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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6.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이 글은 필자가 자신의 남아공에 거주 중인 한인 부부를 만나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맨손으로 남아공으로 건나 가 

고국 땅에서는 꿈도 못 꿀 일들을 이뤄낸 이들로, 

그들과 2주간 머물며 나눈 

남아공 사회에 대한 분석, 토론이 

한국과 남아공, 두 사회를 이해하고

새로운 공동체 생활 양식을 고민해 보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마, 이 정도 의도를 깔고 시작하는 연재라 하겠습니다.

 





나는 왜 남아공 행을 결심했나


아마 모든 것이 인연이라는 연기론을 설파하신 부처님도 온라인 인연이라는 것이 생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온라인에서 만난 인연이란 것이 가벼우려면 한 없이 가벼운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내용이 오갔다고 하더라도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가벼울 수 있는 인연을 소중하게 바꿔가는 건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들어낸 작용일 뿐이다. 온라인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설정한 하나의 작용형식일 뿐이다.


온라인이라고 해서 삼라만상이 움직이는 원리의 밖에 있진 못하다. 그래서 온라인에서라도 결코 업을 쌓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한네스버그에서 사는 '아프리카 바람'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인물과의 관계도 온라인에서 맺어져서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 되었다.


바람과 나는 6 년 동안 거의 매년 한국에 가는 시간을 맞추어 만나서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전국의 공동체를 찾아다니고 우리가 함께 가려는 길에 대해서 의논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지난해 말 바람이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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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행은 여행이 아니라 답사였다. 굳이 답사라고 정의를 하는 까닭은 나머지 생애를 그 곳에서 살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보이는 체류 기간 내내 단순히 보이는 현상들 보다는 가능한대로 그 현상 뒤에 있는 구조를 보려고 노력 했다.

 

남아공은 빈부 격차와 범죄와 부패가 심한 위험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민의 50%가 실업 상태라고 하니 일거리가 있고 방 한 칸이라도 안전하게 살 집이 있다는 것은 죽어서 간다는 천국 보다 몇 배가 더 귀한 것이다. 그래서 남아공 흑인들은 일자리만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라도 출근해낸다. 


'바람'과 그의 남편 '구름'은 어릴 적 배고팠던 기억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일을 해서 현재는 30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앞으로 그 가족들을 전부 불러서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생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본인들의 배고픔을 벗어나 흑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원래 바닥이 얇은 이민 생활이란 한 번 실수 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바람' 부부는 현실적으로는 위험한 개척자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크고 넓은 이상을 품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는 이런 상태는 자칫하면 위험에 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억척같은 의지를 가지고 현실적인 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해 가면서도 품고 있는 이상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결코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원래 성과적이라는 말은 북한에서 성공적이라는 말을 대신에서 사용하는 말인데 나는 어쩐지 이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성공은 결과를 말해 주는 것 같지만 성과는 단기적인 효율을 말해주는 것 같은 어감이 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늦은 나이에 남아공에는 왜 가려고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바람'과 계획하는 것을  설명하니까, 


"그렇다면 자선사업을 하는 거냐?"


고 물었다. 그의 질문은 간단히 말해서 돈을 벌어서 흑인 생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자선 사업이 아니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질문이 참 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람'의 목표를 정의하는 일에 키워드가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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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사업도 규모가 커지면 재단이 되고 재단이 계속적으로도 유지되려면 후세계 자선 재단의 실제 사업비용 보다 관리 비용이 높아서 문제가 된다는 보도를 본 적도 있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 계속 돈이 드는 구조라서 정작 사업을 하는데 쓸 돈이 부족한 비효율적인 조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 공동체는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구조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수입은 자본주의적으로 하고 지출은 사회주의적으로 하는 즉 영리사업을 해서 비영리 지출을 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살게 위해서는 농산물부터 시작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자체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자립경제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면서 살 수는 없지만 효과적으로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바로 공동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생활공동체 운동은 당장에 급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지구의 미래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는 생태공동체 운동으로 발전 할 수 있다.


