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onesixth 추천4 비추천0
2014. 01. 07. 화요일
독투불패 onesixth






2.jpeg


솔직히 졸라 무섭다. 북한의 북자만 나와도 노동의 노자만 나와도 봉변당하기 딱 좋은 세상에, 무려 종북좌빨의 수괴인 마르크스를 읽으려 하다니 도무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씨바, 졸라 혁명을 준비하라느니, 반란을 획책하라느니, 그런 이야기로만 가득하면 어떡하지? 이러다 잡혀가는 거 아님? 이라는 두려움으로 심장마저 쫄깃해져 버렸다.

그런데... 첫장을 펴는 순간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뭔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내용 따위, 그냥 그런 거 없다. 일단 첫 느낌은 <국부론>의 노모패치가 아니라... 확장판, 혹은 DLC 같다고나 할까. 왜 가끔씩 그런 게임들 있지 않은가, <심즈>처럼 확장판을 깔았더니 다른 게임이 되었더라 하는 게임들, 그러면서도 꼭 오리지널 원판이 필요하다더라 하는 게임들, 그렇게 <자본론>은 원판보다 비싼 확장판이었다. 친절하게도 중간중간 <철학의 빈곤>, <잉여가치론> 등의 추가 DLC를 비롯, 리카르도, 밀 등의 또 다른 확장판들이 있다는 안내도 잊지 않는다.

음, 뻘소리는 이쯤만.

아무튼 양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거의 3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쪽수에도 미완의 저작이라는 게 함정.

18.jpg
두터운 입술은 좋지만, 두터운 책은... 부담스러운 거다


마르크스 생전에 집필이 완료된 제1권은 그래도 읽을 만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논의와 주로 생산에 대해서 논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제2권은 제1권에서 논의된 생산품이 어떻게 유통되는가에 대한 내용이지만, 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설계도를 무턱대고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라, 비전공자에 독일어 원문은커녕 한글로도 눈이 핑핑 돌아가는 나 같은 사람은 겨우 개략적인 형태만 간신히 가늠해 나갈 뿐이었다. 제2권을 읽다보면 정리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거의 푸념에 가까운 엥겔스의 고백이 틈틈이 등장하는데,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거의 비슷한 고통을 느낄 수 있으리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마지막 제3권은 제2권에서 논의된 상품유통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즉 유통의 기반이 되는 신용화폐와 은행에 대해 다룬다. 제2권에 비해서는 훨씬 정리도 잘 되어 있고 살코기도 많아서 한결 읽을 만하지만, 마치 불타버린 악보처럼 갑자기 끝나버리는 게 아쉬운 부분. 해설서들만 넘쳐날 뿐 정작 그의 저서들은 거의 번역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참고로 별도로 편집된 제4권을 포함,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원문이나 영역본은 웹상에서도 쉽사리 구할 수 있으니 능력자분들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하겠다.

그럼 마르크스는 왜 이렇게 방대한 책을 쓰려했던 것일까? 이미 다들 아시는 내용이라 시시하겠지만, 일단 1848년이라는 해부터 먼저 기억해 두어야 한다고 말해야 될 것 같다. '여러 국민들의 봄',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를 여는 첫 표제로 1848년을 정의내린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확립된 1815년의 빈 체제의 지상과제는 오로지 안정이었다.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서로 협력하자, 뭐 말로도 꽤 그럴싸하고 전쟁을 멈추자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있을까 싶지만, 알고 보면 이 안정의 정체란 지배층의 안정을 위한 대동단결에 지나지 않았다. 즉,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을 상대로 한 동맹이었다는 것.


계속 반복되는 전체 인류의 빈곤이나 행복은 이런 분배양식을 유지하는 문제에 비해서 전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폭력, 기만, 우연의 결과들을 영속화하는 것이 안정이라고 불려왔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비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인류의 모든 생산력이 무자비하게 희생되어 왔다. (톰프슨. “부의 분배원리에 대한 연구”)

-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 II>, '제2편 자본의 회전, 제17장 잉여가치의 유통', 도서출판 길, p.399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기만 하고, 프랑스혁명의 불똥은 난데없이 바다 건너 중남미의 독립으로 튀더니,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0년대를 기점으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의 유럽 각국들 뿐만 아니라 멀리로는 캐나다, 인도, 호주 등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에 대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만 했다. 그리고 1848년, 갓 서른이 된 마르크스도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출간하고 혁명에 적극 동참하지만, 결과는...


