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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3. 화요일

정우성


 



 


 


좋은 리더냐, 좋은 팔로우냐


 


자녀교육에 관하여 항간에 파다한 책들은 ‘아이의 리더십’을 키우기 위한 여러가지 경험적인 이야기를 강조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가 남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을 지도하고 지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양지에서 빛나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지, 음지에서 축축하게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좋은 사장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좋은 청소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식의 부와 명예의 성공을 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통상 그렇다. 이것은 육아서적, 자녀교육, 자기계발 서적 출판 시장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는 “극경쟁주의”와도 맞닿아 있기도 하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과 만나서 말을 섞게 된다. 지인들을 만나서 진하게 대화할 때도 있고, 스쳐지나가듯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도 있다. 택시 운전수가 괜히 내게 말을 거는 경우도 있다. 여기도 저기도 곳곳에서 잘난 사람들이 많다.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이미 우리나라 대통령이며 총수다. 술자리 옆 테이블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를 엿들을 때에도 그렇다. 인터넷 댓글이나 트윗이나 페이스북의 글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전위다. 리더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게 과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자기 의견을 분명히 갖고자 노력하는 자세는 좋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리더가 되려는 욕망을 볼 때마다 우리 시대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리더십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2012년은 정치의 시대, 대통령이 바뀐다고 그 나라가 달라질까?


 


 


팔로우가 좋아야 한다


 


“리더” 혹은 “지도자”는 근본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좋은 리더는 권력을 좋게 쓰기 때문에 빛나는 법이고, 나쁜 리더는 권력을 악용하기 때문에 정말로 몹쓸 일이 벌어진다. 권력은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고 심지어는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의 역사가 그러했다. 특히 20세기 우리는 인류의 광기를 경험했는데, 멀리 갈 것도 없다. 독재자의 횡포 아래에서 쓰러진 수많은 선량한 목숨과 아픔과 상처를 우리 기억 속에서 꺼내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다. 권력의 정점에는 언제나 리더가 있다. 한 명일 수도 있고 다수일 수도 있다. 관료일 수 있으며 정당일 수 있다. 시민 단체일 수도 있고 기업조직일 수도 있다. 우일 수 있고 좌일 수 있다.


 


자고로 좋은 리더가 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선현들이 다양한 이상과 철학과 도덕론을 제시하면서 리더의 덕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하더라도 개인적인 힘만으로는 좋은 리더가 되기 어렵다.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어서 리더들이 함부로 반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역부족이다. 리더를 뽑고 따르는 사람들이 반칙에 관대하고 오히려 성공을 위해서라면 반칙도 수완이라고 생각하는 즈음해서는 법규나 규칙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최근 대한민국 사회가 그러하다. 법원의 정당한 판결조차 무시되기 일쑤며 거짓된 주장과 증거에 의해 판결이 더럽혀지기도 한다. 전문가들이라는 사람이 데이터를 조작하거나 힘센 사람들이 논리에 맞지 않는 억지주장을 하기도 한다. 방송에 나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분개하기는커녕 진영논리에 의해 옹호하고, 절차와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고 나대어도 오히려 흰웃음을 머금고 활보할 수 있는 뻔뻔한 사회, 리더가 책임을 지기는커녕 남탓을 하는 사회, 이런 것들은 리더의 책임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심각하다. 힘 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각양각생의 만행의 문제는 그들의 리더십 부족이 아니라 뻔뻔함이 통용되도록 침묵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지지하는 수많은 팔로우들의 책임이기도 하다(물론 분노하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릇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혹은 좋은 리더를 만들기 위해서는 팔로우(‘따르는 사람’)가 좋아야 한다. 리더는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다. 선의의 경쟁을 하든 아니면 암투를 하든 간에 여러 사람 중에서 경쟁하기 마련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를 리더로 만드는 ‘팔로우가 어떤 생각,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이다. 팔로우가 거짓말에 관대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괴물이 리더가 되는 것이다. 팔로우가 약속과 법을 어기는 것에 관대하면 약속과 법을 어기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 팔로우가 폭력에 관대하면 폭력적인 리더가 나오는 법이다. 편을 가르고 누군가를 심히 따돌리는 것에 익숙하고 관대하면 약자를 핍박하는 리더가 나오기 쉬운 환경이 된다. 국민이 괴물이 되거나 무감각하면 괴물 대통령이 나오는 법이다. 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연하면 리더가 투기꾼이 되는 셈이다. 사실 리더만을 탓할 수 없다. 성찰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겨울이었다. 새로운 각하가 탄생하는 그날 밤, 나는 혼자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 이념적이며 사상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한 아이의 아빠로서 울었을 뿐이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지 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을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최고지도자로 뽑아줄 때,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또 어떻게 가르칠까라는 나름 심각한 생각에 젖게 된다. “얘야 거짓말하면 안 된다”라고 가르쳐야 하는데, “얘야 거짓말해도 성공할 수만 있다면 괜찮단다”라고 바꿔야 하는 것인지. 나는 무섭고 서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괴물을 만드는 부모의 심정은 어떤 것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력과 명예와 부를 좋아한다.


안빈낙도 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일부러 권세와 부를 거부하고 좇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권력을 갖고, 명예롭게 살기를 바라며, 가난하기보다는 여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난 궁금한 게 있다. 자기 자식이 성공하고 출세하여 대단한 권력을 가졌는데 실상은 아주 나쁜 권력이어서 사람들을 몹시 괴롭히거나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면, 그 자식의 부모는 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자식이 크게 성공하여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됐는데, 부자가 된 이후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경박하고 배금주의적 심성에 젖어있을 때 그 자식의 부모는 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식이 자랑스러울까?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못 지키는 자식이 부끄러울까?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웠다는 점에서 그 부모는 스스로 만족하는 것인지?


