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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6. 금요일

아외로워


 


인생은 마라톤이라고들 한다. 나야 인생도 별로 안 살아봤고, 마라톤도 안 뛰어봤으니 둘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논할 만한 자격이 없다. 지난 3월 31일, 인생은 몰라도 마라톤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이 있는 미성년자들을 구경하고 왔다. 이게 뭔 대횐지 동영상을 참고하도록 하자.


 



 


제28회 코오롱 고교 구간 마라톤대회를 보러 경주에 갔다. 경주는 참 재미있는 도시다. 무려 1천 년 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고, 그중 300년은 한반도 남부를 포괄하는 통일왕조였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아래와 같은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한때 평화로웠던 주차장이 이제는 발굴현장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으로 들른 경주는 다시 봐도 이색적인 도시다. 모르긴 몰라도 도시의 절반이 경주 빵과 보리빵을 팔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고, 언덕 같은 옛 왕조의 무덤들이 도시 곳곳에 흔하게 널려있다. 지방도시의 몰개성을 한탄하는 사람에게 경주는 구원이다.


 



 


구간 마라톤이란 쉽게 말해 42.195Km를 여러 선수가 나누어 뛰는 것을 말한다. 고등학교 학생의 경우 총 6개의 구간을 6명의 선수가 나누어 뛴다. 이 대회는 황영조, 이봉주, 김이용 같은 한국 마라톤의 스타들이 모두 거쳐간, 야구로 치면 봉황대기 같은 대회다.


애초에 딴지일보의 사악한 상관들이 나를 경주로 보낼 때는 날더러 마라톤도 뛰어보고, 얼마나 힘든 지를 쓰게 하려던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대회의 성격을 착각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시민마라톤 같은 게 아니고 엘리트 선수들이 자신의 미래를 걸고 뛰는 치열한 현장이었다.


아, 아마 지난 토요일에 KBS 중계로 이 대회를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코오롱이 28년 째 고집스레 계속 개최하고 있으며 KBS가 역시나 고집스레 공중파로 생중계하는 이 대회는 우리나라의 척박한 육상 환경에서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숨은 정치인 찾기. (사진: KBS)


 


우리네 인생이 마라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학생들에게 마라톤은 인생이었다. 한 방에 뙇 와닿게 설명을 하자면, 이 학생들은 이 대회의 성적으로 대학에 간다.


마라톤이라는 것이 아주 긴 거리를 달리는 경기다. 게다가 어디 보통 사람들이 야구나 축구처럼 열심히 마라톤을 보더냐. 4년에 한 번씩 올림픽때나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그래서 마라톤 경기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아래의 사진과 같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기계처럼 왔다갔다 하는 팔과 다리. (사진: KBS)


 


이번 취재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무표정하게 뛰어가는 저 선수들의 인간적인 면모다.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들이 경기에서 보여주는 무표정한 얼굴과, 인간적인 면모의 괴리다.


경기가 토요일 아침에 열렸기 때문에 전날 경주에 내려가서 1박 했다. 선수들과 같은 숙소였다. 티비로만 봐오던 마라톤 선수들을 원도 없이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청소년 마라톤 선수? 그냥 애다.


 



지루한 개막식. 스마트폰 없었으면 어쩔 뻔


 


공식 행사 지루해하고, 낯선 곳에서 낯선 또래들과 1박을 하게 된 선수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수학여행 온 중고생의 그것이었다. 다행히 여느 수학여행과는 달리 들뜬 마음에 다른 학교 아이들과 패싸움을 하는 몸으로 나누는 교우관계를 시도하는 친구들은 없는 듯 했다.


 





수학여행 간지


 


누가 봐도 수학여행 온 고삐리들이었던 선수들. 나는 이들에게서 다음날 경기에 대한 불안초조긴장, 낯선 잠자리에 대한 이유 모를 설렘, 다른 학교 학생들을 의식한 되도 않을 쎈 척 등의 징후를 발견했다.


 



손등에 그림도 그려보고


 



네티즌들이 보내준 응원 메시지도 읽으며 다음날 경기를 준비한다.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다음 날 경기가 가능하긴 할지 걱정이 됐다. 선수들이 비오는 경기 전날 밤을 뭘 하며 보내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피곤해서 그냥 잤다.


 




 


아침에 일어나 출발지점에 나가자 선수들이 벌써 나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나같은 민간인 아저씨라면 3일을 앓아 누울 정도로 뛰어다니는 것이 이들의 몸풀기였다. 물론 현장에는 선수와 코치 이외에도 선수의 학부형들도 나와있었다.


 



"아들! 잘뛰어~"


 


아들의 선전을 기대하는 부모님의 응원은 양면적이다. 마라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어준 총수의 지론에 따르면 우리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현장에 나온 수많은 선수 부모님들을 보며, 이들이 달리는 이유가 단지 자신의 꿈과 스포츠정신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들의 어깨에는 보다 많은 것들이 지워져 있었다.