호주 대륙에서 시드니의 정반대편인 동부 해안에 있는 퍼스에 있는 자연주의자들이 사는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공동체의 리더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놀란 것은 그들의 집 바닥이 카펫이나 마루가 아닌 흙바닥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맨 땅에다 침대와 가구들을 놓고 살고 있었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최대한으로 보존하면서 살자는 그들의 철학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었는데 이런 문화를 퍼머컬쳐permaculture라고 한다. 영속적인 농업(permanent agriculture) 혹은 영속적인 문화(permanent culture)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과 자원을 관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지금처럼 자원을 인정사정없이 써버리고 또한 사용 뒤에 폐기물들을 남기게 되는, 망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순환적으로 사용하여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말한다.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또한 사용 이후의 폐기되는 자원의 양을 가능한 줄이고 그 폐기물을 다른 차원의 새로운 자원으로 활용하는 모든 사고 체계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불쌍한 어머니 지구를 생각해서 덜 쓰면서도 좋은 것 생산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운동이다.


몇 해 전에 '바람'과 한국에서 만나서 함께 경남 산청의 민들레 마을을 방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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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식구들의 대부분 먹을거리가 자립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유기 농사를 짓고, 퇴비도 직접 만들고, 단열이 뛰어나 에너지 효율 면에서 아주 우수한 볏단을 넣은 집(스트로베일하우스)를 짓고 폐식용유로 만든 기름으로 차도 운행하고, 바람과 자전거를 활용한 에너지 만들기도 했다. 영국에서 대안기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기술자가 다양한 대안 기술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열 에너지를 개발하고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은 공동체 식구들의 취사는 기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비효율적인 면도 있지만 대안적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대안적 삶(Alternative Lifestyle)'이라는 말은 1966년을 기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반문화 운동으로 히피운동에서부터 퍼져 나간 말이다.


이런 이야기들, '바람'과는 그동안 한국에 나갈 때마다 시간을 맞추어 만나서 잠깐씩 할 수는 있었지만 번번이 시간에 쫓겨서 많이 나누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뿌리는 뽑는 마음으로 남아공에 찾아 가 이야기 실컷 해보고 행여 내가 밥숟가락이라도 놓을 일이 있을까 찾아보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몇 해전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인 이태석 신부의 길은 고귀한 길이지만 그 길은 아무나 따라 할 수없는 길이다. 하지만 빈곤과 부패와 범죄가 만연한 남아공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바람의 소원은 뜻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평생을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이곳저곳 공동체를 찾아다닌 끝이 남아공이 될 것인가는 아직 모르겠다. 성질만 안 죽었지만 몸은 이미 노인체질로 바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는 했다. 내가 남아공에 가서 할 일을 찾으려고 한다니까 이구동성으로 위험한 곳에 왜 가느냐고 말렸다. 


"만약에 흑인들의 위해서 조그만 일이라도 하다가 흑인들에게 총 맞아 죽는다면 

그것 보다 값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말했다. 


"심장에 정통으로 맞아서 죽으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엉뚱한 맞아서 몸도 못 쓰고 병신만 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심장 쪽에 권총 타깃이 그려진 옷을 입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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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선 땅, 낮선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욱이 치안이 불안해서 늘 전투에 투입된 병사처럼 사주경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상식과 전혀 다른 이해를 해야 하는 일도 힘든 일이다. 나는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 중에 다녀와서 몸살을 앓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말이 통해도 전혀 다른 체제와 문화 속에서 몸보다 뇌가 피로를 느끼며 곤죽이 되었던 것이다.




남아공의 첫 인상


그런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장장 14시간 비행 끝에 남아공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내 마음을 울린 사건은 '바람'의 집 50대 흑인 가정부 메기와 악수를 하던 순간이었다. 악수 한 번 하려는데 두 손을 공손하게 내미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사업장에서 만나는 직원들도 악수를 할 때 두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런 현상은 요즘 한국 젊은이들에게서도 점점 사라지는 현상인데 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대도시가 아닌 시골 동네에서는 어른 앞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면 매를 맞는다고 한다. 그런 어른에 대한 공경이 조금 발전해서 자신의 고용주나 손님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사실 아프리카를 가면서 나의 가장 큰 관심은 과연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문화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시드니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둘러보니 아프리카를 가는 비행기에 흑인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내 앞 의자에 안경을 쓴, 척 봐도 먹물 깨나 먹은 것 같아 보이는 젊은 흑인이 멜번의 모나쉬 대학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잘되었다 싶어서 말을 붙였다.