 



 


물론 부모와 자식은 각각 별개의 인격체이고 각자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부모가 나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자식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것처럼, 자식의 악행을 이유로 부모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난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도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자식이 외견상으로는 부와 명성을 거머쥐어 크게 성공했지만 자식의 악행 또한 작지 않았을 때, 부모는 무엇을 바라보거나 바라봐야 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도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내 아이가 장성하여 권세를 누리거나 큰 부자가 됐는데, 이 아이가 비정하고 잔인하여 그 성공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면, 이게 성공한 육아인지 아니면 실패한 육아인지 그것을 묻고 싶다.


 


 


리더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인간의 모습을 한 팔로십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부모의 양육 가이드를 들여다보면 우리 아이들을 ‘리더’로 키우는 방법론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리더가 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법이다. 인성과 인륜과 어떤 보편적인 도덕론을 아예 빼고 순전히 권세적인 ‘성공’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더라도 극히 어렵다. 순위경쟁을 해야 하고, 유력한 상대방을 견제해야 하며,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해야 하고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한다. 물론 선천적으로 이런 것들에 능수능란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슈퍼 초 울트라 인간’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십 교육이 강조되는 것은 성공에 대한 환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는 까닭이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팔로우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모두가 다 리더가 되려고 나서면 도대체 누가 팔로우를 한단 말인가? 모두가 다 리더가 되려고 하면, 그 경쟁에서 지는 사람이 팔로우가 되는 것이고, 그건 승자와 패자의 상하관계를 만들기 때문에 보기에 너무 안 좋다.


 



 


물론 리더와 리더십은 구별돼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론적으로는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리더십은 ‘리더’라는 권력을 지향하는 욕망을 전제로 한다. 리더십이 아무리 좋은 덕목을 강조하더라도, 리더들은 권력을 누리면서 리더로서의 개인적인 욕망을 행사하기 일쑤다. 종교와 철학의 빛나는 가르침도 속수무책이었던 게 지난 우리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리더십 교육은 리더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어서 리더의 권력남용에 대한 안전장치가 없다. 잘못된 리더십에 대한 안전장치는 법과 규칙인데, 리더는 이것조차 넘어서는 힘을 가지려고 욕망하곤 한다. 게다가 리더십은 리더에게 요구하는 덕목이어서 따르는 사람에게 리더십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리더가 아니라 팔로우다.


리더십은 우리 사회에서 차고 넘쳤다(물론 대부분 좋지 않은 리더십이지만). 리더십이 아니라 팔로우십이 필요하다. 팔로우십은 리더십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안전장치다. 리더십은 모든 사람이 가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팔로우십은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이다. 예컨대 나는 아이들에게: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따르지 마라, 약한 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따르지 마라, 폭력을 쓰는 사람은 따르지 마라, 힘센 사람한테 굽실거리는 사람은 따르지 마라, 누군가를 차별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따르지 마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잘 기억해서 따르지 마라, 남을 배려하는 데 인색한 사람은 따르지 마라, 이런 기준으로 좋지 않은 리더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만나거든 서로 힘을 보태라 등을 가르치련다. 그냥 따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는 있다:


<25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이 있다고 하자. 그 중에서 홍길동이 반장(요즘은 회장이라고 칭함)이 됐다. 홍길동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다. 싸움도 잘한다. 그런데 홍길동이 어떤 이유로 임꺽정을 따돌림하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은 홍길동이 무서워서 어떤 아이는 적극적으로 또 어떤 아이는 소극적으로 홍길동을 따르기 시작했다. 내 아이는 성춘향이다. 성춘향은 홍길동이 거짓말쟁이이고 임꺽정을 따돌림하는 행위가 부당하다고 하여, 홍길동의 행위에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에 홍길동이 분개하여 다른 아이들을 이용하여 성춘향을 핍박(정신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부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집단 따돌림의 문제는 따돌림을 주도하는 주동자의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잘못된 행위를 아이들이 (혹은 우리 어른들이) 인식하는 데 인색하고, 인식하더라도 권력 혹은 분위기에 순응하는 문화다. 우리가 부모로서 각자 자기 아이들에게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따르지 않는” 팔로우십 교육을 하고, 우리 사회가 그와 같은 것을 권장하는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한 명이 무서워서 열 명이 쉬쉬거리며 참을 수도 있다. 열 명 중 어느 누구도 그 한 명에 대항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열 명이 힘을 모으면 위세 당당한 그 한 명과 맞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가 깨우친 민주주의와 양심의 기본 원리다. 이게 우리 자녀교육의 근간이 돼야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난 아이를 그렇게 키우련다. 리더는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팔로우는 가르치면 가능한 일이다. 우선 우리 아이들이 좋은 팔로우가 돼서 그들의 얼굴과 마음에 어울리는 리더를 뽑고 잘 따라가기를 바란다. 그런 자세라면 리더라고 해서 무조건 굽실거리지 않을 것이며, 리더가 아니라고 해서 배움을 얻는 데 인색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공평하고 이성적이며 따뜻한 에너지, 부당한 권위주의에 맞설 수 있는 에너지를 갖기를 바란다. 팔로우들이 팔로우 역할을 잘 하다 보면 그중에서 좋은 리더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도 줄기차게 말했던 일등일등일등 하는 게 무섭기도 하거니와 우습기도 한 것이다. 덧붙인다면 우리 아이들이 커서 그들의 부모 세대가 참 이상한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은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기를 바란다.


 


핍박하는 괴물과 침묵하는 괴물은 서로 한 쌍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자웅동체다. 우리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나와 내 자식과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에게.


 


정우성

twitter:
@hanaeserin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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