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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23. 수요일

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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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때는 몰랐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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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EBS 세계 테마 기행에 ‘볼리비아’가 나왔다. 티비 속의 안데스 고원도 우유니 사막도 참말 아름다웠다. 아 그래 내가 저 풍경 속에 있었던 적이 있었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으로 방송을 봤다. 볼리비아는 정말이지 끝내주게 아름답다. 하지만 그 곳에 있을 때는 사실 잘 몰랐다. 저만큼 아름다웠는지. 몰랐다. 나는.


남편 두와 나는 일상에서는 매우 비슷한 사람이다. 입맛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하고, 그래서 서로 부딪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여행지의 우리는 꽤 다른 사람이었다. 남편 두는 웅장한 풍경을 좋아하지만 나는 시장 구경하는 게 더 좋았다. 남편 두는 과거의 유적지들에 큰 감동을 받곤 했지만, 지금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더 끌리는 나는 그것들에 시큰둥했다. 남편두는 마을 가장 높은 곳에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지만 나는 마을 아래 골목에 있는 게 더 좋았다.


그리고 남편 두가 고생 끝에 바라본 풍경에 몇 배 큰 감동을 받는다면, 나는 고생 끝에 본 풍경에서 고생이 더 크게 남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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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는 고도가 높고 사막이 많다. 그래서 공기가 부족하고 건조하며 춥다. 낮의 태양은 뜨겁다. 조금만 많이 걸어도 숨이 찼고, 안 그래도 건조한 피부는 하얗게 갈라졌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숨이 안 쉬어져서 자꾸 잠에서 깨었다. 추워서 내복을 껴입어야 했고 손톱엔 자꾸 까만 모래 먼지가 끼었다. 씻으려고 수돗물을 틀면, 물에 벌건 불순물이 같이 섞여 나왔다. 볼리비아에서 나는 자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지금 타고 있는 버스가 닿는 곳이 한국의 우리 집 앞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는 가습기도 있고, 푹신한 침대도 있고, 따뜻한 물도 콸콸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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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아름다운 볼리비아의 풍광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옆에서 남편 두는 매 순간 감탄을 멈추지 않았고.




티티카카 호숫가 마을 코파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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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니, 수크레, 포토시, 야야구아, 포코아타, 라파즈를 거쳐 볼리비아 여행 마지막 목적지 코파카바나에 왔다. 볼리비아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동안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어서 티티카카 호수를 보고 볼리비아를 떠나야겠다 싶었다. 코파카바나는 배가 다닐 수 있는 호수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티티카카 호수를 끼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 바다처럼 넓은 호수 덕분에 그저 작은 바닷가 어촌마을 같았다.


짐을 풀자마자 남편 두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보자고 했다. 티티카카 호수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싶다고 했다. 전망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해발 4천미터에 육박하는 고도 탓에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데, 저길 올라가자니. 투덜거리며 따라 올랐다. 올라가서 본 반짝이는 넓고 푸른 티티카카 호수는 아름다웠다. 볼리비아에 머문 시간만큼 높은 고도에도 적응되어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시 올라가겠느냐고 물으면 나는 역시나 고개를 저을 것이다.




우리 내일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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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 마을 외곽 길목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든다. 우리에게 먼저 인사하는 볼리비아 사람이라니, 아주 오랜만이었다. 우리의 인사에도 무뚝뚝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니까. 반가운 마음에 마주 보고 웃다가 옆에 같이 앉았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동네 아낙들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볼이 빨갛고 코 아래 콧물이 눌러 붙어 있었다. 옷은 낡았고, 때가 꼬질꼬질 했다. 엄마들은 아이들과 똑 닮아서 누가 누구 엄마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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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걸려있던 카메라로 엄마랑 아이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이 더 몰려와서 친구끼리 형제끼리 또 사진을 찍었다. 들고 다니는 미니 인화기로 그 자리에서 사진을 뽑아 건넸다. 남편 두는 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나는 이름을 외우느라 바빴다.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고 웃고 손을 잡고. 한 번 친해졌더니 엄마들은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눈을 마주보며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자꾸만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꼭 안은 아이에게선 모래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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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찬찬히 사진을 보니, 우리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들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때도 내 볼은 빨갰고, 코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소매에 코를 연신 닦아낸 탓에 때가 묻어있었고.


