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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2. 금요일

정우성


 



 


 


나는 지금까지 개인의 성찰을 위주로 육아와 자녀교육을 말해왔다. 사회 구조적인 접근과 현실에 대한 진단과 정책적 대안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피해 왔다. 그런 문제를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으며 빛나는 엄마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성찰과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세태를 핑계 삼아 미루거나 외면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런 까닭에 현실에 대한 진단과 제도 개혁에 대한 발언을 유보하면서 개인의 성찰을 촉구했던 것이다.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인 노력은 우리 사회를 전진케 하는 두 발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깽깽이로 걸어왔다. 개인의 영역을 외면하지 말고, 무시하지 말자.


 


흔히 공동육아는 이 집과 저 집이 함께하는 육아로 인식된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육아는 아빠와 엄마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육아에 시간을 쓰고, 누가 더 육체를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이 처한 환경마다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일반화하기도 어렵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아빠의 육아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의 몫과 부모의 몫을 구별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부모가 아이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아이에 얽매여 있다. 이것은 피차 피곤한 일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모는 아이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과 무책임한 방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부모의 몫은 아이를 위로하고 아이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아이의 인생에 부모가 몰입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건 한 걸음 더 나아간 게 아니라 전속력으로 뒤로 후퇴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를 닦달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게 아니다. 우리가 아이를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무엇인가 더 해주고 싶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에게 더 좋은 사회를 물려주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모의 몫이다. 좋은 육아는 차라리 정치의 영역이 되곤 한다.


 



 


“바꾸는 것은 어려워.”


“하루 아침에 어떻게 고치니.”


 


사람들은 이렇게들 말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에 대한 평소의 자기 생각(아무 생각 없음을 포함하여)을 한 번에 바꾸거나 고치는 일은 여간 쉽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바꾸다’, ‘고치다’라는 관점으로 아이들과 대면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한 번도 아빠인 적이 없었고 아이를 키운 적도 없었으며 양육에 관해 공부한 적도 없었다. 나는 무지했고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니까 나는 – 아마도 당신도 – 애당초 별로 바꿀 것도, 고칠 것도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히려 ‘배운다’라는 관점으로 육아를 한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바꾸고 고치는 데서 발생하는 심리적 부담에서 자유로워진다. 심리적인 부담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무엇이 더 낫고 옳은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다. 실천할 수도 있다. 나를 바꾸기 위한 실천이 아니라 그저 배운 것을 적용해 보는 실천 말이다. 배우고 적용해 보고 또 배우는 인생을 나는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자, 여기 공교육의 현장이 있다. 진창이 돼버린 이 곳을 우리는 바라본다.


도대체 공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지가 바로 출발점이다. 공교육의 목적은 진보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다. 논쟁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밝혀본다. 공교육의 목적은 “생각의 힘”을 키우는 데 있다고 나는 선언한다.


 



 


인생을 살다가 닥친 여러 가지 난관을 헤쳐나갈 방도를 찾는 생각의 힘,


잘못된 일과 옳은 일을 따지는 생각의 힘,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생각의 힘,


나한테 꼭 맞는 신발을 찾는 생각의 힘,


상식과 교양과 염치를 알 줄 아는 생각의 힘,


무엇이 합리적이며 합당한 일인지 구별하는 생각의 힘,


걱정을 걱정하는 생각의 힘,


닥쳐올 파국을 예상할 수 있는 생각의 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수 있는 생각의 힘


부끄러움을 알 줄 아는 생각의 힘 말이다.


 


이런 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논리력도 중요하고, 경청하는 자세도 필요하고, 상상력이나 창의성도 필요하며, 여러 가지 언어의 쓰임새도 중요하다. 여기에 바로 교육이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의 힘” 관점에서 공교육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떤 교과과정은 높게 평가하고 어떤 교과과정은 불요하게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아이가 자기 인생에 닥칠 여러 난관을 잘 이겨내고 뜻하는 바를 성취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세상은 옛날의 초원생활이나 농경생활과 비교해서 너무 복잡해졌다. 생각하고 따질 게 많아졌다. 더욱 더 생각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녀가 우왕좌왕하고 좌충우돌하면서 정신을 놓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슬기롭고 현명하게 판단하고 대처하기를 원한다. 그것 또한 생각의 힘이 필요하다. 생각의 힘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공교육의 목적이자 기조가 되어야 한다. 물론 어떤 생각이냐, 생각의 힘을 따지는 기준이 남는다. 이론적으로는 다소 논란이 있겠으나 우리는 저마다 공교육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자가 갖는 경험의 자산이라는 게 있다. 그 경험이 일종의 잣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식의 총량은 아니다.


