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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척 매뉴얼] 솔제니친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2009.6.18.금요일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정이유


지난 2008년 8월 3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러시아의 양심’으로 지칭되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을 때, 필자는 묘한 슬픔에 휩싸인 바 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비롯하여 <암병동>, <수용소 군도> 등을 써낸 가히 뺑끼통 문학의 대가가 죽었으니 이제 어디 가서 그런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랄지, 반평생을 감옥생활 아니면 망명생활로 기구한 삶을 보냈던 고인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에 차원해서랄지, 그도 아니면 인간은 누구든, 설령 노벨 할애비상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존재론적 무력감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에 슬픔을 느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필자가 느꼈던 묘한 슬픔이란 것은 마치 때로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기도 했고, 때로는 이 인간 없이 어떻게 군생활을 할 것인가 걱정이 될 정도로 의지가 되기도 했던 군대 고참이 어느 날 죽었다는 얘기를 제대 후 십년 만에 전해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의 묘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초코파이 한 덩이에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군생활의 어렵던 추억을 그 어떤 영화나, 만화보다도 더욱 생생히 되살려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고로 당 서적의 읽은 척에는 군필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군대에 대한 아련한 회한, 미필자라면 술자리에서 지겹게 들었을 그 믿지 못할 궁상활극에 대한 영화배우적 감정이입이 무엇보다 유용한 스킬이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


1)등장인물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그리고 솔제니친 등 러시아 문학의 대가들의 작품을 읽은 척하는데 있어 가장 첫 번째 맞닥뜨리는 어려움이 바로 등장인물들의 난해한 이름이라고 전술한 바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제목의 작품이므로 극중 주인공은 당연히 이반, 혹은 이반 데니소비치로 불릴 것 같으나 사실 당 서적의 주인공은 작품 전체에서 거의 ‘슈호프’라고 불린다. 고로 러시아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아니, 대체 이반 데니소비치는 언제 나오는 거야?’라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책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는 마치 짜장면을 시켰는데 왜 짱께를 갖다 주냐며 분통을 터뜨리는 형국과 유사하다 하겠다.


이 기회에 러시아 문학의 등장인물들은 왜 이름들이 무슨 백악기의 공룡이름들만큼이나 그리 어려운지에 대해 집고 넘어가도록 해보자. 당 서적의 주인공의 공식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


러시아인의 이름은 ‘이름+부칭+성(姓)’ 세 가지로 구성된다. 고로 <영자의 전성시대>가 그러하듯 당 서적의 제목은 주인공의 성인 슈호프를 생략한 채 이반 데니소비치라고만 표기한 것이고, 작품 내에서는 영자가 ‘미스 리’로 불리듯 슈호프라는 명칭으로 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인의 이름이 이 정도의 난이도에서 그친다면 이름 때문에 러시아 문학을 읽어내기 힘들었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반을 난데없이 ‘바냐’라 부르기도 하고, 알렉세이를 ‘로쨔’, 표도르를 ‘뻬쨔’라 부르질 않나, 또 남자한테는 이반이라 했다가 여자한테는 이바노브나라고 하는 등등의 각 이름에 대한 애칭 및 남녀에 따라 달라지는 부칭까지 뒤섞이는 경우, 그야말로 등장인물 서너 명이 나와서 그저 통성명만 했을 뿐인데 마치 손오공이 분신술을 펼치듯, 그 서너 명이 갑자기 십 수 명으로 늘어나는 기적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만약 러시아 문학에 조예가 깊은 적을 만나 쉽사리 읽은 척이 먹힐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 경우에는 그냥 등장인물들의 난해한 이름에 대한 난독증을 호소함으로써, 설령 끝까지 읽지는 못했어도 나름 간을 보기 위해 노력은 한 것만 같은 정도의 선량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비록 미완의 읽은 척이기는 하지만 상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당 서적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 : 얼떨결에 간첩으로 몰려 중노동 수용소에서 8년째 복역 중인 주인공. 이제는 수용소 생활이 체질의 경지가 되어버린 중고참 복역수로서 군으로 따진다면 상병 말호봉 정도 수준의 짬밥을 자신 분이라 하겠다.


-추린 : 주인공이 속해있는 104반의 반장. 무뚝뚝하지만 오랜 수용소 생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맡고 있는 반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인물이다.


-페추코프 : 남이 피다 버린 꽁초와 먹다 남긴 식기를 노리는 수용소의 하이에나. 군에서는 보통 이런 이들을 고문관이라 부른다.


