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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두한 바로보기, 야인시대 똥침놓기

2003.10.2.목요일
딴지 문화부


요즘 어지간한 포털사이트 지식검색에서 찾아보면, "두환형님은 일본패거리들에 맞서 종로상권을 지켜냈슴다. 독립군이나 다름없슴다"느니, "두환형님 없었으면 지금 우린 죄다 공산주의만세 부르고 있을거다 시바들아"느니 하는 삼식스러운 청소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두환형님"은 전씨성 쓰는 30만원 재력가가 아닌, 의송(義松) 김두한(金斗漢)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야인시대라는 생구라 드라마를 통해 간만에 다시금 대중의 우상으로 각인된 이름 되겠다.


물론,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허구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때때로 그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제주 4.3사건이 빨갱이들의 체제전복 음모로 회귀(?)하고, 김성수가 독립투사로 둔갑하며, 이정재 부하들에게 린치를 당해 반병신이 된 시라소니가 복수를 위해 돌아오고, 유지광이 임화수보다도 동대문사단 내에서 더 영향력있는 존재였던 양 그려져도, 그게 쉽사리 진실인양 받아들여지고 만다. 그게 시청자들 잘못이겠나? 공중파 TV방송의 파급력이 그토록 막강한 탓이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극화한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극적 재미를 위해 상상력이 동원되는 건 좋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의 명예와 실제 사건이 갖는 의의 등을 고려해 가급적 사실관계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온당하다. 야인시대가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사실관계를 크게, 그리고 상당히 안이한 방식으로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김두한이라는, 그러잖아도 꽤나 잘 알려진 인물의 생애를 극화함에 있어서 심각한 왜곡을 자행함으로써 단단히 무리수를 둔 거다. 그나마 그 왜곡의 폭이 지엽적인 사안들에 국한됐으면 좋았게. 김두한이란 인물을 규정하는 키워드를 통째로 바꿔놓을 만큼 심각하니 그게 문제란 말이다(뭐 태조 왕건이나 왕초 같은 드라마들도 그런 범주에 포함되지만 일단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그리하야, 그러므로, 그런 전차로, 드라마가 애써 외면한 김두한이란 인물의 실체에 좀더 가깝게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드라마의 감상적인 삘에 도취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몰아부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행여나 김두한의 생애를 완전히 학습했노라고 착각하는 일일랑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뻔한 얘기들이지만, 그래도 그런 뜻에서 한번 시시콜콜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해 보고자 한다.
 


 우미관 시절









김무옥(오른쪽)과 함께한 김두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독립 운동이지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 운동이야. 우리는 거리의 독립군이 될 수 있어." 야인시대에서 만주로 떠나겠다는 김두한을 쌍칼이 부득부득 붙잡으며 남긴 말이란다. 실제로 김두한의 주먹패는 당시 충무로, 명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 주축의 하야시 패거리에 맞서 종로통을 지켜냈으니, 딴에는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역씨 두환이형님이군여! 독립군 김두환 짱짱짱!"을 외치는 삼식스러운 독자가 있을까봐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그거, 그래봤자 결국 깡패들 나와바리 싸움에 불과한 거다. 만약 그게 독립운동이라면, 김두한패들이 종로 상인들한테 삥뜯고 다닌 건 독립운동자금 마련의 일환인가? 삥뜯는 장면은 드라마에 없었다고? 그럼 걔네들이 폼나게 양복 차려입고, 심심하면 맥주나 마시러 다니는 돈은 다 어디서 났을까? 땅파서?