미니 인화기 필름이 떨어졌다. 마침 해도 지려고 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일 다시 만나요. 필름이 다 떨어졌는데 숙소에는 많이 있어요. 내일 가지고 다시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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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이 늦도록 사진을 뽑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약속한 시간에 다시 그곳에 갔다. 사람들이 몰려있었는데, 왠지 낯설었다. 쭈뼛쭈뼛 살펴보니 어제의 그들이 맞다. 노란 반짝이 치마, 꽃무늬 셔츠, 갈색 숄… 그들은 어제보다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깨끗하게 세수도 했는지 아이들 얼굴도 어제보다 뽀얗다. 사진을 찍고 뽑고, 한참을 놀다가 ‘태양의 섬’(Isla del sol)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헤어졌다. 손을 흔들며 ‘태양의 섬’에 가야 한다고 하니 그곳은 여기보다 위험하니 카메라를 목에 걸지 말고 가방 안에 넣으라고 일러준다. 아 이 선량한 사람들.




거칠어서 더 아름다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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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에서 나는 내내 볼리비아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떠나려고 하니 볼리비아가 그제서야 내 손을 붙든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자, 거칠다고만 생각한 풍경이 비로소 아름답게 느껴졌다. 거칠어서 더 아름다운 볼리비아의 고원.


그들은 도대체 왜 이곳에 사는지 알 수 없는 산골에 집을 짓고 살고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척박한 모래판에서 농사를 짓는다. 조그만 물줄기라도 흐르면 모여 앉아 빨래를 하고 산비탈에 층층이 지어놓은 집에서 일터에서 우리가 다녀본 어느 나라보다 가장 조용하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한다. 가끔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서툴고 우악스럽고 또 소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곳에서 한 달,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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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볼리비아를 생각하면 우선 숨이 차고 피부가 가렵다. 그러다 볼이 빨갛고 손등이 하얗게 튼, 수줍게 웃던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나면 아름다웠던 볼리비아 고원의 풍경이 뿌연 모래 냄새와 함께 떠오른다.


실은 숨이 차고 목이 마르고 눈이 따가운 와중에도 사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볼리비아를 오래오래 그리워할 거란 걸. 온몸으로 겪었으니 온몸으로 그리워하게 될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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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1시에 떠나는 배인데, 1시30분이 훌쩍 지나도록 사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출항시간을 잘못 본 걸까, 혹시 배를 잘못 탄 걸까, 역시 아침 배를 탔어야 하나, 아내 단과 나는 내심 불안하다. 헌데 배 안에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고작 우리 둘 뿐이다. 앞 자리의 히피 커플은 실을 꼬아 팔찌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고 옆자리의 중년 부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느긋하게 담배를 말고 있다. 약속된 시간이 지켜지지 않음에 화를 내는 것은 우리 둘 뿐인데, 정작 그 시간을 허공에 날리고 있는 것도 우리 둘 뿐이다.


2시가 가까워서야 사공이 배에 오른다. 왜 늦었냐고 하니 점심을 먹고 왔다고 한다. 미안한 기색이 없으니 사과를 받을 수도 없다. 되려 밥은 맛있게 먹었냐고 속에도 없는 말을 뱉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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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느긋하게 나아간다. 모터도 쉬엄쉬엄 돌아가는 듯하다. 제 속도를 내어 간다면 20분이면 충분할 거리인데, 도착까지 소요 시간은 무려 2시간이다. 사공은 태양 빛이 뜨거운 듯 얼굴을 가리고 아예 발로 운전을 한다. 이 색히... 상남자다. 순간 섹시하다고 느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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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처럼 넓은 호수, 이 곳 티티카카의 시간은 관대하다. 그 관대함에 나도 몸을 기댈 겸 배 지붕에 올라가 바람을 맞아본다. 천천히 흐르는 따뜻한 바람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도 잔잔한 물결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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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이 들었다 깨니 배는 어느덧 선착장에 닿았다. 이슬라 델솔Isla del Sol, ‘태양의 섬’의 북쪽 부두다. 배에서 내리니 열 살 남짓한 아이들 몇 명이 기다렸다는 듯 호객을 한다. 승객이 많지 않으니 몇몇은 허탕을 치겠구나 싶어서 우리는 잠시 기다리다가 손님을 찾지 못해 남아 있는 아이의 손에 잡힌다.


다행히 부두에서 멀지 않고 생각보다 깔끔한 숙소였다. 나는 무심코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Puedo usar wi-fi? (와이파이 쓸 수 있니?)