-부이노프스키 : 전직 해군 중령이었으나 영국제독에게 선물을 받아 간첩으로 몰린 인물. 비록 전에는 함장이었으나 지금은 수용소에 수감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다.


-체자리 : 전직 영화감독. 같은 죄수라도 집이 부유한 까닭에 특별대우를 받는 인물이다.


-알료쉬카 : 침례교 교인. 수용소 생활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는 선한 인물.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다른 형들과 달리 신을 섬기는 착한 막내 동생의 이름도 알료쉬카다.


-고프치크 : 나이 열여섯에 불과하지만 누구에게나 응석을 떨면서도 챙길 것은 또 잘 챙기는 똘똘한 소년. 주인공은 그를 두고 나중에 수용소의 거물이 될 인물이라 평한다.


 


2)내용요약



이 형이 군대 있을 때 얘기 한 자락 해줄게.


먼저, 의정부의 306보충대에 있을 때였어. 보충대라는 곳은 아직 자대 배치를 받기 전인 신병들을 이삼일 정도 관리하고, 군복 등의 보급품을 지급하는 곳이지. 사실 거기 있는 군인 아저씨들은 며칠 볼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에서는 고참이라고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어리버리 신병들이 뭘 알겠어. 잔뜩 긴장해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판이었지.


어느 날, 상병계급을 단 군인이 뭔가 조사할 게 있다며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했어. 수학을 전공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는 거야. 몇 사람 손을 들더라고. 그때 나를 비롯해 수학 전공과 무관한 사람들은 왠지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어. 왜냐하면 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뭔가 편한 보직을 받는 게 아닐까 싶었거든.


결국 여러 사람의 수학 전공자 중 서울대 수학과를 다니던 한 친구가 뽑혔어. 부러웠지. 근데 그 친구가 뭘 했는지 알아? 신병들에게 군복을 나눠줘야 하니까 머릿수가 몇이나 되는지 세보라는 거였어. 또 어느 날은 미대 출신인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지. 결국 홍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한 친구가 뽑혔는데 그 친구에게는 주전자를 주며 족구장을 예술적으로 그려보라고 하더군. 군대란 게 그런 곳이야.


근데 내가 왜 갑자기 솔제니친의 작품 내용을 요약하는 페이지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냐구? 이 책의 내용이 그래. 이 책에 보면 말이지. 부이노프스키라는 전직 해군 함장도 나오고, 체자리라는 전직 영화감독도 나와. 근데 그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하는 일은 벽돌을 나르거나 장부를 정리하는 일이야. 죄인이 되어 수용소에 갇히는 순간 그 사람의 전직이 무엇인지, 어떤 능력이 출중한지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야.


군대 얘기 하나 더 해줄게.


그날은 부대 거점의 진지공사를 나가는 날이었어. 마침 소대장 없이 병사들끼리만 이동 중이었는데, 바로 위 고참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눈을 번뜩이는 거야. 그 고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한 민가의 문 앞에 묶여있는 커다란 똥개였어. 불길한 예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민가의 개를 잡아먹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말야. 고참의 눈이 멈춘 곳은 정확히 말해서 그 커다란 개가 먹고 있던 개밥이 담긴 양철 세숫대야였어.



왜냐하면 말야. 군인들이 밖으로 진지공사를 나갈 때면 가끔씩 몰래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거든? 왜 라면 따위를 몰래 먹어야만 했는가를 물어보지는 말아줘. 정 궁금하면 국방부 게시판에 글을 남겨보렴.


아무튼 소대원끼리 몰래 라면을 끓여먹을 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많은 양의 라면을 끓여낼 수 있는 솥이야. 반합으로는 기껏해야 몇 개 끓이지를 못하기 때문이지. 근데 이 빌어먹을 고참놈의 눈에는 그 큼지막한 양철 개밥그릇이 충분히 인간의 솥을 대신할 수 있는 뭔가로 보였다는 거야. 뭐, 어찌 보면 인간의 품위를 초월한 참신한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결국 한 놈이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인간과 개의 우정을 확인하는 것만 같은 시늉을 하는 동안, 그 고참은 개밥그릇을 발로 탁 차내더니 냅다 들고 튀어버렸어. 그리고는 대충 흙과 물로 닦아낸 후 맛있게 라면을 끓여 먹었고 말야. 정말 맛이 있기는 했어. 물론 그 말 못하는 개 입장에서는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일인가 싶었겠지만. 아무튼 그 개밥그릇은 여러모로 요긴했어. 민간인들이 쓰는 물건을 부대 내로 들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그 개밥그릇은 늘 진지공사 근처의 수풀 사이나 땅 속에 짱박아 두곤 했는데 말야. 말끔한 솥이었으면 아마 다른 소대 녀석들이 벌써 백 번은 훔쳐가고 없었겠지. 근데 그 놈들은 상상력이 부족했는지 그 개밥그릇은 누가 훔쳐갈 염려도 없이 내가 제대할 동안 소대 공식 지정 취사도구로 쓰였거든. 어쩌면 지금도 강원도 산골 어딘 가에서는 개밥그릇으로 라면을 끓여먹는 군인들이 있을지도 몰라.