 



턱돌이의 부업


 


드디어 출발.


 



 


선수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나를 이들과 함께 달리게 하려던 필독 부편집장의 음모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이들의 속도는 나의 전력질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을 따라가려면 최소한 7.7Km를 전력질주로 달려야 한다. 상식적으로 담배지옥 딴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 정도의 지구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있나.


 



 


차량을 이용해 선수들이 다음 주자와 교체하는 중계구간으로 앞질러 이동했다. 중계구간에서 하나둘 들어오는 선수들의 사진을 찍기로 했다. 구간 심판과 대기하는 선수를이 모여 와글와글 정신 없는 중계구간.


 



 


사진을 찍다 말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경기 장난이 아니었다.


 



 


선수들이 자기 구간을 뛰고 많이 지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픽픽 고꾸라질 줄은 몰랐다. 선수들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지고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숨을 쉬며 어떤 선수들은 울기도 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왔다. 불쌍하다거나 대단하다는 것과는 좀 다른 감정이었다. 어젯밤에 숙소에서 봤던 아이들과의 이질감이 컷다.


모든 것을 무언가에 올인한 아이들. 다른 모든 잠재력과 일탈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하나의 기준에 맞춰 '잘 하는자'와 '덜 잘하는 자' 로 규격화하는 어른들. 내가 마라톤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라톤이 아닌 어디선가 많이 보아오던 구조다.


 



(사진: KBS)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선수들의 터무니 없이 진지한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경기이니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젯밤 숙소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니던 해맑은 학생들은 모두 어딜 가고 이토록 진지한 전사들만 남아있단 말인가.


 



고등학교 구간마라톤 경기와 동시에 15Km의 단축코스를 4명의 선수가 뛰는 중학생 구간 마라톤 대회도 같이 진행됐다.


 




저들 중에 미래의 황영조나 이봉주가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에 10년 뒤에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그 주인공은 저 사진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마라톤 코스를 따라다니면서 다 달리고 힘들어 쓰러지는 선수들을 보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물론 달리고 나서 쓰러져서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내가 오래달리기랑 군대축구랑 해봐서 아는데 신체적 한계와 마주 하는 카타르시스도 의외로 괜찮다. 그런데 이건 뭔가 달랐다. 심지어 슬퍼보이기까지 하는 처절함이 있었다.


 




(사진 : KBS)


 


그래도 선수들은 열심히 뛴다. 스포츠맨쉽일 수도 있고 학교의 명예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일수도 있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


 





 


단언하건대 경기를 지켜본 누구라도 누가 더 잘 하고 못하고를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뛰는 선수도, 그보다 못 뛰는 선수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승자라는 말, 그거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모두가 승자인 경기는 마침내 끝이 났다.


 



 


경기중에 처절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냈던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다시 동네에 흔한 고삐리, 중삐리로 되돌아왔다.



"너 오늘 카메라 비추는데 완전 죽을려고 하더라 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아냐 오늘 하나도 안힘들었는데 ㄲㄲㄲㄲㄲㄲ 기록 내가 더 좋음 ㄲㄲㄲㄲㄲ"



류의 대화도 오고 가고 전체적으로 웃음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이게 참 적응이 어려웠다. 티브이에 비친 고등학교 선수와, 마라톤부 고등학생의 괴리. 그 느낌은 아래 사진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괴물같은 주력을 보여준 상지여고 강현지 선수(사진: KBS)


 



경기 후 상지여고 강현지 선수


 


경기가 끝났으니 응당 시상식이 뒤따른다. 이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보다시피 조선일보 방상훈 씨와 KBS 김인규 씨가 주는 상패가 수여된다.


 



 


선수들의 표정이 밝아보이지는 않지만 저 선수들은 지금 무척 행복한 상태다.(라고 추정된다) 코오롱 그룹은 우승한 선수들에게 싱싱한 진짜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이 회사가 마라톤에 쏟는 노력은 칭찬해줘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황영조나 이봉주는 나올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영조나 이봉주가 되지 못한 수많은 선수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코오롱의 유영욱 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실업팀에 가는 선수들은 많지 않아요.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중고등학교 육상 지도자가 됩니다. 운동을 그만두는 선수들도 있어요."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시상식이 가장 어려워요. 순위에 든 선수들을 생각하면 안 할 수는 없는데, 순위에 못 든 선수들에게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앉아있는 것도 힘들거든요. 참가한 선수들 모두가 승리자라지만 그래도 순위는 정해지니까요.”


 


선수들의 치열한 노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 년 간 보아온 실무자로서 느끼는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가. 모두가 위대한 승리자지만 결국 순위는 정해지는 것. 인생이 마라톤과 같은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아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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