 문제가 생겼다는 루머가 돌게 된다. 그러나 84년 6월에 벌어진 3차 방어전에서 헌스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적인 전투력을 선보이며 로베르토 두란을 2회 KO로 잠재우고 세간의 의혹을 말끔히 씻어버린다. 두란 생애 최초의 KO패였다(레너드전의 TKO패는 넉아웃이 아니었으므로).  
 






헌스 VS 두란 주요장면



경기 전 "나는 무조건 이긴다. 도박사들은 무조건 나한테 걸어야 한다"며 큰소리를 치던 헌스는 자신에게 걸었던 도박사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공대지 미사일을 연상케 하는 무시무시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수 차례 두란의 안면에 꽂아 넣으며 자신의 복싱인생에서 가장 멋진 KO씬을 연출한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 라이브로 방송된 이 시합을 보면서 필자는 완전히 헌스에게 매혹되고 만다.









두란을 2라운드에 손보다!


두란전을 승리로 이끈 헌스는 한차례의 방어전을 더 치른 후 85년 4월 미들급의 독재자 마빈 해글러에게 도전하나 비참한 3라운드 KO로 물러나 두 번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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