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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5. 목요일

무천


 


해리포터를 보면, 볼드모트는 이름이 없다. 포터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모두가 그를, 그 사람, 죽음을 먹는 자,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자 등으로 지칭한다.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금기시 되어 있는 터부인 셈이다. 볼트모트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그가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I'm watching you. I'm hearing you.


 


어느 사인가 도탑게 내려앉은 이 ‘상식’에 우리 사회도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이야기 하면, 허위사실유포로 전기통신법에 의율당한다. 용산철거민은 전철연이란 무시무시한(?) 이름 아래 조직적 반군처럼 매도 받아야 했고, 생존은 크레인 위 309일의 고난 속에 힘겹게 그 당위성을 인정 받는다. FTA 부실협상, 촛불, 4대강 학대, 천안함, 연평도 패전, 내곡동 사건, 민간인 사찰…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거의 분기마다 국정감사급 의혹들이 불거지지만, 시민은 ‘유감스럽다’는 대통령의 해명에 늘 유감스럽다. 


 


해학과 풍자는, 모욕과 명예훼손에 자리를 내어준지 오래고, 시민은 더 이상 사회를 향해,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마치 해리포트의 볼트모트처럼. 


 



지난 1월 11일, 구속 수감 됐던 박정근 씨


 


천안함에 대해 해소되지 못한 질문들이 있다. 


의혹의 수준이든, 허황되든 간에, 천안함 폭침(?) 후 2년이 지났고, 여러 진상조사(?)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의 수치를 따르더라도 2,30대의 44%가 넘는 시민들이 천안함에 대한 정부발표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방법을 통해 명명백백히 이러한 의문점을 풀고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천안함을 또 다른 KAL 격추사건으로 만들 필요가 무에 있는가. 천안함 폭침 부정자들을 빨갱이나 체제부정자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보호의무는 적확한 정보공개를 통해 시민의 올바른 참정권 행사를 보장하고, 체제 내의 불필요한 갈등을 치유하는 데까지 미친다.


천안함에 대해 의문을 가진 자들을 어리석은 음모론 동조자로만 치부하는 정부의 대처방법은, 국가의 권원이 바로 ‘그 어리석은 국민들’에게서 나왔다는 자명한 이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국가의 주인.jpg


 


비가 내릴 때, 땅이 젖는 냄새를 두고, 어떤 이는 비내음이라 부르고, 다른 이는 비 비린내 부르는 것처럼, 하나의 사안에 대한 무한의 수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실정이라 날 세우는 사안에 대해, 다른 쪽은 선정이라, 불가항력이라 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주관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늘 전지적 시점을 요구함은 가혹하다. 어느 때는 맞고, 어느 때는 틀리는게 우리의 보편률이다. 


 


하지만, 물음 자체에 대해 입막음을 해서는 안 된다.


 


걸음을 위해, 오른다리와 왼다리의 교차운동이 필요하듯, 공동체 발전을 위해 우파와 좌파의 세차운동은 필수적이다. 비록 진폭의 정도가 불균형하여 한 자리만 맴돌거나, 진행의 방향이 삐뚤삐뚤하더라도 세차운동 자체를 멈춰서는 안 된다.


 


제도권 교육 속에, 민주주의의 정의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닌 실체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학부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논술에서 그렇게 써먹던 수단과 목적에 있어, 절차적 민주주의는 수단일 뿐이지, 실체적 민주주의라는 가치 그 자체를 전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학부 말에서야 알게 됐다.


 


어떤 주장이 체제를 부정하고 민주주의의 이념을 공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그 주장을 공격하면 된다. 다만, 그 ‘주장의 행위 자체’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어떤 자의 주장이, 종북좌빨의 공화정부정을 향한다고 해서, 그 주장의 행위를 부정하거나, 주장하는 자의 존재를 말살한다면, 체제와 이념수호를 위해 일어난 논의가 체제의 존립이유와 구성원을 배제하는 자기파괴적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수호와 수복을 위한 몸짓들이, 실체적 민주주의를 압살해 버리는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How can I be defeated!


 


볼트모트의 패배는 자명한 순리였다. 


 


억압과 자기파괴는, 자기회복이란 생명순리에 어긋난다. 자연은 언제나 회복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허나, 자기파괴 또한 자연의 과정이다. 파괴와 회복의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자연은 성장하고 늙어가며 다시 태어난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오른쪽이건 왼쪽 - 이라 쓰고 덜 오른쪽이라 읽는다 - 이건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주는, 지난한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둘 중 어느 한 쪽의 소리도 무시되거나, 입막음 돼서는 안 된다.


 



 


한 달여 전 새벽께 구럼비의 발파음을 들으며, 이 정권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는 접었다. 그저 가련할 뿐이다. 


 


늘, 시민만이 희망이다.


 


무천

twitter: @Mucheo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