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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10)-고주몽 3탄

2003.7.5.토요일
딴지 역사부



 


 주몽, 드뎌 조촐하게나마 고구려를 세우다


외할아버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주몽 일행, 즉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는 모둔곡이란 곳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난다. 삼베옷[麻衣], 누비옷[衲衣],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던 이들의 이름은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란다. 주몽은 이들에게 각각 극씨(克氏),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少室氏)를 붙여준다. 이들을 꼬드겨 일행에 합류시킨 주몽은 졸본천 비류수 위쪽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기로 한다. 그치만 아직 궁성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위쪽에 대충 집을 짓고 뭉갠다. 이어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붙인 뒤 자기 성도 고()로 바꿨단다(『삼국사기』). 글고나서 풀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자리를 대충 정한다【之上 略定君臣之位】(『동명왕편』,『세종실록지리지』).


참으로 조촐하구나. 말이 좋아 건국이지 깨놓고 보면 주몽파 결성 정도 된다(여태껏 나온 사람들은 주몽+오이, 마리, 협보+재사, 무골, 묵거=7명 되신다. 달랑 7명이서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계시겠지...). 당시 도읍한 장소에 대해선 이런저런 얘기가 많으나 골치만 아프니 머 대충 넘어가자.
 


 고주몽인가 해주몽인가


근데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주몽의 성()에 대해서다. 지난번 게시판에서 주몽의 성이 원래 해였단 지적이 나왔다. 노예의꿈님(캬~ 멋쥔 아디다)의 칼같은 주장의 한 대목이다.


돗자리님은 주몽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고 했는데 고구려 왕조의 세보를 볼 때 5대 모본왕 때까지 해씨였으므로 해모수의 자손이 맞으며 이것은 백제에 와서도 초기에는 해씨였다가 부여씨로 바뀐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지적이 나온 배경은, 돗자리가 주몽의 아빠를 해모수가 아닌 금와왕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주몽도 성이 해였으니 아빠가 해모수였단 주장에 대해 돗자리는 담처럼 물같은 의견을 밝혔다.


주몽이 해씨였다고 해서 해모수의 아들로 보는 것에 대해선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해모수가 해씨였다면 해부루도 해씨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해부루의 양자인 금와도 해금와로 봐야겠죠. 결국 아빠가 해모수이든 해금와이든 주몽의 성은 해씨가 됩니다. 주몽의 성이 해씨였다 해도 그것이 아빠가 해모수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아직까정은 주몽의 아빠를 해모수로 보는 게 대세다. 방안에 갇힌 유화에게 하늘의 해모수가 햇빛을 쏴서 임신시켰다는 절묘한 해석도 있다. 아예 해모수가 아빠라고 나오는 기록도 있다【父解慕漱母柳花】(『제왕운기』). 주몽의 성이 해라고 쓴 자료도 있는데, 아마도 해모수를 아빠로 본 듯 하다【本姓解也】(『삼국사기』).


뭐 고주몽이 아니라 해주몽이라도 돗자리 암 상관없다. 왕건이 정말 왕씨였는지도 의심스러운 판에 그거 뭐 대수겠나. 물론 이거 가벼운 문제 아니다. 주몽이 정말 고씨였다면, 노예의꿈님의 지적처럼 왜 그 후손들이 해씨인지 설명되지 않는다(성과 씨가 어케 다른지의 문제는 일단 하염없이 미루자. 그 용례가 뒤죽박죽이라 글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주몽 얘기에서는 성과 씨가 같은 걸로 나온다).
 


 비류국왕 송양의 어설픈 등장


고구려를 세웠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저런 시련과 도전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일케 나온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어느날 비류수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채소잎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이야 취사를 못하지만, 옛날엔 놀러가서 계곡물에 쌀 씻는데 깻잎이 떠내려오면, "아, 위쪽에서 언넘들이 삼겹살 궈먹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쟎은가. 그래서 주몽은 사냥을 하며 상류로 올라가니 거기 비류국(沸流國)이 있더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주몽을 맞으며 대화를 나눈다.


