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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으로 브라질 축구는 포르투갈의 앙골라 노예무역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브라질 축구의 한 단면만 슬쩍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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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명문 축구단 SC 코린티안스는 비범한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축구는 하층민의 놀이였고, 놀이보다는 패싸움에 가까웠다. 지금도 본토에서는 기층민의 정체성을 제법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900년대 브라질에서 축구는 선진국에서 온 선진문물이었다.


브라질에서 축구는 상류계층의 여가로 시작되었다. 그러면서도 축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노동계층의 이목을 끌었다. 1910년, 철도노동자 다섯 명이 결의했다.


"왜 상류층만 축구팀을 가지는가?"


그들은 의기투합해 SC 코린티안스를 결성했다. 새로운 축구단의 철학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따 왔다.


팀의 모토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팀’


팀이 처음 소유할 공을 사기 위해 창단 멤버들과 이웃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야 했다. 이때 정해져 아직도 이 팀이 스스로를 부르는 아호는 ‘띠므 두 포부(Time Do Povo)’. 민중의 팀이란 뜻이다. 물론 ‘포보’는 영어의 피플이나, 여기서는 계급적 색채를 띠므로 국민이 아니라 민중이다.


코린티안스의 정체성은 축구의 원초적인 그것과도 맞아 떨어진다. 두 마을의 성인남자 총전력이 맞붙는 원래의 축구는 수백 년 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실에 의해 여러 번 금지 당했다. 귀족들은 기층민들이 내뿜는 열기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런데 코린티안스에게 과연 이념이 있었던가?
그것은 하층민만 이해할 수 있는 기질, 성향이 아니었던가?


놀랍게도 코린티안스에겐 이념이 있다. 소크라테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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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풀네임은 소크라테스 브라질레이루 삼파이우 지 소우자 비에이라 지 올리베이라. 그렇다. 이 사람은 그리스의 그 철학자가 아니라 브라질인이다. 그리고 축구선수다. 소크라테스는 브라질의 다른 유명인들과 달리 본명이다. 펠레도 가린샤도 모두 별명이 본명을 대체한 경우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는 별명이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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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조 소크라테스처럼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의학박사에 소아과 전문의였다. 그리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였으며 체 게바라를 존경한 혁명적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역시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인생을 보낸 양반으로 아들의 성장기에 깊은 자욱을 남겼다. 의사 면허는 프로선수 생활 중에, 철학박사 학위는 은퇴 후에 땄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무엇보다 전설적인 축구선수로 남아 있다.


193cm의 장신에 마르고 딱딱한 몸매, 함부로 기른 수염의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원조 소크라테스처럼 대단한 추남이었지만 인간적인 기품과 플레이의 우아함으로 필드 위에서 미스테리한 존재였다. 스포츠역학을 배신한 듯한 신체능력과 경기를 읽는 천재적 두뇌가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썼으며 어떤 각도에서도 상대의 예측보다 빠르게 치명적인 패스를 찔러 넣었다. 무엇보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듯, 잔디 위를 미끄러져가는 그의 신체는 경이롭다. 그는 프로생활 내내 담배를 하루 3~4갑씩 피웠으며 언제나 알콜중독 상태였다. 하프타임에 담배는 물론 알콜도 섭취했으며, 경기 중에 짬을 내 라인 바깥에서 한 모금씩 빨기도 했다.


특유의 지적인 면모와 카리스마로 20대 때부터 그 브라질의 축구대표팀 주장을 무려 66번이나 맡았다. 그의 대표팀 동료는 지쿠, 세레조, 팔카웅이었다. 이 네 명을 일컬어 황금 다이아몬드, 혹은 황금의 사중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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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다이아몬드의 지휘자는 소크라테스, 주인공은 해결사이자 ‘하얀 펠레’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은 지쿠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팔카웅으로 시작해 동료들의 화려한 플레이가 남긴 공백을 수습하는 ‘일꾼’ 세레조를 거쳐, 소크라테스가 공격명령을 내라고 지쿠가 타격하는 것이 황금 다이아몬드의 구조였다.


