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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0.수요일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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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 : 치킨수프


난이도 : 침팬지 수준


요리 시간 : 침팬지 마음


재료비 : 담배 한 갑 이하


준비하고 요리하고 치우는 주체스러움

: 집 앞에 분리수거 하고 오는 정도


인분(人分)

: 멕이고 싶은 동료 침팬지의 숫자에 따라 늬덜 꼴리는 대루


기타 : 서양 요리라는 이유만으로 어쩐지 있어 보인다.



 






각종 자취생 및 가장, 솔로와 커플 모두를 포함한 남자 늬덜이 얼마나 요리를 못하고 또 두려워하는지 본지는 안다. 식욕 때문에 혹은 가난 때문에 철근이라도 씹어먹을 늬덜일지라도 맛에 대한 희구는 있을 터. 철근을 용케 소화해 뼈와 살로 보낸다 한들 철근은 맛이 없잖냐. 점심에 끓인 라면 국물을 남겼다가 저녁에 밥 말아먹기를 반복하며 자포자기적 식생활을 영위하는 독자열분덜과 한 줄기 인간다운 빛을 공유하고자 기획된 시리즈, <남자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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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성 동지들이 읽지 말란 법 일절 없으나, 본연의 취지는 주방에 서면 난 누구고 또 여긴 어딘지 알 수 없는 혼돈에 빠지는 남성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걱정하지 말자. 거긴 주방이고 넌 너다.


자 이제 첫빠따로 치킨수프 한 냄비 끓여 보실까. 워낙 쉬운 요리다 보니, 이 얘기 저 얘기 두런두런 해가며 수프가 익길 기다려보자.


케이블 TV에서 해외축구나 구경하는 외롭고 배고픈 밤. 지방은 인격일 뿐, 남자는 칼로리 따위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늬덜은 치맥을 먹는다. 남자의 요리, 치킨수프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남자의 요리는 생닭을 사서 손질하고 준비하고 어지럽히고 정리하는 귀찮음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켜 먹고 남은 후라이드 치킨이 있음 된다. 먹다 남은 약간의 후라이드 치킨으로 새로운 요리를 창조해 보는 거다.


그러나 강조한다. 양념치킨은 안 된다. 요새 트랜드랍시고 파니 간장이니 이것저것 때려 넣어 맛이 복잡한 치킨도 안 된다. 그냥 가장 평범한, 기본적인 후라이드 치킨만 쓰자.


그러므로 준비 1 : 후라이드 치킨을 시켜서 괜히 혼자 배부르게 억지로 다 먹지 말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남기면 되겠다. 깔끔하게 뼈 사이를 훑을 필요도 없이 그저 암 생각 없이 먹고 남은 걸 냉장고에 넣어놓기만 하면 끝. 며칠 내에 그걸로 치킨수프를 끓이면 된다.



후라이드 치킨으로 이게 정말 되냐구? 된다.

왜냐. 수프는 수프가 아니다. 뭔 말인고 하니 ‘특정한 상황에서 먹는 특정한 서양 요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수프는 그저 국물 요리의 총칭이다. 영어백과에서 치킨수프 항목을 찾아보면 ‘세계 각국의 치킨수프’ 항목 ‘한국’란에 삼계탕과 백숙이 뜬다.

더욱이, 서양의 수프는 ‘세계 각국’의 수프보다 만들기 쉽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귀찮은 과정은 모두 생략하고, 동화나 영화 등을 통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전통적인 유럽 가정집 내지는 여관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거기 산타클로스 할부지 들어가는 굴뚝이랑 연결된 벽난로 있지? 그리고 거기 커다란 솥에 수프 항상 끓고 있지 않냐.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를 붙잡아보자는 거다. 그리고 이것을 현대 서양식 수프의 원형이라 생각하면 된다. 

근데 항상 끓고 있으니까 자연히 계속 쫄겠지? 그럼 물 좀 넣는다. 밤에 일어났는데 출출하다... 그럼 한 사발 떠 먹는다. 오늘 저녁 차리고 남는 식재료가 있다. 그럼 솥에 싹 때려 넣는다. 싱거우면 소금 치고 짜면 물 넣는다.


이게 수프다.


동시대 고려나 조선에 비해 생활수준이 현저히 낮았던 중세~근대 유럽인들이 값싸고 빈약한 재료로 좀 덜 배고파 보기 위해 항상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음식이 수프다. 아침과 점심을 수프로 때우고 저녁엔 거기에 약간의 씹을 거리를 추가하는 식이다. 여관 손님들에게도 수프는 필수적으로 제공된다. 수프는 기본 서비스로, 따로 값이 책정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투숙객들은 수프만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울나라에서 김치가 맛있는 식당이 칭찬받는 것처럼, 수프가 괜찮은 여관집은 평이 좋았다.

