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3. 03. 19. 화요일

독투불패 Regen



동네가 시골구석이라 버스가 잘 안 다닌다. 보통은 제 시간보다 5분에서 10분 정도 늦게 오지만 때로는 15분쯤 빨리 오기도 한다. 한 대를 놓치고 나면 다음 차가 늦게 올 경우 40분 이상을 기다려야하는 매우 엿 같은 상황이 수시로 일어났다. 짜증이 쌓여가던 어느 날 드디어 내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고, 이제 35년간의 뚜벅이 생활을 마감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야 차를 사고 싶지만 보험료와 기름 값이 나가면 술 마실 돈이 남아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러타 이거슨 운명의 데스티네이션, 조낸 멋진 중고 스쿠터를 사서 드라이버가 아닌 라이더가 되는 거다.’


거지같은 버스를 거의 한 시간 동안 기다렸다 타고 나가서 동네 오도바이 센타에 갔다. 내가 생각한 예산은 50만원 쯤, 기대했던 애마의 모습은 뭐, 이정도.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했던 검은 독수리라는 미드가 떠올랐다. 덤으로 이런 언니들이 운명처럼 따라와 줄 것만 같은 묘한 기대감도 약간.



c0056531_9353172.jpg

 

그런데 센타 사장님이 내가 주로 나다니는 거리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좀 더 큰 녀석을 사는 게 낫겠다고 했다. 사장님이 추천한 녀석은 이 놈.


 

rx.jpg

 

 

중고라서 여기저기 녹은 좀 슬었어도 관리 상태는 괜찮아 보였고 가격은 110. 깨끗하게 손질 해 주겠다는 말에 뭐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계약금 20만원 걸고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막 센타를 나오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사장님 자동차 면허로 오토바이 못 타게 될 거라고 하던데 아직 탈 수 있죠?”


아니요, 이제 못 타요. 원동기나 2종 소형 따셔야 돼요.”



, 이건 계산에 없던 상황인데. -_-

 

집에 와서 검색과 궁리를 시작. 오토바이 면허에는 원동기와 2종 소형이 있다. 125cc미만은 원동기 면허로 몰 수 있고 125cc 이상은 2종소형이 있어야 한다. 원동기나 2종소형이나 코스는 동일하고 시험 보는 오토바이의 기종만 다르다. 코스는 똑같고 기종만 다른 거면 뭐하러 원동기를 따겠나. 2종 소형으로 결정. 코스의 모습은 이렇다.


 

원동기면허시험장_2종소형면허시험장2종소.jpg

 

시험장을 알아보니 가장 가까운 곳이 용인이나 의정부. 존나 멀어. 게다가 시험 감독을 짭O가 하는 좆같은 상황. 나는 짭O만 보면 쫄아서 합법적으로 하던 짓도 불법처럼 보이게 하는데. 혹시 긴장해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존나 먼데를 또 가야하고 또 짭O를 봐야 되네.


검색해 보니 면허 시험장 합격률이 대충 20~30%. 한 때 씨티100을 타고 수많은 짜장면이 불기 전에 배달했던, 가엾게 튀겨진 닭들을 식기 전에 바람처럼 배달했던 경력으로 볼 때 떨어질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재수 없어서 떨어지면... 나는 다음 주에 오토바이를 사기로 했는데 붙을 때까지 무면허로 타야하나.

 

자신이 없어서 새누리 치세 하에서는 짭O를 멀리하겠다는 신념에 따라 면허시험장은 접고 학원에서 자체적으로 시험 보는 운전학원을 찾기 시작. 근데 또 오토바이 기능 가르치는 학원이 근처에 없네. 가장 가까운 데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시 버스타고 한 시간 반을 가야하네. 하아, 씨발, 배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어. -_-;

 

가격을 알아보니 대략 30. , 내 피같은 30만원. 아무튼 다음날 존나 먼 운전학원에 가서 접수하고 예약. 10시간 타고 3시간 안전교육 듣고 다음날 시험. 다음 주 안에 끝나겠다는 생각에 일단 안심.