역시 이런 비슷한 일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나와.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가 강제 노역장을 가다가 우연히 땅에 떨어진 줄톱을 줍게 돼. 그리고는 낮 동안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줄톱을 어디 은밀한 곳에 숨길 새도 없이 소지품 검사를 당하는 위기를 맞아. 이게 왜 위기냐면 줄톱류의 쇳조각은 얼마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흉기로 변할 수도 있는 터라 수용소 내로는 절대 반입이 안 되거든. 걸리면 최소 영창 10일인데 시베리아 수용소에서의 영창 10일이란 건 곧 죽음을 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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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당 서적의 내용요약을 과거 군대 얘기 몇 토막으로 갈음하려는 것은 군생활에 대한 요점 정리가 불가능하듯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내용을 요약한다는 것 역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약정리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당 서적의 내용을 굳이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오늘 영창에 갈 뻔했는데 그냥 넘어가고, 점심과 저녁끼니를 연거푸 2인분이나 챙겨 먹고, 수용소 반입 금지품목인 줄칼도 무사히 들여오고, 저녁에는 글쎄 줄 한 번 잘 섰더니 재벌 수감자인 체자리에게 소시지도 한 덩이 얻어먹고... 오늘은 정말 행복한 하루였어.’


문제는 그가 왜 행복했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적어도 군대를 다녀온 경험이라거나, 하다못해 극기 훈련 6박 7일쯤의 경험이라도 존재해야 가능하지, 단순한 내용요약만으로 당 서적을 읽은 척하고, 이해한 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읽은 척 세부스킬



수용소의 하루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정확히 백 년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 것은 아니듯 당 작품의 제목 속의 하루 역시 24시간 단위의 산술적 ‘하루’라기 보다는 뭔가 다른 의미가 숨어 있을 것처럼 예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 서적은 단 하루 동안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이다. 정확히 말하면 수용소의 기상시간인 새벽 5시부터 취침점호가 끝나고 침상에 누울 수 있었던 밤 10시까지 대략 17시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묘사한 소설이다.


그렇다고 그 하루가, 예를 들어 주인공이 탈옥을 시도한다거나, 악덕 간수에게 보복을 하는 등의 뭔가 비장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일이 발생한 특별한 날도 아니다. 주인공이 8년간의 수용소 생활 중 그날이 특별했던 이유는 정말이지 그날만큼은 평소보다 확연히 덜 맞고, 덜 춥고, 덜 배고픈 하루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행운



마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부제로 해도 될 만큼, 그날 하루 주인공 슈호프에게는 이상하게도 운이 따른다. 물론 현진건의 작품처럼 당 작품에 막판 마누라가 죽는 식의 비극적 결말은 없다.


새벽에는 수용소 생활 처음으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영창에 끌려갈 뻔했지만 간수의 방을 청소하는 것으로 대신 넘어간 것, 늑대같은 페추코프를 제치고 체자리에게 담배 한 모금을 얻어 피운 것, 옷가지 수선에 유용한 줄톱을 간수들에게 들키지 않고 수용소 내로 들여오는 등 많은 행운들이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날 주인공에게 따른 가장 큰 행운은 점심에 취사반을 속여 멀건 귀리죽 한 사발을 더 얻어먹었다는 것과 저녁에는 체자리의 우편물 수령을 도와준 덕에 썩어빠진 양배추국 한 그릇을 대신 먹게 되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죄수들은 어떻게든 남이 먹다 남긴 죽사발이라도 한 번 핥아볼 요량으로다가 식기 반납창구에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와중에, 주인공이 두 끼 연속으로 2인분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주인공의 식사장면은 배를 채우는 허겁지겁을 넘어선 어떤 경건함과 장엄함의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점심 식사)



