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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1. 목요일

정치불패 유리에선나무


 










게시판의 글이 3회 이상 메인 기사로 채택된 '유리에선나무' 님께는 본지의 외부 필진 자격을 인증해드립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겠습니다. 가카의 귓구녕을 뚫어 드리기 위한 본지의 소수정예 이비인후과 블로그인 ’300’의 개설권한은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참조할 반론 기사


[고찰] 박정희는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가 조까튼 대우를 받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바로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용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배운 국사책은 모두 내재적 접근법으로 쓰여졌음에도 송두율 교수의 당연한 논리는 북한을 옹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미친놈으로, 그의 논리를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렸는데, 역사에서 각 객체를 내재적 접근법으로 바라보지 않고 통시적 진리로 바라본다면, 세종대왕은 공은 있을지 모르나 사악하고 타락한 지도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문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대상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논리의 폭력일 뿐이다.


 


이런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며, 각 집단의 폐쇄성과 독선이 이러한 문화를 더욱 깊게 뿌리 박는다. 여기에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이로써 대한민국 역대 지도자는 객관적인 평가에서 벗어나 주관적, 정치적 판단을 받게 되고, 시민들은 서로를 향해 배타적 감정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갈등은 점점 깊어지기만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경제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나라이나, 훌륭한 지도자는 없었고 국민이 훌륭해서 이렇게 발전했다는 국개론도 판치고, 지도자를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대선이 다가오면 새로운 지도자에 슈퍼지도자라는 굴레를 덧씌운다.


 



꼭 눌러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이런 모순이 판치는 대한민국. 그 중심에 박정희, 리영희, 김대중, 노무현이 있다. 그들을 내재적 접근법으로 바라보기 위한 전제조건은 다음 세 가지를 따른다.


 



우선, 국민 수준을 뛰어넘는 정치질서는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지도자보다는 지도자를 옹위하는 세력이 권력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집행한다.


마지막으로 세계는 단일한 전제가 아닌 다양한 변수에 의해서 움직인다. 따라서 단일 변수로 그 대상을 판단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변수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십여 년 전, 서프라이즈가 한창 활기를 띄고 있을 때 일이다. 나는 그곳에 박정희에 관한 평가를 했고, 그 글이 대문에 올라 논란에 중심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댓글은 험악했다. 한불로 님의 글(대한민국의 뒤통수 시리즈 2편, [정치] 여-야 정치집단은 어떻게 한국을 신자유주의 국가로 만들었는가?)에 비난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내 글에는 공감하는 글이 극소수였다. 한불로 님의 글을 보면서 시대가 변하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십 년인데……


 


그 당시 유물론에 빠져있던 이십대의 나는 마르크스의 논리에 따르면 내 스스로 박정희를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주장을 했다. 그 글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물론의 전제인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경제이며 그것이 제도 및 정치까지 규정한다'는 것. 경제는 민주주의가 안착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단기간에 경제를 발전시킨 박정희의 지도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다른 유물론의 전제는 '처지는 의식을 규정한다'이다. 내가 아장아장 걸어다녔을 때 피격 당한 박정희. 난 그가 만든 시대의 단물을 받아먹고 자랐다. 난 밥을 굶지 않고 학교를 다녔으며 '보릿고개에는 라면을 먹으면 되지'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대에 유년기를 보냈다. 나의 학창시절은 육체노동에서 해방되었다. 그런 내 존재는 자연히 먹고사는 것 이외의 것에 가치를 둘 정도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내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성의 미래를 획득한 실존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 박정희를 비난할 수 있는 권리를 일정부분 박탈당했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내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가 비난의 권리를 일정부분 박탈당했다면 그 권리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박정희 독재로부터 탄압받은 사람들이며, 그들은 독재타도를 위해 한평생을 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난의 권리를 가지고서 그것을 맘껏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이후 세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다만 우리가 박정희를 온전히 비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므로 합리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 글의 결론은 지금 박정희의 이름을 팔고 있는 세력에게 향한다. 죽은 박정희를 파내 기어이 주석궁을 만들어 그곳에 생미라를 만들어야 할 듯 애타게 부르짖는 자들. 김일성이 호랑이를 타고 왜놈들을 무찌르고 나서 북 인민의 손을 잡아주자 모두들 목놓아 울었다는 전설을 만들었듯이, 파독 광부들이 있는 독일로 날아가 애국가를 끝내 마치지 못하고 그곳에 모인 광부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독일 총리까지 통곡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지도자 박정희'를 만들어내려는 이들.


이들이 과연 박정희를 존경해서 그 따위 날조를 하는 것일까?