송양 : 내가 바다 구석진 곳에 짱박혀 있어 군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일케 만나게 되니 다행이구려. 근데 댁은 어디서 왔소.


주몽 : 난 천제의 아들이오. 어디어디에 나라를 세웠수다.   


송양 : (뜨바 … 천제의 아들이라네) 근데 요긴 땅이 좁아 왕이 둘일 수 없소. 댁이 나보나 늦게 나라를 세웠으니 내게 붙는 게 어떻겠소.


열받은 주몽, 송양과 첨에는 말빨로 싸우고【鬪辯】, 담에는 활쏘기로 겨뤄 떡을 맹글었다. 종목 잘못 고른 송양, 결국 주몽에게 항복하고 비류국은 고구려에 병합된다. 주몽이 나라를 세운 지 2년째 되는 해 일어난 일이다.


『동명왕편』과『세종실록지리지』엔 좀 달리 나온다. 거꾸로 비류왕 송양이 사냥을 나왔다가 주몽을 보고 대화를 나눈다.


송양 : 내가 바다 모퉁이에 쳐박혀 있어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일케 만나니 다행이구려. 근데 댁은 누구며 어디서 왔소?


주몽 : 난 천제의 자손이고 서국(西國)의 왕이요. 감히 묻건대, 댁은 누구의 뒤를 이었소?


송양 : (허걱~ 천제의 자손... 꿀리면 안되겠다) 난 선인(仙人)의 자손이며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었소. 여긴 땅이 좁으니 왕이 둘일 수 없소. 그대가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었으니 내게 붙으시오.


주몽 : 난 하늘의 뒤를 이었고, 댁은 신()의 혈통도 아니면서 왕이라 하니, 내게 붙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끝장낼 거요.


얼빵한 송양, 주몽이 말할 때마다 천제의 자손이라 하는데, 그게 정말일까 긴가민가 한다. 그래서 주몽의 재주를 시험해보려고 활쏘기로 겨루자고 한다. 이런 띠리, 왜 하필 활쏘기냐. 승부는 송양의 완패로 끝난다. 그치만 『삼국사기』에서처럼 이 때 송양이 바로 항복하진 않는다. 서로 세력이 비까비까해서 걍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지낸다.


근데 주몽은 아직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해 남들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케 불평한다. "내가 나라를 새로 세워 아직 북과 뿔나팔【鼓角】이 없어 위엄을 갖추지 못하니 비류국 사신들이 날 만만하게 본다." 허~ 북하고 뿔나팔이야 짐승 잡아 가죽 벗기고 뿔 뽑아서 맹글면 땡인데 왜 이러시나. 그거 맹글 재주 가진 넘도 아직 고구려엔 없었단 말인갑다. 그래서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비류국에 가서 그 나라 북과 뿔나팔을 뽀리쳐온다. 이젠 도둑질까정 하는구나.  


송양이 가만 있겠는가. 누가 쌔벼갔는지 뻔하지만, 글타고 증거도 없이 "느그들이 훔쳐갔지?" 따질 수도 없다. 결국 송양이 주몽을 찾아오는데, 이 때 북과 뿔나팔의 빛깔을 어둡게 해서 마치 헌 것처럼 꾸몄다. 그걸 보고 송양이 정말 몰랐겠냐만, 따질 처지도 아녔다. 이제 다시 두 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근데 송양 이 친구, 암만 생각해도 분했던지 다시 주몽에게 제안한다. 늦게 세워진 나라가 먼저 세워진 나라 밑으로 들어와 붙자고 말이다. 그러자 주몽은 서둘러 궁실을 짓는데, 썪은 나무로 기둥을 맹글어 마치 천년쯤 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부실자재로 날림공사를 해댄 거다. 띨빵한 송양, 이번에게 이걸 보고선 아무말 못하고 걍 돌아간다. 연전연패다.


근데 주몽도 송양의 비류국이 계속 맘에 걸렸나보다. 그치만 물리칠 만한 군사력이 아직 없으니 어쩌랴. 그래서 짜낸 방법이... 참으로 비교육적이다.『제왕운기』에는 일케 실려 있다.


