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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19) - 궁예·왕건 2탄

2003.10.5.일요일
딴지 역사부



 



궁예의 일생을 텍스트에 나오는 대로 모조리 디비다간 날 샌다. 글고 별달리 시비 걸 건덕지도 없는 거까정 주절대서 뭐하겠나. 그러니 몇 토막만 지져보자.



  방방 잘도 뜨는 궁예, 그 궁예를 더 띄워줘야 할 이유


선종(善宗)이란 스님이 되신 궁예,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뭘 물고 있다가 바리때【】(스님이 쓰는 밥그릇) 속에 떨어뜨렸단다. 그게 뭔가 봤더니 아첨【牙籤】(점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가지)인데, 거기에 왕()자가 쓰여 있더란다.


자신만땅되신 우리 궁예, 세달사에서 겨나와 진성여왕 5년(891)에 죽주의 기훤(箕萱) 밑에 드간다. 그치만 기훤이 업신여기자 이듬해 북원의 양길(梁吉) 밑으로 옮긴다. 양길에게 인정을 받은 궁예는 그 뒤 방방 뜨며 연전연승한다. 이 무렵 그에 대해 『삼국사기』에선 일케 쓰고 있다.


사졸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고 공평무사하니, 이에 무리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衆心畏愛 推爲將軍】.


오옷∼ 궁예도 이 땐 상태가 괜찮았네. 지난 1탄에서 말했었다. 요 부분에선 어쩔 수 없이 궁예를 띄워줘야 한다고. 그래야 그 무렵 궁예 부하로 들어간 왕건의 체면이 선다. 궁예가 개판 치고 있을 때 부하가 되었다면 꼬라지가 사납다. 『삼국사기』에서 궁예를 추켜세운 유일한 대목이다.



  궁예, 계속 스님이셨을까?









<태조 왕건>에선 궁예의 팔자가 펴지면서 복장이 UP~되지만 계속 스님으로 나온다.


그럼 말이다. 절에서 내려온 뒤에도 궁예는 계속 스님이었을까? <태조 왕건>을 보면 줄창 스님이었던 걸로 나오던데... 『삼국사기』에선 스님이 된 뒤에도 궁예는 계속 법명인 선종으로 나오고, 『고려사』에선 시종 궁예으로 나온다. 근데 스님이었다면 쫌 이상치 않았을까. 스님이 책사(策士)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신다?


화랑도(花郞徒)에도 스님이 계셨듯이 군대에 스님이 계셨다 해서 이상할 것 한탱아리도 없다. 뭐 지금도 군승(軍僧)이 있쟎은가. 그치만 스님이 장군 또는 지휘관? 임진왜란 때 승병도 아닌데 아무래도 어색하다. 글타고 아직은 기훤이나 양길의 부하였던 처지에 미륵불을 자처할 처지도 아니다. 혹시 절에서 내려온 이후 궁예는 더 이상 스님이 아녔던 건 아닐까. 그러다 나중에 정권을 잡고서야 미륵불을 자처하며 다시 승복을 입었다고 볼 순 없을까. 텍스트에 나오는 담과 같은 대목을 봐도 글타.


(911년) 선종이 미륵불을 자칭하며 머리에는 금책(金 -모자)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승복)을 입고, 첫째 아들을 청광보살, 둘째 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였다【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궁예가 절에서 겨나온 뒤 방포, 즉 승복을 입었단 말은 요기서 첨 나온다. 정권 잡은 지 11년째 되는 해다. 뭐 그 전에도 불자(佛子)였을 순 있겠지만 스님 행세를 하진 않았으리란 거다. 그러다 팔자가 늘어지자 미륵불 행세를 하며 그 때 다시 승복을 입은 건 아녔을까.


 
  지역감정에 호소하다


지역감정이 망국병이라지만 왜 없어지지 않는가. 약빨이 먹히기 때문이다. 선거철에 표 주워담는 데 그만한 보약이 없다. 옛날이라고 다를소냐. 901년 궁예는 왕을 자칭하며 담처럼 말한다.


옛날에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했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이 황폐해져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


궁예가 신라계가 아닌 고구려계란 설도 있다. 하긴, 견훤도 신라계가 아니라 백제계란 설도 있지. 견훤도 후백제 세울 때 담처럼 지역감정에 호소한다.


신라의 김유신이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며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완산에 도읍하였는데, 어찌 감히 의자왕의 울분을 씻지 아니하랴.