당시 종로 상인들이 "어차피 뜯길 바에야 하야시보다는 조선인 김두한이 낫다"는 생각에서 김두한을 더 지지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김두한패의 부당한 갈취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렷다. 사실 목소리큰 김두한도 이 대목에 대해서는 의외로 그리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오히려 김두한은 이른바 장충단 대혈투사건(장충단공원에서 김두한패 몇명과 하야시패 수십명이 한판 붙었다는...) 이후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셨더랬다고 스스로 실토하기까지 했다. 1969년, 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 노변야화에 출연한 김두한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원칙적으로 따지면 주먹으로는 내가 이긴 거예요. 대접상 형님 동생 할 뿐이지."라고 강조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하야시로부터 매달 용돈조로 꽤 큰 돈을 받으며 형님으로 대접했음을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김두한의 어릴 적 친구이자, 당시 하야시패의 일원이었던 김동회(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이일재가 연기한 바로 그 캐릭터)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두한은 자전거포 영업권을 하야시로부터 넘겨받는 조건으로 사실상 하야시패에 흡수됐다고까지 한다. 물론 김동회가 당시 하야시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겠지만, 어쨌거나 김두한이 하야시패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본인 형사나 헌병, 깡패 등을 걸리는 족족 혼내주고 다녔다는 당시 김두한의 항일적인 행적은 뭔데? 그건 다분히 "일본놈이 꼴보기 싫으니 깨부셔주겠다"는 식의 개인감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청계천 수표교 밑에서 거지노릇을 하며 성장기를 보냈다(광교였다는 설도 있는데, 하긴 그 일대에서 거쳐보지 않은 다리가 있었겠는가). 당시 청계천은 조선인 거주구역과 일본인 거주구역을 가르는 경계선이었으니, 끊임없이 영역확장을 노리는 일본인 폭력배들에 맞서 주먹으로 자신의 몸을 건사해야 했음은 자연스러운 노릇. 청년시절의 김두한이 유난히 일본인 폭력배들과 두드러진 대결구도를 형성한 데에는 이 시절 체득한 생존요령이 상당부분 작용했을 거다. 그나마 장충단 사건 이후 김두한은 굳이 일본인 패거리를 자극하지 않았다.


영화 장군의 아들 이후로 하야시란 인물의 이미지는 김두한 필생의 라이벌인양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지만, 하야시의 실제 위상은 종로의 김두한과 우호적으로 공생한 명동의 오야붕 정도로 규정되어야 옳겠다. 참고로 하야시도 실은 선우영빈이라는 본명을 가진 조선인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저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오야붕 시절의 김두한이 각별한 민족의식에 입각해 행동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독립군 장군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김두한의 내면에 각별히 자리잡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개인적인 자긍심 이상의 수준으로 승화시켰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그러나 역시 흔히 간과되곤 하는) 사항은, 당시의 김두한에 대해서는 항일협객이라는 이미지 외에 한국 조폭의 원조라는 평가 또한 엄존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김두한은 전에 없이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전 구마적, 신마적, 쌍칼 등이 분할하고 있던 종로상권을 통일한 데 그치지 않고, 영등포, 마포 등지를 속속 접수하며 방대한 조직을 형성한 것이다(야인시대에서 꽃동네 새동네 원정을 다니며 각 지역의 보스들을 주로 한방씩에 잠재우던 장면, 기억나나?). 이런 조직을 잡음없이 꾸려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과 위계질서는 필수불가결한 노릇. 시커먼 양복 바깥으로 허연 와이셔츠깃 내놓고 머리에는 포마드로 떡칠한 애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반듯하게 절을 하는 광경, 거의 김두한 시절에서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김두한이 의리있는 풍류남아였다는 주장에는 별로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그건 객관적인 검증의 영역을 벗어나는 대목이므로. 하지만, 조폭이 독립군이다... 드라마 주인공을 최대한 멋있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기에도 저 두 단어 사이의 괴리는 너무나 커 보인다. 거리의 독립군이라는, 터무니없도록 멋진 표현을 생각해낸 작가님께 경의를 표한다. 음핫핫.
 


 해방공간에서의 활동


김두한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 이 때만큼 논란이 뜨거운 시기도 없다. 과연 김두한 본인은 당시 자신의 위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말년의 김두한은 당시의 자신을 백색 테러리스트라 즐겨 호칭했다고 한다. 그냥 테러도 아니고 백색테러라.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우익의 편에 서서 수많은 테러를 자행했(으며, 그로써 나름대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음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의미 되겠다. 최근 김두한 저서전이란 제목으로 복간되기도 한, 1963년에 초판이 간행된 김두한 회고록의 원래 제목이 뭔줄 아나?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다! 섬찟도 하여라.