자동차도 없는 마을에서 내가 무슨 소릴 한 것인가, 말이 튀어나가자 마자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서툰 스페인어로 숙소를 구할 때마다 습관처럼 물어보던 질문인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와버린 것이다. 아이는 "와이파이? 와이파이?" 몇 번을 되뇌며 그게 뭐냐고 물어본다. '지구 반대편, 사무실 책상에 엎어져 있을 친구들에게 어서 너도 때려치우라는 악마의 유혹을 던질 수 있는 신속 정확한 수단이지만 지금은 잠시 없어도 좋은 것이란다'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으나, 말이 짧아 그저 손사래만 쳤다. 아내 단은 깔깔대며 나의 당황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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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 아래 지어진 작은 마을은 무척이나 조용하고 한적했다. 태양의 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뜨겁고 건조했다. 녹아버릴 듯한 더위가 아니라 가루처럼 부서질 것 같은 더위였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여행객을 태운 배가 들어오지만 대부분 상대적으로 번화한 섬의 남쪽을 향하고 북쪽은 영 발길이 뜸하다. 우리는 아웃사이더 정신으로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자...가 아니라, 배 표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반쯤 속아서 이곳으로 왔다. 사실 속은 줄도 몰랐다. 다음 날 남쪽 마을에 가서야 알았다.


하릴없이 마을을 몇 바퀴나 걸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금새 길을 외울 수 있었다. 골목마다 튀어나오는 고양이를 쫓아가 사료를 주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친한 척하며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물 마시는 나귀를 보며 호숫가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다만,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 여유로움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에게만 허락된 것 같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자연이 꼭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비쩍 말라붙은 땅에서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할매는 돼지를 몰고, 아이는 수레를 밀고, 나귀는 봇짐을 진다. 젊은이들은 뭔지 모르게 분주했다.


천천히 가는 시간이지만 허투루 가는 시간은 없었다.

 

문득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이고, 눈 앞의 고된 노동을 외면한 채 나만의 감상에 빠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시선을 둘 곳을 잃는다. 어디를 봐도 불편하다.


그러나 이내, 육지보다 두 배 이상 받는 저녁 식사 계산서를 보고 나 역시 당당히 초대 받은 손님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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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모처럼 일찍 일어나 배낭을 꾸렸다. 섬의 남쪽까지 능선을 따라 걷기로 했다. 어떤 이는 두 시간 만에 주파했다고도 하지만 우리는 여섯 시간을 잡고 갔다. 사무실에서 단련된 30대 중반의 체력이란 실로 만만히 볼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고도는 4천 미터에 이른다.


섬 속의 산, 그리고 그 산 위의 길을 걸었다. 잉카 시대에 만들어진 이 길은 당시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썩 쉽지 않은 길이다. 조금만 걸어도 호흡이 가빠오고, 그늘은 언감생심, 몸을 기댈 나무 한 그루 찾기도 쉽지 않다. 통행료는 세 번이나 받는데, 이게 구간별 통행료인지 아님 부족한 스페인어 때문에 바가지를 쓰는 건지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천 원 남짓한 돈 때문에 시위하듯 널뛰는 손바닥 앞에 논리를 들이대는 것도 쉽지 않은 선택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빠진 호흡이 제자리를 찾는다. 시간의 흔적이 쌓은 차분한 풍경이 마음 깊숙이 들어온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진득하게 이어진 오래된 길을, 손에 닿을 것처럼 하늘이 가까운 길을 단둘이 오롯이 걸었다. 외딴 행성에 온 것처럼 오직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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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라디오헤드의 High and Dry가 떠올랐다. 이어폰을 낀 것처럼 음악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나는 아이폰을 꺼내 음악을 찾고, 달뜬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때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 당장 꺼”


아내 단이었다.

 

이미 퍼질 대로 퍼진 그녀에게 나의 가녀린 감상은 그저 사치였을 뿐이다. “넵” 힘찬 대답과 함께 나는 음악을 끄고 몇 걸음 뒤에서 작게 흥얼대며 걸었다.


요즘도 집에서 라디오헤드를 들을 때마다 태양의 섬이 떠오른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들으면 학창시절이 생각나는 것처럼, 보아의 ‘넘버원’을 들으면 군 시절이 생각나는 것처럼, “Two jumps in a week I bet you~”가 들려오는 순간, 그 높고 건조한 풍경이 고요히 고개를 치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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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치마를 입은 할매가 양떼를 모는 풍경,


자기보다 더 어린 송아지에 매달려 가는 소녀의 풍경,


구름 너머 설산이 보이고, 사방은 온통 새파란 티티카카로 가득 찬 풍경.


눈앞에 펼쳐져버린 이 풍경들 속에서 헤매이다 보면 또다시 라디오헤드의 음악들이 떠오른다. 여행을 통해 얻은 마약과 같은 악(?)순환이다. 








[편집부 주]



이 글은 딴지일보의 무규칙 이종매거진 

<더딴지> 16호에 실린 글의 전문입니다.


단&두의 여행 글은 지금까지 쭈~욱 

<더딴지>에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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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 @nadaun


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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