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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16. 월요일

정우성


 



 


 


<차원 바꾸기 놀이>


 


(지난 8호에서 동사와 명사를 구분하지 못한 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한국사람이라서 가끔 영어를 틀립니다. 그래도 영어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국어는 잘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몇 년 전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이외수 선생이 진행하는 라디오 상담 코너가 있었다.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어느 애청자의 답답한 사연이 배달됐다.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야기에 끼지도 못하며 자꾸만 겉도는 자신을 탓하는 시청자였다. 무엇인가 해답을 구하는 애탄 마음이었다. 이외수 선생이 어떤 해답을 내놓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이때 스피커에서 나온 단어가 “관심”이라는 낱말이었다. “동료들이 꺼내는 여러가지 화두들에 대해서 당신도 한 번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조언. 내 얼굴에 순간 미소가 퍼졌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바닥에도 온기가 흘렀다. 우리는 스스로 관심을 주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관심을 받기를 기대한다.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서 정치를 탓하고, 평화에 관심이 없으면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아내의 쓸쓸한 오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나의 편안한 저녁만을 생각한다.


 


 


차원 바꾸기 놀이


 


오늘 나는 ‘아이게게 관심을 가지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아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며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멀리하는 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좀 뻔한 이야기다. 오히려 아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문제가 되는 세상이다. 나는 오히려 <관심의 변경 혹은 확장>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것도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서, 관심은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특히 ‘아이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아빠가 관심을 갖는 일,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관심사에 침전물이 생기지 않도록 혹은 아이가 자신의 관심사에서 갇혀버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 때로 더 중요하고 유용할 때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차원 바꾸기 놀이”다. 그냥 지어낸 말이다. 원래 아이들의 관심사의 상당수는 휘발성이다.


 


 



물론 어떤 관심사는...


 


유아도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을 하고 감정을 갖는다. 게다가 기호도 있다.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운다. 전속력으로 배운다. 이 시절에는 특히 감각기관, 그 중에서 시각과 청각이 무엇보다 예민하게 발달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듣는다.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잘 정리된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오히려 보고 들은 것을 정보를 이용하여 잽싸게 자신의 기호를 만든다. 이 어린 것들은 나름의 옹고집을 피운다. 아직 어른들의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며 현실적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와 아이는 사사건건 충돌하기도 한다. 서로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내는 것이다.


 


 


밥 먹이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유아를 상대로 한) 육아의 팔 할은 부모의 입술이요 나머지는 부모의 표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자는 아이의 귀로, 후자는 아이의 눈으로 소통한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정말로 그렇다. 우리 애들은 어려서부터 밥을 많이 먹는 편이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면서 나는 여러가지 쇼를 했다. 첫째 입술이 중요하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좀 난감한데, 예컨대 “냠냠냠냠 냠냠냠냠냐야암~(리듬과 고저가 있음)” 식으로 밥을 매우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면서 먹여보았다. 둘째, 표정도 중요하다. 저렇게 밥먹는 시늉을 하면서 표정이 없을 리가 없다. 박수도 치고 칭찬도 한다. 의성어와 의태어는 가장 원시적이면서 보편적인 언어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극히 유치하다. 너무 유치해서 참기 어렵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의 관심사의 차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맛보다는 밥먹는 행위가 놀이가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 그릇을 먹어 치우고 더 달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밥상머리 예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면서 침 튀기면서 먹는 것은 아니니까. 밥상머리 예의가 모든 예의의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기 손으로 흰밥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맛있게 그리고 잘 먹는 게 더 중요하다. 밥을 많이 먹으면 일단 부모가 안심을 하고, 대량의 똥을 확실하게 내려놓는다는 장점이 있다. 잘 잊어버리곤 하지만, 건강한 아이는 모든 부모의 변함 없는 로망이다.