2백 몇 십 년 전 일을 새삼스레 들춰내서 지역감정을 부추긴다. 새로운 나라를 세워 신라를 때려잡을 만한 명분으로는 이 이상 왓따가 없다. 사람들 끌어 모아 나라를 일으키자면 뭔 짓인들 못하겠는가. 돗자리라도 그랬을 것 같다만, 참으로 질기디 질긴 지역감정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쫌 씁쓸하네.



  궁예는 RESET 증후군 환자?


궁예가 나라를 세운 때는 894년(『삼국사기』)이라고도 하고 896년(『고려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왕건 일가가 궁예에게 와서 붙는다. 타이밍 끝내준다. 왕건이 궁예의 부하가 되었을 땐 적어도 도적떼는 아녔다고 하고 싶은갑다.


근데... 궁예 말이다, 국호(國號)와 연호(年號)를 넘 자주 바꾸신다. 함 보시라(이도학,『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 350쪽을 보고 베꼈다).




































국호


연호


기간


연대


고려(高麗)


?


3년


901∼903년


마진(摩震)


무태(武泰)


1년


904∼905년


"


성책(聖冊)


6년


905∼910년


태봉(泰封)


수덕만세(水德萬歲)


3년


911∼914년


"


정개(政開)


5년


914∼918년



요건 후대의 조작이 아닌 듯 싶은데... 재위 20여 년(894 or 896∼918) 동안 국호를 3번, 연호를 4번 바꿨다면 쫌 문제가 있다. 이거 거의 RESET 증후군 수준 아닌가. "에이∼ 다시 할래" 란 거 말이다(RESET 증후군은 흔히 청소년들의 자살의 원인으로 많이 들먹인다만...). 뭐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거야 나쁠 거 없지만, 저런 거 한번 바꾸면 힘도 돈도 엄청 든다. 회사 로고 하나 바꿔도 비용이 장난 아니라던데... 대빵이야 말 한마디 툭 내던지면 끝이지만 쫄따구들은 죽어난다.



  부석사 벽화의 신라왕에게 칼질을 하다


자, 암튼 왕건이 궁예의 부하가 되었으니 이제 궁예 조지는 일만 남았다. 우선 첫 빠따로 나오는 게 궁예가 지 아빠 화상(畵像)을 칼로 쳤다는 얘기다. 텍스트는 담과 같다.


(궁예가) 일찍이 남쪽을 순행하여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嘗南巡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拔?]劍擊之 其刃迹猶在】.


근데 말이다. <태조 왕건>에선 요 대목이 어케 나오냐면... 격이 좀 가물거리긴 하지만... 궁예가 아마 벽화에다 칼을 박았던 거 같다. 그랬더니... 피가 주루룩 흐르더구만. 허허... 명색이 역사 드라마인데 텍스트에도 없는 내용을 <여고괴담> 수준으로 맹글어 붙이는 건 좀 글터구만.


글고 그 벽화의 쥔공이 헌안왕이었다고들 하는데... 혹시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요 부분 땜시 글케들 알고 있는 건 아닌지.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자식으로서, 왕이 그의 5월 5일 생()함을 미워하여 기()하였더니, 궁예가 이를 원()하여 기병토적(起兵討賊)하여 신라를 멸()하려 하여, 모사(某寺)에서 벽에 그린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


대체 선생님께선 뭔 자료를 보셨는지 모르겠다.『삼국사기』엔 부석사라고 나오는데 왜 어떤 절【某寺】이라 하셨으며, 신라왕상이라 나오는데 왜 헌안왕의 상이라고 하셨는지 궁금하다. 선생님은 궁예의 아빠가 헌안왕이라고 확신하신 듯 하다.


사실 벽화의 쥔공이 헌안왕이든 경문왕이든, 아니면 뉘신지 모르는 신라왕이든 문제될 거 없다. 어차피 신라에 칼끝을 겨누기로 한 판국에 아무 신라왕이면 그만이지 꼭 지 아빠여야만 칼질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맞은 벽화의 쥔공이 헌안왕이라 한들 그게 궁예의 아빠가 헌안왕이란 증거는 되지 못한다.



  신채호 선생의 궁예 사랑









단재 신채호 선생님


사실 단재 선생님, 텍스트 분석에 철저하신 분은 아니다. 글고 민족주의사관을 외치시다 보니 지금으로 봐선 좀 오바스런 점도 있다. 그치만 조국이 주권을 빼앗긴 판에 텍스트가 뭔 개뿔이고 오바좀 한들 어떠랴. 그저 독립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뭔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돗자리, 선생님을 존경하는 맘 여전하다. 물론 해방된 지 60년을 코앞에 둔 지금도 그 분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답습하잔 뜻은 아니다.