생각해 보자. 누가 한 그릇 먹는다고 해 봐야, 그 만큼의 물만 넣으면 바로 원래의 양을 회복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지나는 과객이나 가난한 이들이 자연스럽게,


“수프 한 그릇만 주시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옛날 유럽 어느 주택가의 고아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 동네의 수프로 살고 있다고 봐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수프 한 그릇 적선 안 하는 놈’이란 말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구두쇠를 가리키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 

벽난로의 불과 연관이 깊은 만큼, 수프가 상시 준비되는 계절은 아무래도 겨울일 터. 방금까지 끓고 있던 수프는 춥고 배고픈 방문자의 몸을 녹이는 역할도 했다. 


암튼 그러다가 일요일이 온다. 일요일은 각 집안이 나름 신경 써서 음식을 해 먹는 날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서린 때이니만큼 고아, 과부, 거지들이 ‘주일 특수’를 누리는 날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일요일에 찾아온 구걸은 거절하기가 좀 그렇다. 거기다 지난 일주일 간 많이 쫄기도 했고, 이제 하도 끓어서 재료 형태도 거의 없어지고... 뭣보다 제대로 된 주일 저녁상 보려면 주방의 재료도 함 리뉴얼 되고 - 다시 말해 새 수프 재료가 생기고.

하여 꼭 그러란 법은 없지만... 만약 여러분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데 가정집 풍경이 등장한다고 가정해보자. 주부가 일요일에 남은 수프를 적선하고 새 수프로 갈아타는 장면을 넣는다면, 어디 가서 이 대목 어색하다는 얘기 들을 일 없을 거다.

혹은 육식이 귀한 옛날이다 보니, 일요일 온 가족이 고기 수프를 끓여서 적은 고기로 양껏 육식을 하는 풍경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이 경우 먹고 남은 수프는 자연히 육수가 되어, 다음 며칠 간 뭘 넣어도 나름은 고기 국물을 먹게 되겠지.


또 하나 생각난 재밌는 얘기. 마녀 이야기 잠깐 해 볼까.

마녀의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갖은 재료를 중탕으로 끓여 요사스런 힘을 지닌 약물을 만드는 거다. 이 모습은 물론 수프를 오래도록 끓이며 적당한 재료가 생길 때마다 가리지 않고 때려 넣는 유럽 서민의 생활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과부들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곤 했는데, 연고 없는 가난한 여인(아마도 중년 이상이거나, 상당수는 할머니)도 종종 마녀로 몰리곤 했다. 홀몸의 여인이 사회활동을 하기가 힘든 당시의 현실상 노상 집안에 있게 되는데, 자연히 난로 앞에 앉아 소일하게 된다. 난로 앞에 있다는 말은 수프를 끓이고 있다는 말과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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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재산이 없을 경우, 이러한 여인들은 마을 외곽이나 근처 숲 속 등에서 단촐한 살림을 꾸리며 호구지책으로 일종의 서비스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초나 보양식 등의 민간 요법에 종사하게 되는 것이다. 먼데 갈 필요 없이 울나라 강원도에도 약초 캐다 파는 걸로 용돈 벌이 하시는 할머님들 꽤 되신다. 이런 분들은 뱀에 물렸을 때 어떤 풀을 이겨 바르는 지, 벌침은 어떻게 놓는지 하는 잡다한 요법에 빠삭한 경우가 많다.

마녀사냥이 성행하면서 이런 ‘자영업’ 여성들의 처방이 효과를 발휘했을 경우, 그게 마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얻은 사악한 능력으로 몰리는 사태가 흔치 않게 일어났다. 거기다 웬만한 재료는 생기거나 남는 대로 넣는 게 수프이다보니, ‘마녀’들의 솥에는 버섯과 약용 식물 등 주택가의 일반 식재료가 아닌 게 들어가는 법이다. 그러니 마녀로 몰리면 이 수프도 당연히 범상찮은 취급을 받게 마련. 마녀가 나오는 만화에서 보라색, 녹색 등 괴악한 색으로 부글부글 끓는 약물의 정체는... 


걍 수프다.  

위의 이유로 웬 특제 수프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수프는 도무지 어려울 수가 없다. 여러분은 어려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할 일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 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쉬운 게 더 쉬워진다.

자 이제 실컷 떠들었으니 수프 함 끓여볼까.




자 이제 해 보자!



먹다 남은 치킨을 준비한다(전날 치맥 먹고 담날 치킨수프로 해장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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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3 가량이 남은 것. 그러나 수프의 특성상 '적당히'만 있으면 얼마를 남겨도 상관 없다. 미리 수프 끌일 걸 생각하고 발려가면서 먹어도 되고 생각 없이 먹고 나서 살만 떼다가 끓여도 되며, 그냥 남은 전체를 싹 다 넣었다가 끓이는 도중에 심심할 때마다 뼈를 발라도 되고, 아님 걍 수프를 먹으면서 발라도 된다. 그냥 편한 대로 해라. 결과는 똑같다. 


