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편에서는 과거 민주 진영과 진보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거대 보수 세력에 대항해 힘을 합치다가 세월이 지나고 각자의 세력이 커지며 진보 진영이 민주 진영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내용을 다뤘다. 계속 이어 가보자.
구르는 공이나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일에는 관성이 있다. 작동하는 시스템이나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일은 어느 하루 아침에 갑자기 멈추지 않는다.
민주진영과 진보진영도 서로 같은 편이라는 관성을 벗어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는 달랐지만, 오랫동안 같은 편이 되어 싸웠다.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부터 서로 다른 진영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20년이 넘은 지금도 두 진영을 같은 진보진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론에서도 두 진영을 같은 진보 진영이라고 말한다.
출처 - <경향신문>
민주, 진보 진영 사이 미움의 이유
그러다 보니 두 진영의 정치인들이나 지지자들이 불필요하게 서로를 미워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고 행동할 때 더 미운 법이다.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이 한 말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도 같은 진영에 속한 사람이 하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은 감정을 쏟지 않고 포기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만, 어떻게라도 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감정을 쏟고 노력한다.
나무에서 저절로 사과가 떨어져 머리에 맞았을 때보다 누군가 사과를 떨어뜨려 머리에 맞았을 때 더 화가 난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에 우리가 그렇게 분노하고 슬퍼한 건, 제대로 대처만 했다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슬프기는 했겠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 돌아가셨을 때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때를 가정해보면 쉽다.
민주 진영과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서로 다른 편이라고 생각했으면 ‘저 치들이 그렇지 뭐’하고 넘어갈 일도 서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에 오래 남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돼버린다. 민주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미움과 반목이 이유이다. 오랜 시간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밉고 용서가 안 된다.
그래서 서로 필요 이상으로 말 한마디에 불쾌하게 생각하고 대립한다. 미래통합당보다 민주당을 미워하는 정의당 지지자나, 미래통합당보다 정의당을 미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특히, 2016년 총선을 지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들에게 어떻게 미래통합당보다 민주 진영/진보 진영을 더 미워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는 말은 어떻게 미래통합당이랑 비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서로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 미운 근린혐오 현상이다.
진중권과 서민
당장 진중권과 서민 같은 진보진영 지지자를 봐라(자신들은 그냥 지지자 아니고 오피니언 리더라고 생각하겠지만 피식 웃음만 난다). 윤미향과 조국에 대해서 그토록 분노하며 온갖 저주를 퍼붓던 진중권 씨라면 이재용이나 나경원에 대해서도 비슷한 양의 저주를 쏟아냈어야 할 일이지만, 10분의 1도 저주하지 않았다. 선택적 저주인 것인가.
출처 - <파이낸셜뉴스>
조국이 딸에게 부모 찬스를 제공한 것에 그 정도로 분노했다면, 이건희가 아들에게 제공한 부모 찬스를 보고는 기절이라도 해야 한다.
나경원이 딸을 성신여대에 보내고 장애인 올림픽 임원을 만들어준 것, 아들에게는 예일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서울대 논문에 이름을 집어넣은 일에 대해 진중권 씨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없다.
김성태가 딸을 KT에 집어넣은 일에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국에게 느낀 분노의 백 분의 일 이하였을 거라 확신한다.
서민 씨도 비슷하다. 지난 몇 년간 서민 씨가 가장 오랜 시간 공들여 깐 대상은 그가 ‘문빠’라 부르는 문재인 지지자들이다.
출처 - <헤럴드경제>
아마도 문재인 지지자 중 극성맞은 일부 지지자를 비판했다고 짐작되지만, 결과적으로 서민 씨는 문재인 지지자 전체를 비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은 민주당이 미래통합당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고 있을지도.
어느 집단이든 이상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문재인 지지자 중에도 정말 이상한 자들이 있다. 나도 이들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말끝마다 문재인 타령을 하면서 멸칭과 욕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의 말과 행동 어디에도 문재인 정신은 흔적도 없다. 임금은 훌륭한데 옆에 간신들이 문제라며 완장질하는 역모주동자들처럼 아무 데나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
이 자들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가 아니라 문재인 이름을 앞세워 아니 이름을 팔아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자들일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나는 문파다.
그래서 남경필을 지지한다'라는 논리가 떠돌았다>
서민 씨가 욕하는 ‘문빠’들은 이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박사모가 보수진영 지지자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듯이, 일부 문빠가 문제가 있다고 지지자 전체가 문제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는 건 ‘그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라거나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진영에서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을 때 느끼는 배신감 때문에 감정이 증폭되는 건 생리현상 같은 거다.
지금 민주진영, 진보진영 지지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상대 진영에 대한 미움은 배신감 때문에 증폭된 감정이다. 서로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민주당
민주당 지지자 중에는 유독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그게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이상한 일 아니다. 이 현상 또한 민주 진영과 진보 진영을 구분 짓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다.
민주당은 중도보다도 더 보수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정당이다.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나 노동정책의 방향을 보나 온건 보수 정당이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진보정당으로 분류되어 있다 보니 민주진영 지지자들은 왜 난 보수적인 성향인데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거지 라고 의아해한다. 보수정당에서는 좌파 정당이라고 욕을 하고 정의당에서는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비판한다.
애초에 민주진영 쪽 정치 세력은 좌클릭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정책의 방향도 그동안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옹호하면서 불공정한 관행을 고쳐나가자는 쪽에 가깝다. 한미FTA가 좋은 예다.
자유당부터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미래통합당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보수진영 정당들의 정책이 워낙 폭거에 가깝다 보니 민주당의 정책이 좌파적이라고 하는데 민주당 정책을 들고 어디 가서 좌파정책이라고 했다간 무식하다고 욕먹기 딱 적당하다.
민주/진보 나아가야 할 길
서로 다르다고 인정하면 미움도 싸움도 적어진다. 지금 민주진영과 진보진영에 필요한 건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마음이다. 힘을 합쳐 같이 싸운 적이 있다고 해서 같은 편은 아니다. 그러면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미워하고 싸워봤자 보수 진영만 즐겁다.
서로 다른 진영임을 인정하고 나면 민주 진영에서는 진보 진영에서 느끼는 박탈감을 이해할 수 있고, 진보 진영에서는 민주 진영이 느끼는 섭섭함을 이해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이기는 쪽에 표를 줘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에게 올 수 있는 지지를 뺏긴 진보 진영의 박탈감이나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쪽에서 비판 당해서 느끼는 민주진영의 섭섭함을 이해해야 한다.
서로 다른 진영이면 각자의 이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같은 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며 섭섭해한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편이 되어 싸우던 두 진영은 이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해야 한다.
다음 편
민주/진보 진영이 서로에 대해 실제 이상으로 섭섭해하고 미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수/민주/진보 진영의 세력 크기에 대한 왜곡된 이해 탓도 크다. 4편에선 대한민국의 정치 세력도가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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