 



박정희란 이름의 방패 뒤에 숨은 놈, 얼굴 까면 가관일듯


 


나는 그들이 박정희라는 뚫리지 않는 방패 뒤에 숨어 지조때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단지 법을 유린할 수 있는 그들만의 자유와 선거를 통한 자리 획득이 중요한 것이다. 박정희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자들은 가장 부패한 자들이다. 나는 걍 아쌀하게 박정희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좌우 공히 인정했으면 한다. 독일이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 같은 독재자를 인정하며 그의 공과를 평가하듯이 우리도 박정희를 걍 뛰어난 지도자 정도로 인정하고 그의 이름을 팔아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엔 박정희의 독재가, 그가 행했던 헌법의 유린이 마음에 걸리는가? 나는 박정희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시대에 우리 민초는 민주주의와 공화국에 대한 개념확립이 있었는가가 의심스럽다. 이승만에서부터 김영삼까지, 해방 후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과연 민주주의와 공화국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나 싶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을 스스로 왕처럼 여기지 않았을까? 그들은 대한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그럴 듯한 국호를 가진 나라의 대통령이기보다는 남한의 이었지 싶다.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조차, 서거 후 관 속에 들어갈 때에는 곤룡포를 입었다지 않는가?


 



김대중 역시 '제왕적 대통령'이란 수사에서는 자유롭지 않았다.


 


과연 그들만이 스스로를 왕이라고 생각했을까? 혼자만 그렇게 여긴다면 그는 또라이에 불과하다. 난 그 시대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왕과 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음을 믿었다고 여긴다. 국민이 주권을 대통령이라는 권력자에게 잠시 양도한 것이라 생각한 것은 소수의 지식인과 의식화된 일부 노동자뿐이었다. 대부분은 선거를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해서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갈아치우듯이 1공화국, 2공화국, 무슨 게임의 테크트리 진행되듯 여겼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을까? 역사는 4.19 이후, 그 당시 장면 내각을 헌정사상 가장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또한 가장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내각으로 기록한다. 좌우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그 무렵 검증되지 않은 이데올로기들은 서로를 편갈랐고,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절차적 민주주의는 때로는 비효율적이었으며, 그것을 감내하기에 민중들은 배고팠다.


 


비스마르크는 현재의 독일을 만든 훌륭한 지도자로 여기지만 사실 그는 독일이 하나의 체제가 되기 이전, 그러니까 여러 나라가 임시로 합쳐진 프로이센 왕조의 지명직 재상에 불과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런 과도기에 독재를 통해 통일독일의 터를 닦은 것이다. 독일 역사는 그런 식으로 비스마르크가 독재라는 늪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게 하면서도 그의 공은 평가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이전 대한민국에서 독재를 통해 경제라는 초석을 다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헌법이 자리잡기 위해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에는 언제나 과도기가 있기 마련이다. 1공화국부터 문민정부까지의 시간을 퉁칠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호심리학자 라깡은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고 했다. 적절한 네이밍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그래야 쥐새끼처럼 박정희 코스프레하며 사기질 치는 인간이 권력을 차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비스마르크를 '평가'하여 그를 졸업했다. 우리는 언제 박정희를 졸업할 건가.


 


우리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소모적인 갈등을 줄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하준의 일련의 저작을 통해 박정희와 대기업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자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다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혼란은 갈등을 잠재울까? 아니면 다시 그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것일까? 사실 나는 이 부분을 흥미롭게 주목한다. 다만 장하준 저서를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장하준은 분명 그의 저서에서 여러차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언급을 했다. 다만 그의 전공이 경제이고 그것도 대안경제이다 보니, 그 점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았을 뿐이다.


 


참고로 한불로 님의 글에 달린 몇몇 댓글에 대한 나만의 대답을 하자면 이렇다.


국민의 힘만으로 경제가 일어났다는 해묵은 논리가 있는데 그에 따르면 MB가 경제를 망쳐도 조금만 걱정하면 된다. 다시 훌륭한 국민이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민족이니까. 또한 같은 이유로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도 평가 절하해야 한다. 훌륭한 국민이 그렇게 한 것이지. 어떻게 일개 대통령 따위의 공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번 대선 어찌되든 걱정할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말일 뿐이다.


 



이런 말은, 도망가기에 참 편한 말이다. 국민만 남고 자기들은 사라진다.


 


또한 장하준은 박정희의 사회주의적 경제관에 주목한다. 경제 수치보다는 오히려 중공업과 사회 기간망 확충, 유치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의 개입, 이윤 분배에 국가가 적극 개입했던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잠재 성장률과 장기적으로 먹거리를 확충하려 했던 그의 노력에 대한 재평가이지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이나, 혹은 그의 타락했던 사생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정치혁신은 그의 글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상기해야 한다.


 


박정희의 경제관은 그를 비판했던 급진 좌파와 합리적인 민주보수에 의해 독재와 분리되지 못하고 함께 비판받았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그의 경제관은 개발독재라는 이름과도 분리되어야만 한다. 나는 박정희의 경제관에서 진보가 얻을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병든 지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재평가해야 하며, 참여정부의 과오를 극복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또한, 장하준이 부르짖는 대안경제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가 저서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가 우리나라의 주류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계의 고질적인 카르텔. 그 카르텔을 부수는 방법은 여론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 정부는 장하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 원래 하나의 글에 최초 언급한 네 사람, 박정희-리영희-김대중-노무현을 모두 논하려 했으나 글이 길어지는 통에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하나 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박정희 시대에 대한 현재의 관점에서의 냉철한 평가와 반성, 복수가 아닌 갈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하나 더 말하자면 그녀의 아버지가 적극 개입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장녀인 그녀의 베트남 국민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리에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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