 


 


대학은 인재양성 공장인가?


 


나는 매우 여러 번 ‘대학이 배출한 인재를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기에 역부족이다’, ‘도대체 대학교육이 이래서 되느냐’라는 식의 주장을 들었다. 동의할 수 없다. 지나치게 시장주의적인 견해다. 대학은 공장에 투입되는 원자재를 공급하는 곳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대학을 졸업해서 기업에 취직하자마자 바로 현장에 배치될 수 있을 정도로 대학교육이 역할을 했던 적은 없었다. 대학은 공부하며 생각의 힘을 기르는 곳이지 현장에서 즉시 돈 벌 수 있는 기능을 배우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업은 신입사원을 재교육하고 투자하여 키어왔다. 그러면서 대졸자 신출내기는 기업에 맞는 인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유수의 기업들은 심지어 장학금을 지급하면서까지 대학생들을 미리 잡아두곤 했다.


 


적어도 IMF 이전에는 그랬다. 그렇게 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신입사원을 채용해서 그들을 키우는 것은 기업의 몫이지 대학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책무이다. 비용이 들고 시간이 들며 귀찮으니까 기업은 신규 고용에 기여하기보다는 경력사원을 채용하려고 하고, 학생들은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음을 어필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 어떤 베테랑도 신출내기 시절이 있는 법이다. 신출내기 시절이 있었으므로 베테랑도 되는 것이다. 기업들은 단물만 쏙 빼먹으려는 속물들이 돼서는 안 된다. 기업도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기관이 아니다.


대학은 자기 꿈을 모색하고 그 꿈을 위해 생각의 힘을 키우는 곳이다.


다만 대학은 의무교육이 아니라 공부를 좀 더 하고자 학생이 자발적으로 입학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부해야 할 지식의 양이 많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한 사람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서의 역할이란 곧 ‘사회적 역할’이다. 대졸자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좀 더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이런 기대가 실제 열매를 맺어야만 우리 사회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즉, 대학은 자기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사용하는 개인적인 투자와 이들이 잘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면서 졸업 후의 기여를 기대하는 사회적인 투자가 만나는 곳이다. 여기에도 역시 ‘생각의 힘’이라는 게 있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생각의 힘에 있어 어떤 향상된 면모가 없다면 개인적인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고등학교만을 졸업한 사람 사이에 사회적 역할에 있어 별로 차이가 없다면 사회적인 낭비다.


 



 


대학은 취직용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생각의 힘을 더욱 키우려는 사람들, 그리하여 지식에 목마른 인간을 키우는 곳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식에 목마르지 않고 빨리 가서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일을 열심히 하다가 불현듯 지식의 목마름이 생기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대학이어야 한다.


 


 


국공립대학부터 시작하자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현재 엉망이다.


공교육의 기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지 오래 됐고, 곳곳에서 독거미들이 줄을 타고 다닌다. 꿈은 짓밟혔다. 사교육 시장에서 사람들은 욕망을 투기하고 배설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교육정책은 정치인들의 골칫거리다. 잘못 손을 댔다가 큰 화상을 입는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입시제도이든 등록금 문제이든 대학에 먼저 손을 대야 한다는 주장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그래야만 엉망이 된 초중고 공교육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맥락이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20대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새로운 활력의 발화점이 될 수 있는 까닭에 나도 여기 동참해 본다. 대학의 문턱이 낮아야 사교육과 선행학습의 유혹도 잦아들 것이다.


 


대학의 문턱낮추기와 관련하여, 내 희망사항을 여기 밝혀 본다.


나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희망하지만 국가가 사립대학까지 책임을 져야한다고 떼를 쓰지는 못하겠다. 어느 정도까지 국가가 사립 재단의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지 그 경계점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사학이 무섭기 때문이다. 나는 사학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이익집단이며 힘센 세력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사학개혁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길찾기에도 최단길만 있는 게 아니어서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빨리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사학법개정에 관련하여 매우 격렬한 저항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경험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나의 희망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학개혁은 당장의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


즉 사학과의 거친 충돌은 가급적 피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좋아하는 시장주의 원리를 이용하여 유혹하고 압박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학이 자율권을 달라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학과의 새로운 허니문이다. 물론 아주 섬세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것은 국공립대학이다.


다음과 같은 방법을 희망하는 것이다.


 



 


첫째, 국공립대의 문턱을 과감히 없앤다.