19.jpg



당시의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또 하나, 이 혼란의 와중에 마르크스가 이동한 경로에도 <자본론>과 연관지어 볼 만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신문 편집장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완전히 찍혀버린 마르크스는 1843년 쾰른에서 쫓겨나서 프랑스 파리로 도망치고, 그리고 혁명이 좌절된 1848년에는 다시금 파리에서 쫓겨나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영국 런던으로 도망치게 된다. 음, 이게 뭐가 흥미롭냐고? 음, 이걸 우리나라를 비유해서 말하자면, 안산에서 살다 도망쳐서 인천으로 가서는, 인천에서도 쫓겨나서 서울로 온 셈이라고나 할까.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갓 공업화가 시작되는 단계였고, 프랑스는 상당히, 벨기에는 경제규모에 비한다면 프랑스보다도 더욱, 그리고 영국은 말 그대로 빅토리아조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던 산업국이었다. 즉 우연이라기엔 참 기이하게도 마르크스의 망명길은 산업화의 발전 단계와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프로이센 출신의 시골혁명가에게 파리는 사회주의와 경제학을 가르쳐주었고, 마침내 도달한 여자는... 아니 런던은 세계의 미래와도 같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것 하나만 놓고 본다면, 실현되는 노동을 극도로 절약하는 생산방식이다. 반면 그것은 어떤 다른 생산양식보다도 인간을 낭비하는 생산방식이기도 하다.

- <자본 III>, '제1편 잉여가치의 이윤으로의 전화와 잉여가치율의 이윤율로의 전화, 제5장 불변자본 사용의 절약', p.121


신용제도는 이른바 국립은행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대규모 화폐거래업자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이 둘러싼 형태를 이루는 거대한 하나의 집중된 제도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이런 기생계급들에게 산업자본가들은 주기적으로 파멸시키고 또한 극히 위험한 방식으로 현실 생산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그런데 이들 무리는 생산이란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며 또 생산과 아무런 관련도 맺고 있지 않다.

- '제5편 이자와 기업가수익으로의 이윤 분할, 이자 낳는 자본, 제33장 신용제도하의 유통수단', p.746


'일류국가라더니, 역시 킹왕짱, 졸라 잘 사는 나라라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훨씬 살 만하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더라면 아마도 <자본론>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런던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말 그대로 거대한 빈민굴, 비참한 런던의 풍경에 충격을 받는다. 침대 하나짜리 좁은 방에서 부부가 3~6명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예사로운 일이었고, 도시화로 계속해서 너도나도 몰려들다보니 그런 좁은 방의 집세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싸기만 했다. 위생? 그런 건 아직 개념도 없었다. 툭하면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혹여라도 공황이라도 닥치게 되면 그냥 길거리로 직행,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기가 무섭게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가야하는 현실이었다. 구빈법이 있기는 했지만 빈민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보니 그냥 아예 없는 것보다는 겨우 나은 수준.

게다가 아일랜드의 상황은 더욱 끔찍했다. 1845년부터 1852년에 이르는 대기근으로 인구의 1/4이 굶어죽고, 또 다른 1/4이 기약없는 강제이민에 오르는데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지배층은 '멍청하고 게으른' 아일랜드인만을 탓할 뿐 지주들의 욕심에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려 하지 않았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이 시기를 이렇게 평가한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였으며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과 불신이 교차했으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희망의 봄인 동시에 절망의 겨울이었다. 무엇이든 가능해 보였지만 정말로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제르미날>도 19세기 후반의 유럽사회를 잘 그려내고 있다.

20.jpg
찰스 디킨스 횽


이야기가 좀 샜지만 다시 돌아와서, 아무튼 마르크스는 이런 영국의 상황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렇다. <자본론>은 '우리나라(프로이센) 민중들이 가난한 게 그저 나라가 후지고 가난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만, 씨바, 여긴 더 심하잖아'라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가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에 고민의 무게를 두었다면, 마르크스의 시선은 '왜 나라가 부유해져도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 쪽으로 향한다. 더 이상 '인간의 이기심'만으론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성이나 윤리에서 해답을 찾는 대신 현실의 구조를 뜯어보기로 한다. 사상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현상으로 사상을 설명해 보자는 것, 이게 바로 유물론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에 대해 신하로서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하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 <자본 I>,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p.116


폭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힘이다.