 

그러나 첫 수업부터 고난의 시작. 합격점수 90점이고 선 밟으면 10점 감점, 발 땅에 닿아도 10점 감점, 장애물 건드려도 10점 감점, 코스 이탈하면 실격, 출발 신호 후 20초 안에 코스에 진입 못해도 실격. 결론적으로 선 두 번 밟거나 발 두 번 땅에 대면 탈락. 미라쥬 250으로 배우는데 말 존나 안 듣고 존나 무거움. 강사한테 쿠사리 존나 먹음. -_-;;

 

어쨌든 감 잡고 웬만하면 붙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기능수업 끝나고 학과수업 받음. 첫 시간에 인상 좋은 강사아저씨가 나한테 물어봄.


자동차면허증으로 오토바이 탑니까 못 탑니까?”


나 자신 있게 대답함.


못 탑니다.”


강사아저씨가 말함.


아닙니다. 아직 법 개정이 안 돼서 자동차 면허로 125cc까지 탈 수 있습니다.”

 

, 그럼 씨발, 나는 지금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필요도 없는 2종 소형 면허를 따려고 하루에 세 시간씩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나보다 나이도 어릴 거 같은 싸가지 없는 강사한테 쿠사리 존나 먹으면서 30만원을 쓴 거 네. 어쨌든 있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함. 다음 날 시험 합격.

 

오토바이를 받으러 갔더니 잘못된 정보로 나에게 2종 소형을 따게 했던 사장님이 차주가 등록증을 잃어버렸다고, 신청해서 나오는데 보름 걸린다고, 우선 타고 가고 나중에 등록증 받으러 오라고 함. 찜찜해서 등록증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고 그냥 옴. 한 달이 지나도 아직 안 나왔다고 함.


장물인가 싶어서 안 산다고 계약금 내놓으라고 했더니 맡겨뒀다 다른 걸 사라고 함. 슬슬 열 받기 시작. 다른 거 사게 되면 그때 낼 테니까 돌려달라고 함. 사장이 지금 돈 없다고 이체해 준다고 해서 계좌번호 적어주고 옴. 일주일 동안 송금 안 해주길래 전화해서 독촉 했더니 다음날 입금. 씨발, 짜증나서 중고 말고 새 오토바이를 다른 곳에서 사고 말겠다고 마음먹음.

 

125cc 새 차 사려고 알아봤더니 250에서 300정도. 지르기로 결심. 심사숙고 끝에 이놈으로 결정.


 

eba19ceb939cec9c88_06_steve7856.jpg

 

    

돈 없어서 할부로 할지 대출 받을지 고민할 때 쯤 오토바이 타는 친구 놈한테 전화 옴.



, 나 오토바이 정리할건데 니가 사라.”


얼마에 줄 건데?”


“1000.”


돈 없어.”


우선 500에 가져가고 나머지는 생길 때 부쳐.”


그럴까?”


근데 너 이거 타려면 2종소형 따야 돼.”


그게... 있어. 어떻게 하다보니까 생겼어.”



첨엔 우선 500주고 나머지는 천천히 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은행에서 1000만원 대출 신청하고 있는 나를 발견함. -_-

 

친구한테 오토바이 넘겨받고 일하는 데 타고 감. 처음에 스쿠터 산다고 했을 때, 싸고 기름도 적게 드니까 동네에서 타기 좋겠다고 했던 동료의 눈이 휘둥그레짐.


얼마임?”


”1000.”


”미쳤음? 그 돈이면 차를 사야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원래는 스쿠터를... 좀 더 보태서 110만원 짜리...

원동기보단 2종소형이... 등록증을 안 줘서... 새 거를 300주고 사려다... 친구가 500이면...  

... 오토바이는 재밌잖아.”


 

2038653890_rnvb92xz_p0048368_shias.jpg

버스가 제때 안 와서 차는 비싸니까 스쿠터를 사려다 갖게 된 재밌는 1000만원 짜리 탈 것
(내 거랑 같지만 내 거 아님)

 

2013-03-17_13-44-41_115.jpg

이건 요즘 유행하는 여친이 찍어준 사진



오늘 낮에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바이크 타고 놀러 다닌 게 자랑. 대출금 갚느라고 술값 아끼는 건 안 자랑. 뒷자리에 태울 여자 사람이 없는 것도 안 자랑. 아무튼 오토바이 타는 거 조낸 재밌음. 사는 게 재미 없으면 오토바이를 타보아요.

 








독투불패 Reg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