비류국왕 송양은 누가 먼저 나라를 세웠느냐를 갖고 주몽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자 주몽은 큰 비를 오게 해서 [비류국을] 떠내려가게 하니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충성을 다했다.


큰 비를 오게 해? 즉, 비류국에 홍수가 나게 했단 말인데, 주몽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가? 없다. 그럼 어케 큰 비를 오게 했나. 하늘을 우러러 호소? 아니다. 호소가 아니라 협박한 거다. 뭘 믿고 협박을 해? 인질극, 아니 사람이 아닌 사슴을 납치해 녹질극(鹿質劇)을 벌인 거다(『동명왕편』, 『세종실록지리지』). 간땡이 큰 거 하난 알아줘야 한다.


주몽은 사냥을 나갔다가 흰사슴을 사로잡는다. 흰사슴, 이거 영물(靈物)이다. 그 사슴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윽박지른다. "하늘이 비를 내려 비류국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면 너 안놔준다. 살고프면 니가 하늘에 징징대 바바." 불쌍한 사슴, 슬피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7일 동안 장대비가 내린다. 글고 비류국의 도읍은 물에 푹 잠긴다.



흰사슴... 염소 아니다.


그 흰사슴, 하늘에서도 무척 애끼는 놈였나부다. 그걸 미끼로 협상을 하다니... 이거 유괴범, 아니 납치범하고 뭐 밸 차이 없쟎은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인데 어떠냐고? 그러지 말자. 희멀건한 사슴이 거꾸로 매달려 꺼이꺼이 울어대니 얼마나 애처럽냐. 하긴 주몽은 사슴 사냥 전문가였다. 부여에 있던 시절, 금와왕과 왕자들과 사냥을 나가면 수두룩 잡아제끼던 게 사슴 아녔던가. 암튼 하늘과 맞짱뜨는 주몽의 깡다구가 놀라울 뿐이다. 지가 정말 천제의 자손이였다면 왜 굳이 이런 납치극을 벌였을까.


비류국이 물에 푹 잠기자 주몽이 갈대로 꼰 새끼줄을 물에 가로질러 놓으니 백성들이 그 새끼줄을 잡고 목숨들을 건진다. 그럼 이 때 주몽은 물 위를 어케 댕겼냐고? 오리말(鴨馬)를 타고 댕기셨단다. 오리말이라, 절묘하기도 하다. 수륙양용마(水陸兩用馬)란 얘긴데... 어케 교배를 시켰을까(이따가 기린말도 나온다. 얘는 날라댕긴다). 암튼 송양은 주몽에게 "YOU WIN!"을 외친다. 흐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주몽은 물에 채찍을 내리친다. 그러자 물이 곧 줄어든다. 글고 비류국은 주몽이 접수한다.


홍수 얘기가 없는 『삼국사기』를 보면 활쏘기에서 진 송양이 여름 6월에 항복했다고 나온다. 음력으로 여름 6월이라면 딱 장마철이다. 정말로 비류국이 홍수 땜시 아작이 났고, 피해를 덜 입은 고구려가 그 틈을 타 꿀꺽 삼킨 건 아녔을까. 왜 고구려는 멀쩡했냐고? 내가 어케 아냐(돗자리 초딩 때 동대문야구장 갔는데, 3루측 관중석엔 비가 오고 1루측 관중석은 멀쩡한 적도 있었다. 반대였던가?).
 


 다물(多勿)... 대체 왜 다물인가?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하자, 주몽은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그 곳 우두머리로 삼았다【以其地爲多勿都】. 고구려 말에 되찾은 옛땅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거란다【麗語謂復舊土爲多勿】.


왜 비류국을 다물, 즉 되찾은 옛땅이라 불렀을까. 주몽 지가 왜 그 땅을 되찾았다고 하나. 지가 언제 잃어버렸었나. 언젠가 말했다. 땅은 빼앗긴 넘만 있지 빼앗은 넘이 없다. 빼앗긴 넘은 모두 억울하다 하고, 빼앗은 넘은 모두 정당하다 한다.