암튼 단재 선생님은 궁예의 출생 얘기를 꾸며진 걸로 보신다. 그래서 "세달사 중에 1개 걸승(乞僧)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황궁(新羅皇宮)의 왕자를 만듦인가 한다"고 하셨다. 또 설사 궁예가 정말 버림받은 헌안왕의 아들이었다 해도 지 아빠 벽화에 칼질한 거 별 문제 아니라고 하신다.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 낙지(落地)하던 날 누상(樓上)에서 죽으라고 던진 날부터 부()라는 명의(名義)가 끊어졌나니, 궁예가 헌안왕의 본신(本身)에 칼질하여도 시부(弑父)의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왕의 능도(陵都)를 유린할지라도 모조(侮祖)의 논()이 될 것 없으려든, 하물며 왕의 등신(等身)을 치며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이 되리오오마는, 고대(古代)의 협애(狹隘)한 윤리관으로는 그 양사(兩事)-헌안왕의 상()과 신라국에 대한 불공(不恭)으로만 하여도, 궁예가 죽어도 죄가 남을지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불가하였으랴.


결국 요 얘기도 궁예를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몰고 가려는 왕건 또는 사가(史家)의 윤색으로 보고 계시다. 이 점이 못마땅하셨는지 단재 선생님께선 손수 <일목대왕(一目大王)의 철퇴(鐵槌)>란 소설까지 지으셨다. 돗자리, 이 소설 못 읽어봤기에 그 개요를 딴 책에서 보고 베낀다.


단재가 그린 궁예는 통설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한 군왕이 아니다. 또한 단재는 궁예 부부의 금실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부인의 말을 경청하여 정사를 보는 데 활용하고, 자신의 부인을 석가의 부인 아유타에 비교하여 부를 정도로 사랑했다고 묘사하여 전혀 다른 궁예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이재범, 『슬픈 궁예』, 35쪽).


소설이라는데 뭘 우짜겠나. 그럼 궁예의 막판 모습은 어떻게 그리셨을지 궁금타만, 아쉽게도 이 소설은 미완성이라 그 부분이 없단다. 쩝∼



  사치의 궁극 철원성?


궁예는 896년 철원에 도읍했다가 897년 송악으로 천도했고, 다시 905년 철원으로 환도한다. 이 때 철원에 들어가 관궐(觀闕)과 누대(樓臺)를 세웠는데【修葺】, 매우 사치스러웠단다【窮奢極侈】. 젠장, 표현도 기깔나다. 사치의 궁극이라니 말이다. 돗자리 눈으로 못 봤으니 뭐라 할 말 없다만... 돗자리가 갖고 있는『삼국사기』를 역주(譯註)하신 이병도 선생님께선 요 대목 밑에다 일케 각주를 달아놓으셨네.


전일 필자가 철원 북면 풍천원에 있는 그 구지(舊址)를 답사한 일이 있었는데, 그 성지(城址)·궁지(宮址)라든가 기타 유적을 보았을 때 과연 그 규모가 굉장하고 사치스러웠던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이병도 역주,『삼국사기』하, 을유문화사, 1996, 489쪽).


규모가 크면 사치스럽다? 이병도 선생님 재주도 좋으시다. 옛터를 보면 규모야 알 수 있겠지만 어케 사치스러웠는지도 알 수 있을까. 하긴 판독이 어려운 비문(碑文)도 꿈속에서 읽어내신 분이니 이 정도야....


뭐 정말 사치스러웠을 수도 있겠지만, 돗자리『고려사』편찬자 말 그대로 못 믿는다. 견훤에 대한 담과 같은 설명 땜시 글타.


견훤은 처를 많이 얻어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뻔뻔시럽다. 부인 많이 얻어 알라 많이 둔 걸로 따지면 왕건이 단연 No.1 아닌가. 『고려사』열전 <후비(后妃)>를 보면 부인이 29명 나온다. 부인 많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들 태조가 그럴진대 "견훤이 처를 많이 얻어"라고 쓴 게 쫌 글탄 거다.


뭔 소린가. 같은 현상을 놓고도 조지겠다 맘먹으면 별 소리가 다 나온단 거다(허걱∼ 글고 보니 돗자리도 지금 왕건 조지고 있네). 만약 요새 새롭게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궁궐터가 발굴되었다 치자. 근데 그 터의 규모가 대단하다면,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강력한 왕권과 강대한 국력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예사 아닌가. 거기서 사치네 향락이네 민중의 고통이네 들먹이는 거 별로 보고들은 적 없다. 궁예가 검소했단 말 아니다. 돗자리가 그걸 어케 아나. 다만, 같은 현상을 놓고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 경향이 쫌 글탄 거다.



