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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을 진압하러 온 나폴레옹의 처남 '샤를 르 클레르'가 아이티 혁명의 수장이었던 투생 루베르튀르를 끌어내려 '꼼수'를 계획하면서 마무리를 했다. 이어가보자.

 

나폴레옹의 처남이었던 샤를 르 클레르는 흑인 노예 진압 작전을 길게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하나의 ‘꼼수’를 생각하게 된다.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너희가 주장하는 노예제로의 복귀를 허용하지 않는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어? 진짜?!”


“그렇다. 그러니 우리랑 강화조약을 맺자.”


“알았다! 우리가 사절단을 보내겠다. 대신 안전을 보장해라.”
 

“그건 문명국가의 기본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르 클레르와 루베르튀르는 ‘노예제로의 복귀를 허용하지 않는다.’란 대원칙 앞에서 강화조약을 맺기로 했고, 둘은 강화조약을 맺기로 합의한다.

이 회담을 위해 루베르튀르는 프랑스 진영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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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루베르튀르>

 

르 클레르는 회담을 위해 찾아온 루베르튀르를 체포한 거다. 그리곤 바로 프랑스로 압송해 버린다. 수감된 루베르튀르는

“나를 쓰러뜨림으로써 생 도밍그의 자유의 나무는 밑동이 잘릴지 모르지만 뿌리에서부터 다시 솟아오를 것이다.”

라고 외쳤지만, 그는 아이티 독립을 보지 못하고, 1803년 4월 7일 포르데주 교도소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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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베르튀르의 죽음>

 

그렇다면 프랑스군은 어떻게 됐을까?

흑인 노예 혁명의 선봉장이자 아이콘이었던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잡아 가뒀으니, 그 나머지 쉽게 진압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꾸로 진행됐다. 아니, 파병 직후부터 프랑스군은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1802년 6월까지 프랑스군은 3천 명이나 되는 병사가 죽었고, 매일 30 ~ 50명의 병사들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거나 몸져누웠다. 뭐가 문제였을까?

황열(黃熱)병이 돌았던 거다. 여름이 되면서 그 기세는 더 거세졌고, 프랑스군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 꼼수로 루베르튀르를 잡았던 르 클레르는 그해 10월이 되면 황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참고로 제국주의 시절 세계열강을 가장 힘겹게 했던 게 황열병이다. 프랑스는 이 황열병 때문에 20세기까지 고통받아야 했다. 바로 파나마 운하 건설사업이었다. 당시 2만 2천 명의 인부를 동원해 9년 동안 삽질을 했지만, 말라리아와 황열병 때문에 공사를 진척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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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열병에 걸린 일가족의 모습>

 

결국 이 공사를 이어받은 미국은 황열병의 매개체인 모기를 없애겠다고, 장구벌레가 살만한 물웅덩이를 다 없애거나 석유를 뿌려서 아예 자라지를 못하게 했다. 그렇게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펼친 덕에 겨우 파나마 운하를 개통했다.

이 황열병은 지금도 특효약이 없고, 백신을 맞는 게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걸리면 오한과 발열, 온몸에 통증이 뒤따른다.

사망률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20% 선, 많게는 80%의 사망률을 보인다. 21세기에도 조심하는 질병인데 19세기 때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암튼 나폴레옹은 처남이 죽은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티의 부가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병력을 증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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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물러서는 순간, 프랑스의 미래는 없다!”

이렇게 병력은 계속 늘어났지만, 아이티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반은 죽었다 보는 게 맞았다. 황열병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3만 3천 명의 병력이 들어갔다가 본국으로 되돌아온 병력은 고작 3천 명 수준이 됐다. 그제야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이때가 1803년 11월이었다. 프랑스군이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4년 1월 1일, 생 도맹그의 해방 노예들은 ‘아이티’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비록 붙잡혀서 죽었지만, 그의 행보를 지켜본 수많은 예비 혁명가들은 중남미 곳곳에서 혁명과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유색인종이 해방투쟁을 벌여 성공한 유일한 예가 투생 루베르튀르와 아이티 혁명뿐이라는 것. 그래서 더 기억해야 하겠지만, 아이티 혁명을 기억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다.


자, 문제는 나폴레옹인데, 황열병에 호되게 당한 나폴레옹은 아이티에서 철수하면서 미국의 제퍼슨에게 루이지애나를 팔겠다는 의사를 밝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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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통치할 만한 병력도 물자도 없다. 설사 유럽에서 실어나른다 해도 영국해군 앞에서 얼마나 길게 보급선을 유지할지 장담 못 한다. 그리고 황열병.”

유럽인들이 신대륙(인디언, 아즈택)인들을 학살했던 게 ‘천연두’라면, 유럽인들이 된통 당한 게 황열병이다. 황열병이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가 아프리카로 넘어간 건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이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원래는 한 지역에 존재했던 병인데, 이게 사람들의 왕래로 퍼져나갔다는 거다.

초창기 북미대륙을 개척(?)하던 유럽인들을 괴롭혔던 게 황열병이었다. 이후 때가 되면 황열병이 유행처럼 번졌다. 1706년, 황열병이 미국 남부를 강타했을 때 당시 인구의 5%가 사망했다.

이후 잠잠하다가 1728년과 1732년 잠깐 유행처럼 돌다가, 1793년 미국 동북부를 강타하게 된다. 이때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질 정도로 환자가 폭증했고, 사망자도 많았다.

이 대유행의 중심에는 필라델피아가 있었는데, 이 형제의 도시는 황열이 유행하는 30년 동안 전체 인구의 1/10이 사라졌다. 18세기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은 수시로 황열병 유행이 돌았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게 된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포기한 배경에 황열병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북미 대륙은 황열병이 수시로 휩쓸고 다니던 지역이었고, 이 때문에 관리에 어려움이 예상됐다.

“황열병에 대해 너무 과대포장 한 게 아닌가? 유럽 본토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위험성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을 텐데”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사가지 않겠냔 의향을 제퍼슨에게 내비친 직후 유럽에서는 황열병의 대유행이 시작됐다.

1804년에는 스페인에 황열병이 상륙했다. 항구 도시 말라가의 인구 1/3이 황열병에 걸린 거다. 이후 십수 년 간  황열병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를 돌아다니며 맹위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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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각 이야기를 하다 아이티 혁명과 아이티 독립의 아버지 투생 루베르튀르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하다 보니 황열병 이야기도 하게 됐고 말이다.

역사적 사건을 말할 때 단정적으로 하나의 이유만을 말할 순 없다. 복잡하게 엮인 수많은 개별사건의 총합이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건으로 완성된다고 해야 할까.

황열병 때문에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포기했다는 ‘낚시성’ 글을 썼지만, 결국 이 낚시성 이야기도 루이지애나 매각이란 하나의 사건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란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지금껏 ‘전염병이 바꾼 천조국의 역사’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