동명왕릉


근데 지금도 다물을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 만주땅 되찾자는 분들이다. 그걸 어케 되찾냐.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첫째, 돈주고 산다. 둘째, 힘으로 뺏는다. 누구한테? 누구긴... 중국이다. 그게... 가능허냐. 기술이나 제품, 자본이나 문화 등으로 중국을 정복하자면 달리 할 말 없다. 거 좋은 일이지 머. 그치만 땅 되찾을 생각은 하지 말자. 큰일난다(예전엔 다물학회란 것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김태영님의 민족미래소설 『다물』도 잼나게 읽었던 격이 난다. 저자랑 생각은 다르지만, 한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하늘에서 왕궁까지 지어주네...


송양을 꺾은 뒤 자신감을 얻은 주몽은 이제 왕궁을 짓는다. 라이벌이 없어지니 그만큼 여유가 생겼단 뜻이다. 그 공사를 언제 시작했는가에 대해선 이런저런 얘기가 많다(『삼국사기』-4년, 『해동이적』-3년, 『동국통감제강』-24년). 『삼국사기』를 보면, "4년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빛깔을 분간할 수 없었다. 가을 7월에 성곽을 세우고 궁실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근데 딴 기록에선 하늘이 왕궁을 지어줬다고 나온다(『동명왕편』,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해동이적』).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산을 뒤덮었는데, 거기서 마치 수천 명이 공사를 벌이는 듯한 소리가 요란히 나더란다. 그 소리를 듣고 주몽은 "하늘이 나를 위해 성을 쌓고 있구나" 하더란다. 7일만에 먹구름이 걷히자, 과연 성곽과 궁실이 이미 다 지어져 있더라네.
 


 주몽, 40살 팔팔한 나이에 "세상을 뜨다"


재위한 지 19년째 되던 해, 40살의 한창 나이에 주몽은 세상을 뜬다(『해동이적』에서만 119살이라고 나온다). "세상을 뜬다"고 한 건, 꼭 죽었단 뜻이 아니다. 죽었단 얘기(『삼국사기』)도 있고 하늘로 올라갔단 얘기(『동명왕편』,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해동이적』)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애매하게 쓴 거다.


근데 말이다. 바로 이 해 4월 유리가 엄마 예씨(禮氏)와 함께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그랬더니 주몽이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단다. 그리고 9월에 죽는다(『삼국사기』). 뭔가 이상치 않은가. 40살이면 정말 팔팔할 땐데, 부인과 아들까정 와서 좋아하다 왜 죽어? 사인(死因)이 나와 있지 않으니 더 의심스럽다.









전설상의 동물 기린


그럼 하늘로 올라갔단 얘기들을 살펴보자. 어케 올라갔을까. 별 설명 없이 걍 올라갔다고도【昇天】나오고(『동명왕편』, 『세종실록지리지』), 구름수레()를 타고 올라갔다고도 한다(『제왕운기』). 주몽이 평소 동굴에서 기르던 기린말(麒麟馬)을 타고 올라갔단 얘기도 있네(『해동이적』). 오리말에 이어 기린말이라... 재주도 좋다(참고로... 이 기린은 목이 긴 그 기린 아니다. 용 비슷하게 생긴 전설상의 짐승이다).


『광개토호태왕비』를 보면, 하늘에서 황룡이 내려오니 주몽이 그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나온다(판독에 따라 황룡에 업혀 올라갔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새겨넣은 비석에 글케 나와? 그럼 혹시... 무덤이... 없었단 뜻인가? 『삼국사기』를 보면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주몽이 남긴 옥채찍(玉鞭)을 갖고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거 좀 수상쩍다. 대체 시신이 있었단 말인가 없었단 말인가.


글타면 지금 평양 근교에 있는 동명왕릉은 또 뭔가. 평양으로 천도한 건 장수왕 때 아녔나. 그때 시조묘도 이장했나. 뭔가 궁금한데 찾긴 귀찮을 때 쓰는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니 일케 나온다.