-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 제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 p.1007


간단히 소개하는 글만도 너무 길었던 것 같다. 그럼 마르크스가 바라본 현실의 구조에 대해서는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줄여보도록 하겠다. 김수행 교수님의 수업보다도 더욱 쉽고 깔끔하고 명확...할 리도 없고, 게다가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벙커1특강을 이용하거나 혹은 직접 읽어보는 것을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173.jpg

김수행 교수님의 직강

매주 수요일마다 총10. 2014년 1월 8()~3월 12()

bunker1




capital1.jpg


엄청 귀찮았지만, 딴지가 늘 자랑하는 최첨단시스템을 나도 해보고 싶었다. 무려 이미지의 활용. 1-1과 1-2의 차이가 한 방에 들어오시는지 모르겠다. 고전경제학과 <자본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 가치생산인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데에 있다. 고전경제학에서는 완성된 물품, 즉 상품을 보고 가치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반면 마르크스는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 상품 vs 노동이라는 걸 일단 기억해 두자.

상품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고전경제학에서는 개별상품에서의 가격구성으로 생산과정을 파악한다. 즉 재봉틀로 원단을 꿰어서 시장에 내놓은 청바지 한 벌의 가격에 따라 이윤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냥 재봉틀만 있다고, 원단만 있다고 해서 짠~하니 청바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다. 청바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청바지를 만드는 사람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자면, 청바지를 만들기 위해 노동시간을 투여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말이 되겠다. 마르크스는 청바지 하나 하나의 가격으로 이윤을 따지는 건 청바지를 만들기 위해 투여된 노동을 감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이라는 개념도 꽉 붙들어야만 한다. 그는 단위시간 동안 노동이 투여되어 생산된 모든 상품을 통해 이윤을 말하기 때문이다.

1-2)를 예를 들어보자. 일단 편의상 청바지 1벌=1만 원이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8만 원만큼의 재산이 있는 나는 뭘로 돈을 벌면 좋을까를 고민하다 청바지를 만들어서 팔기로 결심한다. 재봉틀도 사고, 원단도 떼어 오고, 이래저래 구색을 갖추느라 투자한 돈을 합해 보니 총 6만 원을 지출하게 되었다. 씨바, 주머니엔 달랑 2만 원만 남았다.

구색도 갖췄으니 일할 사람을 구해야 된다. 모집공고도 내고 그 중에 마음에 드는 한 놈을 고용하기로 했다. 이 때에 사장인 나는 고객, 모집 공고로 모여든 구직자들은 판매자가 된다. 나는 졸라 짱짱 정직한 고객, 딱 8시간만 일하는 조건으로 2만 원을 주기로 하고는 딸기 씨와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렇다고 2만 원을 바로 딸기 씨에게 주지는 않는다. 노동이 완료된 후에 임금을 지불하는 게 통례이니까~

21.JPG
딸기 씨~


딸기 씨는 8시간 동안 열심히 일해서 10벌의 청바지를 만들어냈다. 유통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생략하기로 하자.(<자본론> 제2권을 참조) 만들어내자마자 짠~하니 다 팔려서 10만 원의 수익을 얻었다. 이 중 6만 원은 이미 지출한 투자금을 회수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4만 원이 딸기 씨가 일해서 새롭게 창출해낸 가치, 노동생산성이 된다.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졸라 짱짱 정직한 고용주, 딸기씨에게 임금 2만 원을 지불하고 나머지 2만 원은 내가 갖는다.

고전경제학은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은 이윤율을 2만 원/8만 원, 25%라고 한다. 생산비용(생산수단+원료+보조재료+임금)에 대비해서 이윤율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마르크스에게는 '시간'이 중요하기에 생산비용 대신 노동생산성을 대비시킨다. 딸기씨가 생산해 낸 4만 원 중에서 2만 원이 나에게 돌아왔으니 잉여가치율은 50%가 된다. 즉, 어느 쪽이든 이윤량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내가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씨바, 나는 졸라 짱짱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샌가 사장놈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내 주머니엔 얼마가 있을까? 재생산에 들어간 6만 원을 제하고, 준비금 2만 원과 잉여가치 2만 원을 합하면 총 4만원. 그럼 다음 그림~

capital2.jpg


어차피 딸기 씨에게 사랑도 못 받고, 일단 돈맛을 보니 조금씩 욕심도 든다. 수치심에 찌든 나는 딸기 씨에게 임금동결에 4시간의 야근을 추가로 요구한다. 노동시간이 1.5배로 늘어난 만큼 원료비 등의 전체적인 투자비용도 그만큼 증가하는 게 당연하다. 재생산을 위해 투자한 6만 원에다, 주머니에 있던 4만 원 중에 다시금 3만 원을 더 지출해야만 한다. 주머니엔 딸랑 1만 원 밖에는 없고... 왠지 손해를 본 것만 같다.