아닌 게 아니라 김두한은 기껏해야 3년밖에 안되는 이 피로 물들인 시기에 유난히 큰 애착을 갖고, 더러는 허풍도 섞어가며 일장 회고담을 늘어놓곤 했다고 한다. 아마 김두한은 스스로를 일본에 맞서 싸운 협객으로서보다는 빨갱이 척결에 앞장선 백색 테러리스트로 인식했고, 그것을 더 자랑스러워했던 모양이다. 1946년 이후 김두한이 이끈 대한민주청년동맹(줄여서 대한민청)이 좌익세력을 상대로 자행한 테러행위는 이루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대한민청은 수백회에 달하는 테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와중에 죽마고우인 정진영(어떤 문헌에는 그의 본명이 정진용이라고 나와 있기도 한데, 여기선 일단 널리 알려진 이름으로 쓰도록 하자)을 죽이기도 했는데, 확실한 것은 드라마에서처럼 정진영을 폼나게 죽인 것은 아니란 거다. 정진영은 대한민청 본부에서 쇠파이프(혹은 몽둥이)로 집단구타당해 죽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나마 김두한이 죽인 사람이 정진영 뿐이었다면 다행이겠지. 김두한이 회고록에서 자랑처럼 밝힌 바에 의하면, 대한민청이 이즈음 죽인 후 철로에 내다버림으로써 열차사고로 위장한 시신만도 72구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좌익계열의 간부이거나 노조관계자들이었다. 사고로 위장해 처리한 시신만 그 정도라면 땅에 파묻거나, 불태우거나, 외딴 곳에 유기하는 식으로 처리한 시신이 얼마나 많았을지는... 김두한 본인도 가늠조차 하지 못할 거다.


특히 1946년 6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을 진압한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 되겠다. 당시 3천여명에 달하는 대한민청 대원들은 실습용 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용산 철도노동자 파업현장에 난입, 순식간에 노동자들을 제압한 후 핵심간부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철도가 파업중이었으므로 이 시신들은 하수도에 묻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철도파업은 물론, 전평이 기획중이던 전국규모의 총파업 시나리오에도 상당한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당시 좌익에서는 경찰보다도 대한민청을 더욱 두려워했다는데, 그 말이 실감나는 대목 되겠다.


골때리는 건, 이처럼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김두한이 1952년(1954년이라는 설도 있다)에는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이란 직함을 달며 노동운동가 행세를 하게 된다는 거다. 김두한은 노변야화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대한노총 최고위원장이라는데 있어서 현재 노동조합이라고 하는 것을 해방직후에 전평 노동조합을 전부 때려부시고 대한노총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한테 넘겨줬다가 6.25사변때 제가 이제 받드는 걸 받아서 했는데요. 그때 한국 노동자 47만여명의 인상임금을 4배 5배 6배로 올려주겠다고 한게 한국노동조합에 저밖에 없습니다.


...김두한 나름대로의 노동운동관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31세때의 김두한


어쨌거나 김두한의 그 모든 테러는 좌익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로 자행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두한은 이정재 이전 최대의 정치깡패였던 셈이다. 오히려 학살규모나 수법의 잔인함에 초점을 맞춘다면, 김두한의 죄질은 이정재의 그것보다 훨씬 악랄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김두한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죽인 놈과 한패인 빨갱이들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절대악이었으므로, 그가 자신의 굳은 신념에 따라 행동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장군의 아들의 손에 묻힌 헛된 피가 씻겨지진 않을 터.


그나마 우익진영은, 최고의 행동대장 김두한에게 더 이상의 별다른 보상을 해주지도 않았다. 1947년 미군정에 의해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김두한은 정부수립 직후 사면되어 풀려나긴 하지만, 이승만으로부터 칭찬은 커녕 "사람 좀 그만 죽이게"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김두한은 이승만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두한은 자유당에 입당하기도 했지만, 정작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해 3대 민의원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다(결과는 당선).