 



 


맛은 물론 중요하다. 아이에게도 입맛이라는 게 있으니까 중요한 요소다. 그렇지만 청각이나 시각이 맛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개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음식들은 소금이나 감미료가 덜 들어 있기 때문에 맛이 좀 없을 수 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자. 그런 것(맛없는 것)들을 어른들이 먹으라고 하면 당신이라고 해서 맛있게 많이 먹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밥을 잘 먹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들은 건강하게 클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입술과 표정으로 밥을 먹이다 보면 아이들의 관심사가 ‘먹는 것’에서 ‘먹는 놀이’로 바뀌게 된다. 차원이 바뀐다. 웃으면서 많이 먹는다. 뭔가 관심사의 차원을 바꾸지 않고 많이 먹으라고 숟가락을 내밀며 강요만 하면, 결국 ‘먹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고, 부모와 아이는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관심사의 차원을 바꿔보라. 물론 어떻게 바꿀 지는 부모의 방법론이다. 만약 차원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먹으려 하지 않는다면, 정말 맛이 없거나 아프거나 배가 부른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이 생긴다. 아이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차원, 병원에 가는 차원, 배고프게 만드는 차원 말이다.


 


 


목욕시키기


 


아이를 목욕시킬 때 가장 관건은 머리를 감겨주는 일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다른 사람이 자기 머리 위로 마구 물을 뿌리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머리를 감기고 볼 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이 씻는 것을 좋아하고 말고가 정해진다. 부모와 아이의 대결이 여기서도 펼쳐진다. 부모가 지면 아이의 버릇이 나빠지고 매우 귀찮아진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감겨야 하는 거다. 시간도 걸리는 데다가 씻기면서 아이 눈치를 봐야 하고 말이다. 물론 참을성이 좋은 부모라면 그것도 괜찮겠다. 유아를 사랑하는 부모의 표현방법이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연역하자면 그냥 샤워기로 막 물을 뿌려도 괜찮다. 신속하고 확실히 아이들을 씻길 수 있다. 바가지가 있으면 바가지로 한가득 물을 뿌리면 된다. 입술로 뿌리는 것이다. 입술에서 각종 함성소리를 내면서 물을 뿌린다. 끝나면 다시 엄청나게 칭찬 목소리를 내면서 마찬가지로 차원이 바뀌는 것이다. 목욕할 때에도 아이들의 귀는 열려 있다. 이것도 차원 바꾸기 놀이다. 아이 스스로 머리를 감는 것도 금방 온다.


 



이젠_혼자서도_잘해요.jpg


 


 


양치질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책이 있다. 최근의 베스트셀러다. 일종의 협상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한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소개한 어떤 잡지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읽었다. 양치질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여러 개의 칫솔을 보이면서 그 중 하나를 고르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선택권을 얻게 되어 칫솔질을 잘 할 거라는 협상의 기술.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로 그 “관심사의 차원 바꾸기”와 같은 맥락 아닌가.


 



뭘 쓸래? 이거?


 


그 글을 읽자마자 나는 당장 마트에 가서 칫솔 5개와 치약 2개를 샀다. 그리고 집에 있던 칫솔과 치약을 함께 이용하여 그날 바로 어린 아들에게 시험해 봤다. 역시나. 칫솔질을 싫어하고 자주 거부하던 아이가, 부모의 힘에 못 이겨 겨우 칫솔질을 하던 아이가 자발적으로 그것도 매우 즐겁게 칫솔질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다양한 색상의 4종의 칫솔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재미가 있으며 3개의 치약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치약 중에는 흰색이 있고 파란색이 있다. 칫솔 중에는 예쁘지 않은 게 있다. 누나에게도 동일한 선택권을 줬다. 아이는 ‘저 귀찮은 칫솔질을 또 해야 하나’ 라는 관심사에서, 예쁜 칫솔을 고르는 놀이, 치약의 색깔을 고르는 놀이로 관심사의 차원이 바뀐 것이다. 정말이다. 혹시 집에 어린 아이가 있어서 양치질 시키는 게 힘든 가족이 있다면 당장 실험이 해보라. 단, 부작용이 있다. 어떤 날은 여섯 번이나 양치질을 했다.