먹고 살아야하는 딸기 씨는 싫은 눈치가 가득하지만 마지못해 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생산량은 10벌에서 15벌로 1.5배가 증가되었다. 역시나 만들어내자마자 짠~하니 다 팔려서 총 15만 원의 수익을 얻었다고 하자. 앞서 말한대로 재투자되는 9만 원과 임금 2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4만 원이 내 주머니로 쏘옥 들어온다.

이윤량, 즉 잉여가치량은 이제 2만원에서 4만원으로 200%가 되었다. 그럼 이윤율은 얼마나 될까? 4/11, 즉 27.5%로 고작 2.5% 상승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잉여가치율은? 4/6, 66%로 16%가 오르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왜 이윤율 대신 잉여가치율을 이야기했는지 슬슬 감이 오시리라 믿겠다.

감이 오지 않으면 클릭

꼭 야근이 아니라더라도, 노동강도를 강화하거나 혹은 생산시설의 확대 혹은 개선 등을 통해 1.5배의 생산향상을 가져오게 된다면 모두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자본론>에서는 임금이나 상품가의 변동까지도 고려하지만 그러다 보면 너무 복잡해지니까 생략. 그럼 다음~


노동자계급 가운데 취업한 노동자들의 과도노동은 산업예비군의 대오를 팽창시키지만, 거꾸로 이 예비군은 다시 그들간의 경쟁을 통해 취업 노동자계층에게 압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취업 노동자들이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물론 자본의 전제에도 굴종하도록 만든다.

- '제23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p.865


capital3.jpg


졸라 짱짱 정직한 나는 딸기 씨에게 무지막지하게 야근을 시키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미 투자된 9만 원에, 내 주머니에 있던 5만 원 중 3만 원을 더 들여 생산시설을 개선하기로 결심한다. 나의 투자 덕에 딸기 씨는 원래대로 8시간만 일하는데도 이제 총 20벌의 청바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모두가 윈윈하는 게 아니고 또 무엇이라 말인가.

그런데 한눈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발견할 수가 있다. 1-2)의 경우 20벌의 청바지를 생산하기 위해선 2명의 고용인이 필요했다. 딸기 씨의 8시간 노동으로 10벌의 청바지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딸기씨 혼자만으로도 20벌의 청바지를 생산할 수가 있게 되었다.

1-2)에서 20벌을 생산하기 위해 내가 2명을 고용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제 내가 60벌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네 명이 아니라) 한 명만 더 고용하면 된다. 또 다시 생산력이 증대되어 3배가 된다면, 내가 120벌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또 추가로 (세 명이 아니라) 한 명만 더 고용하면 충분하다. 생산력이 향상되고 기업이 성장할수록 절대적인 양에 있어서는 더욱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게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는 점차 감소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생산성의 향상은 고용의 상대적 감소와 동일한 의미라는 것. 물론 나 혼자만 청바지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기업도 있고, 라면을 생산하는 기업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딸기 씨만으로도 충분.

이제 투자비용은 12만 원, 임금 2만 원, 잉여가치는 6만 원이 되었다. 따라서 이윤량은 6만 원, 이윤율은 6/14, 23.3%이고, 잉여가치율은 6/8, 75%가 되었다. 잠깐! 또 뭔가 이상하다. 정리해 보자.


      이윤량       이윤율 잉여가치율
1-2) 2만원 25% 50%
2) 4만원 27.5% 66%
3) 6만원 23.3% 75%


이게 바로 집중의 효과. 생산에 있어 불변자본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잉여가치율이 증가하는 데에도 오히려 이윤율은 떨어지게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게 되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선진국이 고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대기업이 고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마치 성장이 지체되고 성장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윤량과 잉여가치율로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는 또 하나를 더 지적한다. 자본은 이윤율을 올리기 위해 불변자본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플레이션이 되겠다. 통화가치가 하락하게 되면 이미 투자된 자본의 가치는 하락하고 상품의 가격은 상승하므로, 따라서 이윤율은 상승하게 된다.


이윤율의 저하와 함께 개별 자본가가 노동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손에 지녀야 하는 최소 자본량의 크기는 증가한다. 즉 노동의 착취 일반에 소요되는 최소 자본량, 다시 말해 사용되는 노동시간이 상품생산에 필요한(즉 상품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노동시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자본량은 증가한다. 동시에 자본의 집적도 증가하는데 왜냐하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이윤율이 낮은 대규모 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소규모 자본보다 더 급속하게 축적을 이루기 때문이다.