  궁예, 본격적으로 난타당하다


철원성을 사치의 궁극이라 쓴 건 궁예를 조지기 위한 서곡에 불과하다. 이제 궁예는 무방비 상태에서 난타당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내용을 간딴시럽게 <표>로 정리하면 담과 같다.


































연대


『삼국사기』 열전 <궁예>


『고려사』세가 <태조>


905년(효공왕 9년)


▷철원성에 들어가 관궐(觀闕)과 누대(樓臺)를 수리했는데 매우 사치스러움.


▷신라를 병탄할 뜻을 품고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했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을 모두 베어 죽임.


▷철원으로 수도를 다시 옮김.


906년(효공왕 10년)


 


▷신라를 병탄할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했으며, 신라에서 투항해 오는 사람을 모두 베어 죽임.


911년(효공왕 15년)


▷미륵불을 자칭하며 금책을쓰고 방포(方袍)를 입었음.


▷승려 석총을 철퇴로 때려죽임.


 


914년(신덕왕 3년)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여 장수나 정승으로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임.


▷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을 알아낼 수있다고 하며, 걸리면 불에달군 쇠방망이로 음부를 찔러 죽임.


915년(신덕왕 4년)


▷부인 강씨가 간언(諫言)을하자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쑤셔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임.


▷보좌관/장수/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는 사람이 많으니, 부양/철원 일대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디지 못함.


 


918년(경명왕 2년)


▷왕창근의 거울 사건이 일어남.


▷왕건이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음.


▷왕창근의 거울 사건이 일어남.


▷왕건이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음.



905년부터 시작된 궁예의 악행은 점차 그 정도를 더해간다. 심지어 신라에서 투항해 오는 넘들까정 모조리 죽였단다【自新羅來附者 皆誅殺】. 예로부터 항자불살(降者不殺)이라 했는데 말이다. 이거 정말 의문스럽다. 투항해 오는 넘들까정 싸그리 죽였다면 이거 정말 제정신 박혔다고 볼 수 없다(『고려사』를 보면,  하나만 써도 될텐데 아예  해놓았네. 모조리+싸그리라고 해서 그 잔인성을 강조한 거다. 『삼국사기』에선 으로 나온다. 뭐 깡그리 정도 되겠다).



  궁예의 폭정... 그 때 왕건은 뭐 하셨나









안대 땜시 궁예의 시계 확보가 어려운 쪽에서 꼬나보는 왕건의 눈초리와 잔머리가 매섭다~


913년 왕건의 관등은 파진찬에 이르고 시중(侍中)에 임명된다. 그래서 그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 되었지만, 원래 이것은 왕건이 바라던 바가 아니요 또 참소를 두려워해서 그 지위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정부에 출입하고 국정을 논의할 때면 언제나 감정을 억누르고 조심했다는구만(『고려사』).


시중은 요새로 치자면 국무총리쯤 되시겠다. 말하자면 국무총리께서 복지부동(伏地不動)하셨단 거다. 이미 궁예의 폭정이 한창인 마당에 국무총리께서 복지부동 하신다. 목숨을 건 간언(諫言) 그런 거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거 사실 돗자리가 뭐라 욕할 처지 못된다.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해? 그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차라리 비위 맞추며 간신이 되고 말지... 돗자리같은 쫌생이 절대 못한다.


그래도 말이다. 왕건은 영웅이요 위인 아니가. 어떤 직분을 맡았다면 권한과 더불어 책임도 있는 거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국무총리라는 자리 허깨비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국민화합 차원에서 농수산부 장관과 더불어 호남출신 인사들이 임명되는 그런 자리였다. 그 같은 역사적 전통을 개무시하고 대쪽총리께서 대통령과 맞장뜨시다 장렬히 산화하셨던 거다. 하지만 글키 때문에 우린 당시 대쪽총리를 존경했고 그 이전 역대 국무총리들을 껍데기뿐인 허접으로 봤던 거다. 그럼 왕건은 어느 유형인가. 뻔하다.


물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그래도 우리 역사에선 죽을 줄 알면서도 직언을 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분들이 여럿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우리는 충신으로 우러른다. 적어도 왕건은 그 반열에는 오르지 못한다.