이 사각편대의 출현은 70년대의 토털풋볼 출범의 결과다. 개인기에 의존한 공격 위주의 브라질 축구는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토털풋볼의 조직력과 끊이지 않는 유기적 플레이에 더 이상 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수 개개인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브라질 축구의 전통적 강점에 최소한의 조직력을 부여해, 최고의 선수 네 명으로 이루어진 공격 편대를 구축한 것이다.


황금 다이아몬드가 가장 빛났던 1982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그러나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회 최고의 팀이었지만 이탈리아의 ‘골든 보이’ 파울로 로씨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고 말았다. 다이아몬드는 공격의 시작부터 마무리를 주도하지, 수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조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다이아몬드 뒤편은 허허벌판이었다.


많은 이들이 1982년의 브라질 대표님을 축구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꼽는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실패는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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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다이아몬드는 빛나다 말았어도 소크라테스는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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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적은 국제대회에서 만나는 외국이 아니라 조국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학구열을 불태우고 아버지와 그리스 철학을 논쟁하던 10대 시절부터 군부독재를 경험했다. 그는 대표팀 동료들이 고액을 받고 유럽 팀에 이사를 가는 동안, 거꾸로 민중의 팀 코린티안스에 입단했다.


“더 나아진 조국에 골을 바치겠다.”


소크라테스는 조국 브라질의 민주화투쟁에 헌신하기 위해 외국행을 거부했다. 코린티안스 연고지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결사체를 조직했다. 결사체의 핵심은 다름 아닌 코린티안스 프로선수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휘어잡았지만 독재를 자행하지는 않았다. 그와 팀원들은 민주주의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수결로 정했다. 심지어 점심 메뉴마저도 다수결이었다. 스폰서의 로고가 들어갈 유니폼 뒷면 자리에는 데모크라치아, 포르투갈어로 ‘민주주의’를 새겨 넣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다른 팀도 아닌 코린티안스의 선수들은 민주투사여야만 했다. 이는 펠레 우상화 작업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펠레는 가난한 흑인 출신이지만 축구황제이자 브라질의 상징이 되었다. 군부독재정권은 펠레 우상화작업으로 축구에 목마른 브라질 민중을 눈속임하고자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펠레는 흑인 하층민들에게 훌륭한 마약이었다. 거꾸로 상류층 출신인 소크라테스는 가난하고 못 배운 팀 동료들을 설득해, 스스로 다수결의 ‘한 표’로, 낮은 곳으로 임했다.


지금도 ‘정의’를 새긴 흰 머리끈을 이마에 동여매고 브라질 기득권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상대팀의 적진을 바라보는 소크라테스의 사진에는 위엄과 기품이 넘쳐흐른다.


왜 다수결일까?


국내 프로리그는, 말 그대로 리그전이기 때문이다.


토너먼트에서는 한 번만 져도 실패한다. 그러나 리그전은 여러 번 투쟁해 승패를 종합한다. 원조 소크라테스는 민중의 시기로 사형 당했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민주정을 ‘중우정치’라 비판했다. 맞다. 다수결이라는 이유만으로 옳다는 법은 없다. 다수결은 소크라테스 처형과 같은 실수를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보여준다.


그러나 이전의 실수를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고 공유하며,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민주주의는 유리하다. 우매한 민중의 다수결은 천재의 독재만 못할 수 있지만 히틀러의 소련 침공과 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방지하기도 한다. 그 결과 코린티안스는 승승장구한다.


소크라테스는 독재정권의 눈엣가시였다. 소크라테스의 입단과 함께 시작된 코린티안스의 황금기가 브라질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존재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브라질 군부는 소크라테스를 제거할 수 없었다. 우민화작업의 일환으로 축구를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만든 것은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는 펠레가 있었지만, 펠레의 발밑 바로 아래 소크라테스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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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5일은 브라질 총선거일이었다. 11월이 되자 코린티안스 선수들은 “Dia 15 vote(15일에는 투표를)”이라는 문구를 등에 새기고 뛰었다. 브라질 군부는 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것이 브라질이 민주화되는 시작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현재 브라질 저널리스트들은 소크라테스의 투쟁이 군부독재 종말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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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역사를 엿볼 때에는 엄밀해야 하니까. 하지만 거꾸로 역할이 없었거나 미미했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는 광장에 운집한 200만 명의 군중 앞에서 민주화를 위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 연설 내용이 특이하다.