 


 


휘발성 관심사


 


아이들의 관심사와 생각과 기호에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대개 휘발성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잘 증발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매우 중요하지만 나중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관심사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관심사에 대해 부모가 지나치게 반응할 것까지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을 집중으로 분석하고 조명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우선 아이의 이야기와 느낌에 대해서 귀담아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하겠다. 잘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이들의 관심사에 잘 반응해 준다고 해서 뾰족한 해답이 없거나 혹은 부모가 생각하는 규칙과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라거나 자기 감정에 푹 빠져 있는 옹고집이라고 생각되면 적절히 차원을 바꿔주는 것이 슬기로운 일 같다. 물론 관심사를 바꾸고 논점을 바꾸는 일련의 행위가 어찌보면 치사한 일일 수 있다. 아이를 무시하는 부모의 수작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단견에 불과하다. 인간의 두뇌는 어떤 한 부분을 집중해서 파고 드는 능력도 있지만, 다양한 부분을 동시에 고려하는 능력도 있는 법이다. 생각이 다양해지면 깊어지기도 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을 믿어도 좋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나아지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가 재미있고 흥미롭다면 대화를 하는 쌍방에게 이롭다. 그래야 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의 입장에서도 부모와 대화를 하면 뭔가 얻는 게 있고, 해결되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부모와 대화를 하면 나아지는 게 없고 오히려 사태만 더 심각해진다면, 부모와 아이 간에 심리적 거리가 부지불시간에 생기지 않을까. 불만족일 수도 있고 불신일 수도 있다.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선배를 만나거나 어른을 만날 때에도 내가 알고 있는 관점과 관심사에서 별로 나아지는 게 없고 오히려 생각이 꼬이기만 한다면 혹은 괜히 어수선해지고 복잡해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게 반복된다면 결국 그 사람과는 흉금을 열고 진지한 대화를 하기 어렵게 된다. 자기가 보지 못했던,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준다면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서 유쾌해지기 마련이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이들은 다른 친구와 관계에서 어떤 트러블이나 충돌을 자주 겪게 된다. 인간사 다 그렇다. 어른들도 관계 속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가지고 산다. 아이들도 더 심하면 심했지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이러저러한 근심거리가 자란다. 때로는 심각한 심리적 현상을 겪기도 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따돌림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인지한 부모의 대응은 물론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경우야말로, 때때로, 관심의 차원을 바꾸는 게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자식이 크게 잘못한 게 없고 오히려 옳은 경우였다면 아이의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해진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나서서 자식과 친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개입하는 행위는 기존 관심사를 증폭시키고 자칫 상황만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오히려 아이가 부모에 의존하게 되는 습성을 만들 수 있다. 또한, 괜히 부모한테 말해봤자 사태만 심각해진다는 사실을 눈치를 챌 수 있다.


 


여기 차원을 바꿀 수 있는 문장 하나가 있다 :


“얘야 원래 정의는 고독한 거야. (후략)”



 


 ‘정의’와 ‘고독’이라는 단어들은 어른들에게도 그럴싸한 단어다. 이렇게 은근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아이의 괴로움과 근심을 자부심과 희망감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차원 바꾸기 놀이다. 어려움과 난관을 겪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은 결국 아이 자신이 돼야 하며, 시급하고 예외적인 상황(이를 테면 형사적이거나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가 크게 상처를 받은 상황)이 아니라면 부모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키우고 티를 내면서) 해결할 필요는 없다. 아이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아이의 자존감이다.


 


아빠로서 언제까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에게 더 이상 차원 바꾸기의 놀이를 할 수 없을 때, 아이가 생각하는 수준과 바라보는 시각과 부모가 갖고 있는 시각 사이에 큰 차이가 없을 때, 부모의 시선이 아이의 시선보다 오히려 좁을 때, 우리는 그때 비로소 아빠로서 엄마로서 스승이라는 짐을 내려놓게 된다. 우리가 단지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그저 아이의 영적인 친구가 될 때가 찾아온다. 그때까지는 성실하게 아이들의 생각과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면서 아이들이 갖고 있는 관심사의 차원을 다양하게 넓히고 파고 높이면서 육아를, 양육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아빠는 생각을 한다.


 


“코기토 에르고 쑴”



 


정우성

twitter:
@hanaeserin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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