이제, 죽을 먹는 이 순간부터는 온 신경을 먹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얇은 그릇의 밑바닥을 싹싹 긁어서 조심스럽게 입 속에 넣은 다음, 혀를 굴려서 조심스레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어야 한다. 그러나, 파블로에게 죽그릇이 벌써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 그릇을 더 배당받기 위해서는 오늘만은 좀 서두를 필요가 있다. 게다가 두 에스토니아인과 같이 들어온 저 페추코프 녀석은 두 그릇을 더 타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파블로 맞은편에 서서 자기 죽그릇을 비우며,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네 그릇의 귀리죽 임자가 누가 될 것인가 하고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 (본문 p.95)




(저녁 식사)



파블로는 곱빼기가 담긴 국그릇 앞에 자리를 잡고, 슈호프는 국 두 그릇 앞에 자리를 잡는다.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오가지 않는다. 경건한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슈호프는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얹는다. 한쪽 국그릇에 담긴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한번 휘저어 확인한 다음, 다른 그릇에 담긴 국도 똑같이 확인한다. 웬만큼은 들어 있다. 생선도 걸려든다. 보통, 저녁에는 아침보다 국이 더 멀겋게 마련이다. 조반을 먹이지 않으면, 죄수들을 부려먹지 못하기 때문에 아침은 좀더 먹이고, 저녁은 좀 부실하게 먹이기 일쑤다. 슈호프는 먹기 시작한다. 우선, 한쪽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켠다. 따근한 국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불만을 잊어버린다. 기나긴 형기에 대해서나, 기나긴 하루의 작업에 대해서나, 이번 주 일요일을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나, 아무 불평이 없는 것이다. (본문 p.175) 


마치 식자재 개그를 보는 듯한 유치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겠으나 당 서적을 읽은 척함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참고로,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에 보면 마치 슈호프의 식사 대목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 있어 소개하는 바이다.



(그림_고우영 초한지 5권 p.160_자음과모음)


 



군필자 가산점의 작품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 당 서적은 군필자들에게는 최소 30% 이상의 읽은 척 가산점을 획득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강원도 철원쯤의 추운 곳에서 군 생활을 했거나, 총보다는 삽을 더 많이 쥐고 있었던 군필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만약 90년대 이전 군번의 배고픔까지 경험해본 독자라면 본 매뉴얼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다 하겠다. 그저 옛날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는 것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 서적은 추위와 중노동, 굶주림 등 인생막장의 3대요소가 어우러진 곳에서의 비루하면서도 거룩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필자가 자꾸 수용소의 생활과 군 생활을 거의 동급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죄를 지어 죄 값을 치루는 죄인들과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군인들이 같을 수 있냐고 불만을 가질 독자 분들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묘사하는 당시 시베리아 수용소의 죄인들은 대부분 죄가 없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 사정을 이해한다면 설령 국방부 관계자라 할지라도 크게 불만은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1940년대 당시의 시베리아 중노동 수용소에는 무슨 흉악범죄자들이 모여 있었던 게 아니라 마치 7, 80년대의 우리나라가 그랬듯 ‘스탈린 바보’ 소리만 으로도 반역자니 간첩이니 하는 억지 죄명을 뒤집어쓴 죄 없는 죄수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얘기다. 그나마 스탈린한테 바보라는 욕이라도 한 마디 하고서 형을 사는 사람들은 덜 억울하다 할 것이다. 당 서적의 주인공 슈호프는 스탈린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얼떨결에 전쟁에 끌려 나가서는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목숨 걸고 탈주를 했더니만 오히려 간첩으로 몰린 억울한 케이스니 말이다.


어쩌면 솔제니친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삶의 주인은 그저 발밑만 바라보고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슈호프와 같은 노동자라 밝힘으로써 이상적 사회주의의 한 단면을 소설화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특히 슈호프를 비롯한 104반 반원들이 살가죽을 찢을 듯한 추위와 번듯한 공구 하나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도 일심동체로 벽돌을 쌓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철근을 용접하러 가는 녀석들이며, 수리공장 건물에 마루를 얹으려고 가는 죄수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본문 p.113)


고로 당 작품의 작가가 구소련에서는 스탈린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추방을 당하고, 또 마찬가지로 서방국가에서는 적국의 적은 우리의 동지라는 계산에 의해 반공작가의 거두쯤으로 치부되곤 하는 것은 문학을 문학으로 보지 않는 정치적 아전인수의 잘못된 읽은 척이 낳은 역사적 폐해라 사자후를 토함으로써 당 서적에 대한 읽은 척의 대미를 장식할 수도 있다 할 것이다.






이상이다.



늘 강조하건데,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이다.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 저자 너부리(newtoil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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