『고려사』를 보면 시중을 맡았을 때 왕건은 그리 달가와하지 않는다. 모함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서다【畏讒不樂居位【. 그래서 외방(外方)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太祖懼禍及復求결국 궁예는 그 청탁을 들어준다. 직언 할 용기가 없었다면 차선책으로나마 처신은 제대로 한 셈이다.



  궁예 폭정의 하이라이트... 부인 강씨를 화형시키다


궁예의 폭정 시리즈는 조기 위의 <표>를 보시면 대충 이해가 되실 거다. 스님 석총을 철퇴로 때려죽이고, 신하와 백성들을 마구 잡아댄다. 그래서 민심이 궁예로부터 후∼울쩍 떠나간다는 스토리다.


요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부인 강씨를 화형시키는 장면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915년 궁예의 부인 강씨(康氏)가 남편의 악행을 보다 못해 정색을 하고 직언을 한다. 그러자 궁예, 난데없이 부인한테 "너 딴 넘이랑 간통했지?"라며 몰아붙인다. 부인이 펄쩍 뛰니, 지는 신통력으로 볼 수 있단다. 그 유명한 관심법(觀心法)의 등장이다. 글고나서 부인을 처형하는데, 방법이 디따 엽기적이다. 쇠몽둥이를 불에 달궈서 그걸로 지 부인의 음부를 쑤셔 죽인다【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이것도 화형이라면 화형인 셈이다. 전신(全身) 화형보다 더 끔찍스럽네.







근데 『고려사』의 내용은 쫌 다르다. 강씨 부인이란 말은 없고, 관심법을 써서 부녀(婦女)들의 음사(陰私)를 알아내 3척 짜리 쇠몽둥이를 불에 달구어 음부를 찔러 죽였단다. 그랬더니 코와 입에서까지 연기가 나오더란다【遂鍛造三尺鐵杵 有欲殺者 輒熱之以撞其陰 烟出口鼻死】. 뜨파...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내용을 절묘하게 합성시킨 얘기도 있다(근데... <태조 왕건>에선 김혜리씨가 강씨 부인으로 나왔었지? 알라 때부터 왕건 최수종씨랑 연인이었는데, 궁예 땜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련의 쥔공... 설마 이게 사료에 나오는 얘기라고 믿진 않으셨겠지?).


이쯤이면 이제 궁예는 짐승이다. 그래도 못미더워 마지막 끝내기펀치 한방∼ 두 아들도 죽여버린다【及其兩兒】. 이걸로 궁예의 윤리성은 게임셋이다. 빼도 박도 못하고 궁예는 미친 짐승이 된다.



  신심(臣心)+민심(民心)+군심(軍心), 뭐가 빠졌나?


자∼ 이제 궁예를 쫓아내도 괜찮은, 아니 궁예를 쫓아내야 마땅한 명분을 차곡차곡 챙겨놓았다. 신하와 백성은 물론 부인과 자식까정 죽여대는 군주를 냅두면 안되쟎은가. 그럼 궁예에게서 떠나간 신심(臣心)과 민심(民心)이 뉘한테로 돌아가나. 뻔하지. 왕건이다. 궁예의 인기 하강과 짝하여 왕건의 인기는 상승한다. 다음 기록처럼 말이다.


(913년) 군문(軍門)의 장교(將校)/종실(宗室)/원훈(元勳)들과 지혜 있고 학식 있는 무리들이 모두 태조에게 쏠려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려사』)


(914년) 이 해에 남방에 기근이 들어 각지에 도적이 일어나고 위수(衛戍) 병졸들은 다 나물에 콩을 반쯤 섞어 먹으면서 겨우 지냈다. 태조는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구원하였는데 그 덕으로 다 살수가 있었다(『고려사』.)


아하∼ 빼먹을 뻔했다. 위 기록을 보니 쿠데타 성공의 핵심인 군심(軍心)도 왕건 편이구나. 이쯤 되면 뒤집어엎어도 된다. 근데 왠지 아직도 목마르다. 오라∼ 천심(天心)이 빠졌구나. 그래서 너절한 사건을 꾸며댄다. 그 명칭도 거창한 왕창근 거울사건이다. 이거 담번에 디벼보자.



덧붙여,
이번으로 <궁예·왕건편> 끝내려 했는데 일이 꼬여 글케 못한 점 죄송스럽다. 암튼 담번으로 한국인물열전 쫑난다. 근데 먹고사느라 쫌 늦어질 거 같다. 지둘려주시라. 막판까지 질질 끄누나.



딴지 역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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