"모나쉬 대학에 다니는 모양이구나. 내 아들도 모나쉬 대학교 교수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는 모나쉬 대학에서 마침 '아프리카의 마을문화와 서구화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런 다음 막상 남아공에 가서 흑인들의 생활이나 행동 양식을 보게 되니, 그가 쓰는 논문의 주제가 정말로 중요한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서구화된 오늘날의 흑인들의 삶에서 부락문화는 깡그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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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 이래 흑인들의 마을 문화는 자연과 이웃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혼자서는 생존을 할 수 없고 농사나 사냥을 하더라도 항상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해야 했었다. 지금도 이런 전통이 조금은 남아서 도시로 몰려온 흑인들 가운데는 아직 같이 사는 동료가 실직을 해도 나누어 먹는 것에 별로 불편을 겪지 않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백인들에 의한 식민화의 결과로 흑인들의 마을 공동체는 점차 사라지고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는 말은, 과거처럼 마을에서 단순하게 살 수가 없게 된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도시화된 흑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동물이 되어야 했다. 도시화된 흑인들 사이에서 공동체 의식이란 것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요즘 TV나 영화에서 나오는 전통부락은 모두 민속촌이라고 보면 된다. 원주민은 없고 원주민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는 있다고 하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바람'의 집은 주거 환경으로서는 최상의 조건인 요한네스버그 시내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백인 지역에 5,000평의 대저택이다. 부근의 집이 모두 그 이상의 규모이고 바람의 집은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바람은 농사도 짓고 많은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서 큰 땅과 집이 필요해서 이 집에 사는 것이지 결코 호화롭게 살기 위해서 땅이 넓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본채와 부속 건물 2 채와 컨테이너 3 대를 들여놓고 바람의 가족을 비롯해서 20 여명이 살고 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전기는 있어도 전화가 없다는 것이다. 도로에 나가 보면 전화선은 군데군데 끊어져 있는데 감전이 되니까 전기선은 못 끊어가고 전화선이나 케이블은 끊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선 인터넷은 당연히 안 되어 고가의 무선 인터넷을 쓰고 있다. 그래서 멕가이버의 사촌(?)인 남편 '구름'은 6Km 떨어진 사무실의 인터넷을 끌어 쓰기 위해서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전파를 받아쓰는 노력을 하고 있고 현재 시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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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을 달리다가 전화선들이 멀쩡히 있는 것을 보고 '구름'에게 당신네 동네는 전화선이 끊겨서 전화를 못 쓰는데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도둑질도 타산이 맞아야 하지요. 

전화선을 절단하기 위해서 기름 값 없애면서 차를 끌고 와야지, 

끊은 다음에는 팔러 돌아 다녀야지, 

한 마디로 원가가 안 나오는 거지요. 

도시는 바로 끊어서 동네 고물상에 갖다 주면 되지만."




남아공에서 뉴라이트가 되다


일반적으로 흑인들은 색깔이 어둡다보니 어쩐지 비위생적이고 더러울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백인들보다도 훨씬 깨끗하고 주변 정리정돈도 잘하고 있다고 한다. 일단 개인적 위생이 철저하고 아무리 허술한 양철집이라도 일단 자기 집 안은 반들반들하게 해놓고 산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이들이 엄격하게 영국식으로 교육을 받으면 일급 하인으로는 적격인 것이다. 거기에다 순종적이기까지 하니 백인들이 오랫동안 부려먹기가 얼마나 쉬웠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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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자기 몸과 집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에는 철저하지만 자기 집 문밖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을 넘어 무질서 난장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아공 정부에서 주택정책을 세울 때 처음부터 공동 공간이 많은 아파트 대신에 개인이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지어서 공동의 공간이 전혀 없도록 했다고 한다. 흑인들에게는 공동이라는 개념이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이런 것을 보고 민도가 낮다고 단순하게 못 박아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 흑인들은 자연 속에서 혼자서는 생존을 할 수 없고 농사나 사냥을 하더라도 항상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해야 했었다. 그런 흑인들이 도시화 되면서 공동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러한 흑인들의 고립분산적인 개인주의는 단순히 개인의 생활습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남아공의 경제 산업 전반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중부 이남의 모든 국가들이 남아공으로 물건을 사러 오기 때문에 아프리카 남부의 물류집산지이다. 하지만 대형 트롤리 트럭을 몰고 요한네스버그에 와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러 다니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이를 이용해서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허술한 유통센터를 세워놓고 도매상들을 입주 시켜서 한 곳에서 물건을 모두 구입할 수 있게 만들어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그들은 거대 자본이 투자된 서구식 쇼핑몰 중심으로 운영되는 남아공의 유통 체계를 쥐고 있는 백인들로서는 할 수 없는 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한 것이다.