일제시대 주먹세계에서 보스로 군림했던 김두한은, 해방공간에서는 손을 피로 온통 물들여가며 우익에 헌신했건만 결국 우익에게 이용만 당한 졸개신세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김두한 본인은 이 시절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지만, 안타깝게도 백색 테러리스트 김두한의 모습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아있다.
 


 정치인 김두한


1954년, 김두한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자신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정치깡패란 수식어를 정치인으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이후 구속, 자유당 재입당, 사사오입 개헌 후 다시 탈당, …종내는 저 유명한 국회 오물투척사건에 이르기까지, 김두한의 정치역정은 짧지만 참으로 독특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체포되는 진기록(그것도 두차례나)을 남긴 것도 그러하거니와, 첫 당선은 무소속으로, 두번째 당선은 한독당이란 군소정당 소속으로 달성하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대중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정치인으로서 김두한은 주먹세계 보스 시절이나 테러리스트 시절에 비해 초라했다. 다시 말해, 김두한이 정계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나름대로의 정의감은 여전해서 문제의 오물투척사건도 일으켰고, 이정재가 주도한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당시 경비책임자로서 야당 정치인들의 안전을 지켜주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가 국회에서 수행한 역할은 빨갱이 때려잡던 장군의 아들이 의원석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 외에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 물론 빼먹어서는 안될 인상적인 순간은 있다. 김두한 정치생명의 클라이맥스이자 종말이기도 했던 오물투척사건. 야인시대 마지막회를 장식한 이 장면 역시 꽤나 구라스럽게 연출되어 있다. 드라마에서는 김두한이 그 똥물을 순국선열들의 혼이 서린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퍼낸 것으로 나오지만, 그 똥물의 실제 출처는 김두한의 집 화장실이었단다. 드라마에서처럼 김대중의원의 질의 도중 비장한 표정으로 오물통을 들고 들어간 것도 아니고, 회의 초반부터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당시 사회를 보고 있던 이상철 부의장과 한바탕 협박성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음날 그는 곧바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는데, 당시 김두한의 수행비서였던 채원기씨가 2002년 스포츠서울에 증언한 바에 의하면 제출당시 김두한은 아버지에게 추서된 건국공로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고 한다. 부정한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은 행동 자체는 속시원했지만(잘한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조금은 어설픈 쇼맨십도 개입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김두한. 거리의 독립군이 되기에는 그 생활방식이 너무나 졸렬했고, 낭만협객이 되기에는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서울 종로구(혹은 용산구) 국회의원이라는 막강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지위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계산적이지 못했고, 영원한 보스로 기억되기에는 주먹세계에서 물러난 이후 행적이 너무도 초라했다. 그럼에도 그는 죽은지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장군의 아들이란 멋들어진 닉네임과 함께 희대의 풍운아로 기억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삶의 궤적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젊은날의 김두한은 비록 뒷골목 깡패였을지언정 조직의 당당한 보스였다. 중년 이후의 김두한은 제도권에서 국회의원이라는 대단한 명예를 얻었지만, 그곳에서 그가 연출한 인상적인 순간이란 기껏해야 국회에서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은 것뿐이다. 55년이란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걸쳐 이렇듯 대단한 인생역정(혹은, 인생역전?)을 겪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일진대, 거기에 우리 현대사의 격랑이 정확히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는 화려한 이력에 비해 개인적인 치부를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삶이 신화로 격상되는 것도 사실 이상한 노릇은 아니다.


하지만 신화는 굴절되고 왜곡될수록 그 생명력만 단축될 따름. 김두한은 스스로도 거리의 독립군을 자처한 바 없거늘 오늘날엔 엉뚱하게 독립투사의 이미지로 회자되고 있으며, 그가 좌익척결의 미명하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수십년간 이땅을 지배해온 반공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숨은 채 설렁설렁 간과되어 온 가운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깡패에서 국회의원이 된 독립군 장군의 아들이란, 표면에 드러난 사항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신화화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거기에 불필요한 껍질을 씌우는 행위는 대중에게는 기만이요, 고인에게는 결례일 뿐이다.



여인천하에서 맨날 칼들고 나무뒤에 서있던 박상민이
끝내 야인시대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까운
안전빵(comblind@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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