 


우선 국립대학의 등록금을 전격적으로 폐지한다. 단계적으로 폐지할 수도 있다. 대학정원이 220만 명이고, 국공립이 차지하는 비율이 22%이며, 국공립평균 등록금이 450만 원이라고 본다면, 필요예산은 2조 2천억 원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의 예산은 민주통합당 정책기준 반값등록금 예산보다 거의 1조 원이 적다. 새누리당의 반값등록금 정책 예산과 거의 비슷한 금액이다. 예산 확보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전격적으로 폐지하는 것이지만, 단계적인 운용의 묘를 발휘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지방소재 국립대학의 등록금은 2013년부터 즉시 폐지하고, 수도권소재는 단계적으로 폐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립과 도립대학은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하여 등록금을 즉시 또는 단계적으로 폐지한다. 이것은 사학을 포함하여 반값등록금을 실현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며 예산부담이 적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것이 사학이 제일 무서워하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사학은 틀림없이 큰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사립은 천만 원을 내야 하는데 국립은 무료라고 한다면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국립대학 입학을 먼저 선택하지 않겠는가? 저소득층 자녀들의 입학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돼 왔던 국가와 사학 사이의 교육 개혁 프레임을 과감히 버리는 것. 바로 여기에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립대 모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울시가 아닌 국가라면, 박원순 모델보다 더 과감하게 더 빛나게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 자신감의 문제다.


 



 


둘째, 지방을 중심으로 국공립대학의 정원을 늘린다.


지방을 중심으로 국공립대학의 정원을 늘려나간다. 이로써 지방 국공립대학의 위상과 역할을 재고한다. 반대로 서울대의 경우에는 학부생을 지속적으로 줄여나감으로써 대학원 중심의 대학으로 발전시킨다. 조국 교수의 의견처럼, 서울대학교를 분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고려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서울대의 정원은 줄이고 지방의 국립대학은 정원을 늘린다. 등록금 부담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입학생의 지원비율은 당연히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셋째, 국공립 특성에 맞는 문턱 낮은 입시제도를 수립한다.


국공립은 보다 적극적으로 계층을 안배하고 지역을 안배하여 문턱을 낮출 수 있다. 또한 공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는 입시제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떻게 할 것인지의 각론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연구와 의견이 필요하겠다.


 



 


넷째, 사학과의 관계는 서두르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입시 제도의 경우, 지금의 입시제도를 유지할 수도 있고 개선할 수도 있다. 사학이 원한다면 입시제도에 대해서 사학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주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학에 더 많은 자율권을 준다고 해서 국가적으로도 시급한 손해가 아니다. 사학에 입시에 관한 자율권을 준다는 것 자체에서 어떤 철학적인 문제나 가치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 같다. 장기적으로 대학은 국공립 위주로 되어야 하고, 사학은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학에 입시 자율권을 준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합리적인 가이드라인이 있겠지만). 국공립이 22%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시급히 확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관건이다. 참고로 OECD 평균 국공립대학 비율은 85%로 알려져 있다.


 


다섯째, 사학 지원과 사학에 다니는 학생 지원을 분리한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국가가 사학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반값등록금 정책은 결국 사학에 일률적으로 막대한 국고보조금을 지원해야 가능한 일이며, 지원을 확대하면 할 수록 정부는 사학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할 지위를 요구받고, 사학은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기 때문에 새로운 갈등이 생길 요인이 다분한 정책이다. 개인적으로 사학에 지원하는 현재 수준의 국고보조금을 유지해 나가는 것도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보다 사학에 대한 재정지원과 사학에 다니는 학생에 대한 재정지원을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현재 국공립대 1인당 장학금 평균은 98만 원이므로, 국공립대를 무상교육으로 전환하면 2천억 원 이상의 여유금액이 생긴다. 이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함에 있어서 일련의 합의/동의가 필요하고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야겠지만, 이것을 사학의 장학금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사학에 다니는 학생 장학금 프로그램을 더 개발하고 확대함으로써 국가에서 학생에게 직접 지원하는 비율을 늘리는 방안이 어떨까 생각한다(현재 사학의 장학금 비율은 등록금의 10~20%로 분석되는 것 같다). 금융 프로그램은 결국 미래를 담보로 한 빚놀이라서 국가가 나서서 이를 권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슬기로운 방책이 될 수 있다면 염두에 둘 만하다.


 


여섯째, 파산하는 사학은 적극적으로 국공립화한다.