평양시 중심에서 약 25㎞ 떨어진 력포구역에 소재하고 있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릉(국보 18호)은 원래 진파리 10호 무덤으로 불렸으나 김일성 주석이 이를 동명왕릉으로 확인해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는 왕관, 보료 등 1백여점의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그 동안 동명왕릉의 관리를 위해 개축공사를 추진, 1993년 5월 14일 준공식을 가진 바 있다.


에고고... 이것도 수령님 작품인가. 그 양반 안건드린 게 없구나(딴 건 잘 몰라도, 1970년대 이후 북한 역사학계의 수준은 정말 눈물겹다. 수령님의 교시가 떨어지면 거기에 맞춰 학자들의 연구가 이뤄진다). 아님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이장을 했나. 모를 일이다. 직접 무덤을 함 파봤으면 좋겠다만.
 


 이런 얘기도 있다-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의 갈등과 대립


주몽이 세상을 떴으니 이 글 여기서 땡쳐도 된다. 그치만 좀 맘에 걸린다. 이복형제인 유리와 비류, 온조 때문에 글타. 이런 얘기도 있다. 주몽이 첨부터 고구려를 세운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빌붙어 있다가 그 나라를 차지하고 그 이름을 고구려로 바꿨단 거다. 간만에 기록을 직접 읽어보자(번역은 을유문화사판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했다).


A. (주몽은)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도망해 왔다.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 그 아내를 삼게 했다. 얼마 있다가 왕이 죽으니 주몽이 그 자리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또는 주몽이 졸본에 와서 건너편 고을【越郡】의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아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갔는데,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백제본기」).


B.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 아버지는 우태(優台)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비류요 둘째아들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2월에 남쪼으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많았기 때문에 주몽의 총애가 특히 두터웠고,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처럼 대우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해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가산을 기울여 도와 방업(邦業)을 이룩해 그 노고가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는 유류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가 여기 있으면 혹처럼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골라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백제본기」).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서로 다른 텍스트가 있을 때마나 그랬지만, 이번에도 돗자리 새대가리 뽀솨진다. 뭐 학술논문도 아니니 걍 생각나는 대로 썰을 풀어보자(늘 그랬듯이 대단한 거 바라지 마시란 뜻이다).


 A=비류,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일 경우


주몽이 재위한 지 19년째 되는 해 4월 유리와 주몽의 1st 부인 예씨가 부여에서 도망쳐 온다. 그러자 주몽이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주몽이 도망칠 때 유리는 임신 상태였으니 이 때 대략 19살 정도였을 거다. 그리고 이 해 9월 주몽이 죽는다(『삼국유사』).


주몽은 1st 부인에게서 유리를 낳았다. 글고 2nd 부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그럼 당연히 유리가 나이가 많다. 주몽이 2nd 부인을 만나기 전 1st 부인은 이미 유리를 임신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따라서 주몽이 연장자인 유리를 태자로 삼은 게 별로 어색하지 않다.


그럼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간 때는 주몽이 죽기 전일까 죽은 후일까.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주몽이 죽기 전에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갔을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리가 왕이 아닌 태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몽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과연 비류와 온조가 자기 세력을 이끌고 나갈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주몽이 죽은 후의 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럼 이 때 비류와 온조를 따라간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주몽을 따라온 이주세력이 아닌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이었을 거다. 즉 주몽이 왕이 되기 전 졸본부여의 신하들이었을 거다. 근데 이주세력인 주몽이 왕이 된 데 이어, 다시 이주해 온 유리가 왕이 되자 조국을 등진 걸로 짐작된다.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이복형제는 남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자기들을 지켜줄 부왕(父王)도 없다.