“군부가 대통령 선거를 국민직선제로 헌법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뛰어버리겠다.”


군부에 대한 협박이었다. 브라질 국민들로 하여금 나 소크라테스를 잃게 할 것인가, 아니면 직선제를 채택할 것인가. 군부의 반동은 극렬했다. 그들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직선제 운동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정치인들이 연금 및 사찰당하고 수많은 고문이 자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남아일언중천금, 본인의 말을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의 피오렌티나로 이적한다. 1984년이었다. 일련의 사건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귀결된다. 아래로부터 들끓은 민중의 분노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선거에서조차 민주화인사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소크라테스는 군부에 대한 응징으로 브라질 현지에서 자신을 없앴다. 이 행동을 두고 남미의 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민주화 투쟁이 드디어 필드를 벗어나 민중으로 스며들었고, 그의 정치적 유산과 브라질 민주화는 맥을 같이한다고 평한다.


이 정도라면 브라질의 민주화를 추동하는 데 있어 소크라테스의 역할은 대단했거나 상당했다고 평하는 게 공정하리라 본다.


어쨌든 약속만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피오렌티나에서 딱 한 시즌만 뛴 후 민주화된 조국으로 유턴했다. 피오렌티나는 돈다발을 싸들고 입맛을 다셨지만 그는 여전히 ‘더 나아진 조국에 골을 바치고픈’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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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기원은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치고받은 영국의 패싸움이다. 폭력적인 집단이기주의도, 민의의 숭고함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그 중에서도, ‘그깟 공놀이’를 민족이나 국가도 아닌 정의 그 자체의 투쟁으로 변모시키고 심지어 성공한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유일하다.


이토록 특이한 축구선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은퇴 이후 병원을 개업했고 저술가, 축구 및 정치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토록 지적인 사람이었지만 어째 다름 아닌 축구에 대해서만큼은 영 허당이었다. 무슨 말이고 하니, 그는 축구를 위대한 예술로 보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러니 현대적인 축구전술은 그에게 영혼 없는 기계처럼 보였다. 아이러니다. 그 자신 황금 다이아몬드의 중심축이자, 필드 위의 전술가였으니 말이다.


은퇴한 소크라테스의 축구 해설은, 언변은 좋아도 어딘가 붕 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축구는 민중, 동지와 함께하는 서슬 퍼런 악을 향한 두려움 없는 돌진이다. 그에게 모든 것이 수치로 계측되는 현대축구는 투쟁이 아닌 그저 스포츠였다. 선수들은 전사가 아닌 그저 스포츠맨이었을 거고, 팀 동료는 동지가 아닌 경쟁자에 불과했으리라. 바로 그러했기에 그의 해설은 전문가적 차원에서 수준이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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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그답게 죽었다. 평생 애주가에 애연가였던 그는 급성 알콜 중독에 의한 장내 출혈로 쓰러져 생사를 오가다가 57세의 이른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의사였던 만큼 결과를 모르고 술을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도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어본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는 방법 중 하나일 테다.


그의 기행은 많지만 이 포스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헌데 한 가지 더.


브라질의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원조 소크라테스와 한 가지를 더 닮았다. 그의 말년 모습은 지금 남아있는 소크라테스 대리석상과 꼭 닮았다. 원조 소크라테스도 전쟁터에서는 강력한 병사였고 현실에서는 석공이었으며 기묘한 정치가이자 위대한 철학자였다. 축구선수 소크라테스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많이도 겹친다. 그런데 중년 시절의 외모마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니 여러모로 묘하다. 미남끼리는 닮기 쉬워도 추남끼리는 그러기가 힘든데 말이다.


철학자가 아닌 축구선수 소크라테스. 이런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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