- "자본 III", "제3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제15장 법칙의 내적 모순의 전개", p. 331

완전히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순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가치나 거기에 포함된 잉여가치,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생산력의 절대적 발전을 향한 하나의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가본가치를 유지하고 그것은 최대한 증식하는 것(말하자면 이 자본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그것의 특성은 기존의 가본가치를 수단으로 삼아 바로 그 자본가치를 최대한 증식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이윤율의 저하, 기존 자본가치의 하락과 이미 만들어진 생산력을 희생시키는 노동생산력의 발전 등이 있다.
... (중략) ...
자본주의적 생산의 참된 장애물은 자본 그 자체이다. 이는 곧 자본과 자본의 자기증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이자 종점이며, 동기이자 곧 목표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p. 330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의 공급과 같다.

- '제7편 수입과 그 원천, 제50장 경쟁의 허상', p.1147


마르크스가 얼마나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지는 굳이 더 덧붙이지 않더라도 익히 잘 아실 것 같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현실감각에 부실한 대안제시가 마르크스의 명암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디까지나 방법론일 뿐(이것도 후하게 쳐줘서 그렇다는 거다. 너무 과격하기도 할 뿐더러 변증법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이용했다는 문제도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생각이 바뀌는 데만도 몇 년, 더러는 몇 세기씩도 걸린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에는 동감하지만, 토대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짠~하고 바뀔 수 있다는 가정은 애초에 무리), 구체적인 모양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물음표가 찍히게 된다. 자본가라는 게 없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자본가를 만들어 내야 할 처지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도 잘 알려진 변명 중 하나.


그리고 하나만 더 덧붙이고 싶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점이다. 아담 스미스가 지배층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너님 나쁜 놈!이라고 하지 않았듯, 마르크스 역시 자본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너님 나쁜 놈!이라고 하지는 않았다(성격 때문에 가끔은 그랬을지도...). 자본가 개인들의 탐욕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탐욕이 만들어진다는 것. 왕정이 왜 비판받는지를 떠올려 보면 되겠다. 왕 개개인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치가 않다. 왕정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부패의 여지가 많고 사회적 안정성에서의 위험이 높다는 게 문제다. 다들 아시겠지만 괜히 오버해 봤다.


재산도 없는 사람이 산업가나 상인으로 신용을 받는 경우에도, 그것은 그가 자본가로서 기능하고 빌린 자본으로 불불노동을 취득할 것이라는 신뢰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에게 신용이 주어지는 것은 그가 잠재적인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학적 변호론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이 사정, 즉 재산은 없지만 정력과 건실함과 능력과 사업지식이 있는 한 남자가 이렇게 해서 자본가로 전화할 수 있다-사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각 개인의 상업가치가 다소 정확하게 평가된다-는 이 사정은, 기존의 개별 자본가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새로운 기사(행운을 좇는)들을 끊임없이 전장에 내보내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자본에 의한 지배 자체를 강화하고 이 지배의 토대를 확대하며 사회의 하층으로부터 신선한 인력을 끊임없이 보충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마치 중세의 가톨릭교회가 신분과 출생과 재산에 상관없이 인민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두뇌들로 그 위계체계를 형성함으로써 성직자 지배와 속인들에 대한 억압을 강고하게 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가장 뛰어난 인물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지배는 더욱더 강고하고 위험한 것이 된다.

- '제5편 이자와 기업가수익으로의 이윤 분할, 이자 낳는 자본, 제36장 자본주의 이전', p.820


capital4.jpg


문득 <자본론>을 읽던 와중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경제의 3대 주체를 떠올리게 되었다. 정부, 기업, 가계, 그런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너님들은 어떤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가? 정부? 기업? 가계? 생각들이 다들 다르시겠지만, 무식한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가계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부나 기업이 만약 없더라도 가계는 있을 수 있다. 가계란 곧 사람이니까, 가계가 없는데, 즉 사람이 없는데 정부나 기업이 있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설마하니 아직도 낙수효과 운운하는 분들이야 없겠지만서도, 아마 마르크스가 낙수효과라는 단어를 들었다면 이렇게 바꾸어놓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상품(분수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가계의 노동(땅 밑에서의 펌프질)이 결국 유통(물)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이다.

길고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다. 유통을 생략하다 보니 마르크스가 설명한 공황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고, 여러모로 아쉽기만 하다. 오독이라든지, 혹은 여러 부실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는 개뿔, 벙커1특강을 찾아보시라! 졸라!






독투불패 onesixth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