북부여를 빠져나온 주몽 일행은 주몽+오이, 마리, 협보였고, 도중에 재사, 무골, 묵거가 합류한다. 이들이야말로 주몽의 측근으로,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된 주몽의 근신(近臣)들이었으리라. 근데 비류와 온조를 따라간 오간, 마려는 새로운 이름들이다. 오간(烏干)과 오이(烏伊), 마려(馬黎)와 마리(摩離)의 발음이 비슷하니 같은 사람으로 볼 여지도 있겠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오히려 주변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


오이, 마리, 협보는 주몽과 오랜 친구였으며, 목숨을 걸고 함께 북부여를 빠져나온 동지였다. 그래서 고구려가 세워진 뒤에도 이들이 "한결같이 왕업을 돕고 도왔다【烏伊摩離與挾父 三臣同德聊贊成】(『제왕운기』)"고 한 거다. 주몽이 태자로 세운 유리를 그런 충신들이 버리고 비류, 온조를 따라갈 리는 없쟎은가. 더욱이 1st 부인인 예씨는 북부여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이주세력으로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유리 대신 토착세력인 2nd 부인의 아들들과 손잡을 이유가 없다.


 비류, 온조가 주몽의 양아들일 경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 두 아들이 있는 과부 소서노를 2nd 부인으로 삼는다. 그럼 비류와 온조는 당근 유리보다 나이가 많다. 유리가 고구려에 왔을 때 이들은 적어도 20대 초반이다. 그럼 이미 첫째아들인 비류는 태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근데 자기들보다 어린 유리가 갑자기 태자가 된다? 어디 그뿐인가. 이거 참기 힘든 굴욕이며, 앞으로 계속 찬밥 신세를 받게 될 거란 예고이기도 하다.


이 때 2nd 부인 소서노는 살아 있었다. 1st 부인 예씨와의 관계도 드러웠을 거다. 갑자기 1st에서 2nd로 내려앉게 되지 않았나.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가산을 기울여" 도와줬던 소서노로서는 뚜껑이 열릴 만 했다. 허나 주몽이 글케 하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걍 참고 지내야지 뭐.


그치만 부인들과 아들들, 글고 이주세력과 토착세력들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해줄 주몽이 죽자 아연 긴장이 감돈다. 이젠 서로 승부를 겨루거나, 한쪽이 무릎을 꿇거나, 아님 아예 갈라서는 길밖에 없다. 결국 비류와 온조는 엄마 및 추종세력과 함께 마지막 방법을 고른 거다. 이건 탈출이라기보다는 유리의 허락을 받고 집단으로 망명한 거다.


A가 맞든 B가 맞든, 유리-예씨-오이, 마리, 협보의 이주집단과의 경쟁에서 진 비류, 온조-소서노, 오간, 마려의 토착집단이 고구려를 떠나게 된다는 스토리는 비슷하다. 고구려에 온 지 몇 달만에 정권을 잡은 유리와 그 지지세력들의 저력이 놀랍다. 허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변수가 있다. 바로 송양이다. 주몽과의 경쟁에서 진 다물후 송양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유리다. 그건 유리가 즉위한 다음해 7월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서(『삼국사기』) 알 수 있다.     
 


 고주몽편을 깔딱깔딱 끝내며 …


연재하고 첨으로 한 인물에 대해 쪼개서 디벼봤다.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치만 그걸 풀어낼 능력이 돗자리에겐 없다. 서로 다른 내용을 담은 텍스트가 수십개를 헤아리니 이거 정말 어려웠다. 동명과 주몽이 같은 인물인가 다른 인물인가조차 가려내지 못했다. 그저 주몽과 관련된 여러 얘기들을 두루두루 정리해본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뭐 … 그거라도 제대로나 되었다면 그게 어딘가. 그저 여러분들의 기발한 해석과 참신한 비판을 바랄 뿐이다. 몇몇 분이 요청하신 유리왕에 대해 좀더 디비지 못했다. 글고 김성호님의 그 유명한 비류백제설,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다. 두루두루 죄송스럽다.  


끝으로, 이번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복규, 『부여, 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집문당, 1998)를 보시기 바란다(서점에서 사긴 힘드실 거 같다. 돗자리도 어렵게 샀다). 거의 모든 텍스트와 주요 논문들이 실려 있어 크게 도움이 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먹고 살다 보니 한 주 건너뛴 점,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딴지 역사부
돗자리 (e-rig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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