그리니까 사학과의 새로운 허니문 정책은 사학이 파산하도록 도와주는 정책이며, 사학이 어쩔 수 없이 국가가 요구하는 개혁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사학을 지원하여 사학경영이 발전하도록 하는 길보다, 국공립의 비율을 늘리는 것(예컨대 지금보다 3~4배 가량 비율을 확대)이 바람직한 국가 대학정책의 길이다. 새롭게 대학을 설립하는 것보다, 현재의 국공립 정원을 늘려나가거나 혹은 사학을 국공립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같다. 이를 위해서 사학이 파산하는 것 자체가 꼭 나쁜 일은 아니다. 파산하기 전에 국공립화 하는 것이 어떠겠냐고 유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섬세한 내용이 필요하겠지만.


 


일곱째, 장기적으로 국립대학의 서열을 없애고 통합한다.


 


 


반값등록금 공약


 



 


이것은 가카의 공약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 모두 <반값등록금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지금처럼 사학의 비율이 8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반값등록금은 결국 사학을 지원하는 정책이 된다. 사학에 지원하면 지원할 수록 등록금의 인상, 학사행정의 방향성, 재단 경영의 합리화 등에 대해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대립과 갈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정책이다. 무릇 국가의 교육시책은 단순하고 명쾌할 수록 좋다. 또한 반값등록금 제도로는 엄청난 예산에 비해서 대학교육의 국공립화를 더욱 요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학이 할 일은 사학이 하도록 장려하고, 국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눈치 볼 것 없이 선행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쪽이나 저쪽이나 반값등록금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이해타산이라고 생각한다. 국공립 대학을 사실상 무상으로 서비스하면 대학생 유권자의 22%에게는 호소력을 갖겠지만, 나머지 78%의 불만과 질투가 짐이 될 수는 있겠다. 반면에 반값등록금은 대학생 유권자 모두에게 호소할 수 있으므로 정치인들에게는 구미에 당기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눈 앞의 이득을 위해서 국가의 장래를 똑바로 보지 않는 태도이다.


 


사학의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청렴하게 자기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먼저 국가가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일을 먼저 다짐하고, 남은 사학의 영역(정확하게는 사립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합리적인 수준의 방책을 내는 것이 타당하다. 어쨌든 대학교육은 국공립화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옳다. 국공립대학이 더 늘어야 하며, 더 많은 학생(혹은 직장인)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사학은 의미 있는 정도의 역할을 하는 수준이어도 족하다. 국공립대학이 있음으로써 지금 내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사회에 들어가 일을 하더라도 – 군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 공부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모델을 꿈꾼다.


 


 


깽깽이 하지 말자


 



 


교육문제는 교육문제 그 자체로는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깽깽이다.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항은 대학에서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교육 시스템이 혁신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미친 듯이 입시에 몰입하고 경쟁하고 스펙을 쌓으려고 몹시 충혈되어 있을까? 다름 아닌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와 졸업 후의 대우이다. 대학은 서열화된다. 효과적인 방책을 교육 이외의 영역에서 말하자면 졸업 이후의 사회진출에 공정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산업의 중핵으로 삼아야 하며, 공정거래를 확립해야 한다. 굳이 재벌개혁을 말할 것까지 없다. 국가의 주요 시책과 행정구조가 중소기업에 초점을 두도록 하면 되는 일이고 대기업은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시장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경쟁하도록 하면 된다. 단, 공정거래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즉, 공정거래위원회가 본연의 역할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교육 시스템은 상당히 개선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재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교육시스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느냐다. 대학입시는 재수할 수 있다. 삼수도 가능하고 때로는 사수도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사업을 했다가 망하면 알거지가 된다. 재기하기 몹시 어렵다. 사람들은 모험보다는 안정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대기업과 공무원과 호연지기 없는 전문직 일자리가 머릿속에서 횡행할 뿐이다. 이래 가지고서는 애플이나 구글 같은 신출내기 기업이 대기업이 되는 역동성 있는 산업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닦달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국가의 대학교육의 방향성을 이야기해 봤지만, 어디까지나 비전문가의 사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내 생각이 실현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나는 오늘도 또 내일도 누구누구의 아빠로서 살아간다. 적어도 내가 누구누구의 아빠라는 점에서는 요상하고 엉터리 같은 사회구조를 탓할 생각은 없다. 나는 세상 일은 잊고 아이와 마주할 수 있다.


어쨌든 아이는 오늘 하루가 전성기이며, 나는 그 전성기에 동참하련다.


 



 


 


정우성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드디어 후속편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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