한국도 요즘 돌아가는 모양이 점차 그렇게 되어 가고 있어서 걱정이 에베레스트 산이지만 남아공에는 재래시장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도 중국인, 인도인들 탓에 가난한 흑인들이 값 싸게 물건을 구입할 길이 생긴 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 남아공 땅에서 중부 아프리카 이하의 상권 전체가 백인, 중국인, 인도인 등이 좌우하며 이익을 챙겨 가는 구조인 것이다. 백인들은 위를, 인도인과 중국인들은 바닥을 긁어서 돈을 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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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아공 흑인들이라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 남아공의 흑인 엘리트들은 위험성이 많은 독자적인 사업 보다는 안전하게 백인들의 회사에 취직을 해서 월급을 많이 받고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하는 편이다. 이것은 내 집 안만 깨끗하면 되고 공동공간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심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흑인들이 모험적인 길을 두려워하고 안전한 길만 찾으려고 하는 이유가 오랜 동안의 식민과 차별의 경험이 내재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도적으로 길들여지고 훈련되어져서 무기력하게 된 흑인들, 바로 작금의 남아공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런 무기력은 또 왜 자리잡은 것일까? 


아무래도 주원인은 350년 간 지배해 온 백인 탓이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착취만 했지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즉 백인들은 흑인들을 부려먹기 쉽도록 만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청소하는 법이나 허드레 일이나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정도여서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상태를 만들었다. 오랜 동안의 악명 높은 흑백분리 정책 하에서 흑인들에게 행해진 교육은, 그저 주인이나 백인에 대해 순종하라는 것만을 강조해왔을 것이다.


이에 관하여 내가 겪었던 일 하나가 있다. 쿠루가 국립공원을 가기로 하고 아침부터 준비를 하는데 출발 직전에 '구름'이 운전사에게 가정부에게 가서 망원경을 좀 가져 오라고 시켰다. 조금 있다가 가정부가 운전사와 함께 나타나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구름'이 운전사에게 "Binocular가 무엇인줄 모르느냐?"고 물으니 고교를 졸업한 운전사는 모른다고 했다. 


영어가 공용어인 남아공,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영어를 못하는 이들이 많다. 영어 수업 시간이 1주일에 한 시간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운전사는 Binocular라는 말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구름'은 설명을 해주면서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 했느냐? 모르면 물어보라고."


흑인들은 'Yes'와 'No'로만 대답하고, 묻는 것을 두려워해서 잘 묻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일만 시키고 몇 번씩 확인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안 가르치는 비교육적인 노력을 해서 흑인들이 인습에서 벋어나기를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백인 정권에 의해 그 어떤 기초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흑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남아공이 백인들로 부터 실질적 독립을 성취했을 때도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이미 서부 열강과 치열한 투쟁을 거쳐 내성을 기른 주변 국가들로 부터 밀려온 외국 흑인들에게 모든 면에서 상당 부분의 잠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비교적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기 때문에 투쟁을 통해서 권리를 획득한 주변국가에 비해 경쟁력이 약화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생긴 것이다.


물론, 흑인들의 순종적인 태도는 흑인들이 가지고 있던 원초적 문화 속에 연장자나 권위를 가진 자에 대한 존경심을 발로라고 보아야할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남아공 흑인들의 모습 속에서 구한말 조선의 형편을 떠올렸다. 당시의 우리의 처지와 상황이 아주 비슷했을 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선 말기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 땅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아마도 조선인들부터 경계도 받았겠지만 상전 대우를 받던 선교사들이 그런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이든 간에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윗사람에 대한 존중심에 직업윤리가 가미된다면 고용인으로서는 그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고용주들에게는 이러한 남아공 흑인들의 공손한 태도가 당연히 매력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하고 보니 나도 모르게 아프리카에 오고 보니 뉴라이트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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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뉴라이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남아공이 아프리카 나라 중에서 정치적으로 제일 안정이 되어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의 투자가 생산성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은 남아공이 행정적으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은 탓일 것이다. 몇해 전 남아공 광산 폭동 사태에서 본 것처럼 남아공은 노조의 힘이 셀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어찌해 볼 수가 없으니까 조직의 힘이 강한 것이다.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노조에 가서 이야기하고 노조에서 사람이 오는 식이다. 하여간에 임금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제조업에 투자가 이루어지 않는 원인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바람' 부부는 건강한 사업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하고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교육하고 훈련을 시켜 그들의 살 길을 만들어 주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디도 '아프리카 바람'이라 지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이 꿈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남아공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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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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