나는 여기서 계량컵으로 몇 미리니, 설탕 반 스푼이니, 어느 시점에서 뭘 넣고 한 번 더 볶아주느니, 어떤 재료가 어떤 상태로 얼만큼씩 있어야 하느니... 따위로 여러분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할 생각이 없다. 남자는 그딴 거 없다.유럽인들은 수프를 그렇게 끓이지도 않았고. 


이제 수프에 들어갈 야채를 준비해야지? 참고로 지금 만드는 치킨수프는 보편적인 맛으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프랑스 - 미국식 치킨수프로, 보통 어디 가서 '치킨수프'라고 하면 80% 이 수프를 가리킨다. 여하튼 감자와 당근과 양파가 있으면 된다. 미국인들은 샐러리도 넣곤 하지만, 맛에 영향이 없다. 걍 샐러리도 먹자고 넣을 뿐. 


자, 당근을 팍팍 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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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냉장고에 당근이 하나 있길래, 다 썰었다. 정해진 양 따윈 없다. 수프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정량 따윈 없다. 당근을 많이 넣어 생기는 결과는, 당근을 많이 먹게 될 뿐이라는 거. 맛에 상관 없고 보기에도 별 상관 없으니까 맘대로 신나게 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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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역시, 한개를 반으로 썰어서 비닐에 싸서 냉장고에 넣고 하는 것 따위 귀찮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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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 다 썬다. 써는 요령 따위는 없다. 대~~충 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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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도 두세 개 썰어준다. 거기다가 중요한 거. 이게 원래는 프랑스식과 이탈리아식이 혼합돼서 현대 미국식이 된 거라 봐야 하는데, 그럼 이탈리아식은 뭐냐. 바로 마늘이다. 이탈리아 사람들 마늘 많이 먹거덩. 치킨수프가 우리에게 이국적인 맛을 내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이유, 그건 마늘이 들어가 닭국물과 찰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늘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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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라. 그저 몇 개다. 딸랑 한알 넣거나 한 바가지를 넣으면 물론 안 되겠지. 서너 개에서 스무 개 사이의 어떤 양도 오케이다. 이 안에서 마늘량이 많아질수록 한국적인 맛이 될 뿐. 남자는 계량기 따위 쓰지 않는다. 남자는 직진이다. 참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대로 난 얼어있는 거 썼다. 그 이유는 그저 냉동실에 보관하다 꺼냈기 때문으로, 수프는 어차피 푹~ 끓여 먹는 넘이기 때문에 때려 넣을 때의 상태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내가 끓인 양은 대략 3인분 정도 되는데, 양 조절 뭐 그런 거 생각하면 안 된다. 본지는 남성독자 늬덜에게 그런 어려운 거 권하지 않는다. 요리는 쉽다. 가장 단순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3명 먹을 분 준비하는 데 양파를 하나 넣으면? 그럼 양파를 각자 1/3 씩 먹게 될 뿐. 그저 섭취하거나 대접하고 싶은 양만큼 넣으면 만사 OK. 


그렇다면 많은 인분을 먹일 경우, 재료비로 제시한 담뱃값인 2500원이 쬐금 넘어갈 수도 있겠다(치킨 값은 뺐다. 음식물쓰레기 봉투로 갈 걸 구조했는데 0원인 게 당연하잖아?). 간단을 지향하는 레시피답게, ‘담배 한 갑이라며?’라 따지는 독자에게 답할 말도 간단하다. 라이터 하나 같이 사라.


자 이제 프랑스식 묘기를 부릴 시간. 오직 요거 하나만 잘 하면 된다. 물론 묘기라고 해서 정말 소정의 실력이 필요한, 무슨 중국집 주방장이 쿵후하듯 대형 후라이팬 돌리는 그런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남자 늬덜의 수준과 너무도 쉬운 치킨수프 레시피를 고려했을 때 그나마 딱 하나 묘기라는 거다. 


자, 루(roux)를 만들어보자. 루라는 건 울나라로 치면 마늘다대기나 양념장처럼 국물의 감칠맛을 만들어내는 핵심이다. 이거 없이 수프 끓이면 정말로 가난한 중세 유럽인과 같은 맛을 공유하게 될 거다. 너무나 쉽고도 쉬우니 자신감을 갖고 하자. 


아 또, 정말 쓸데없이 복잡한 네이버 지식인 류의 치킨수프 레시피를 보면 루를 정확히 얼만큼의 양을 준비해라... 는식으로 나온다. 그딴 거 읎따. 이 루를 마트 등에서 팔기도 하는데, 루는 넣는 게 아니라 볶는 거다. 그게 진짜다. 대체 이런 것까지 사서 넣을 생각을 하는 양넘들을 보면 얘네는 요리를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당췌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굳이 루라는 생소한 걸 사다가 재놓고 계량하고 넣는 것보다 그냥 즉석에서 볶는 게 훨씬 덜 귀찮고, 훨씬 더 맛있다. 


자, 수프를 끓일 냄비(통 크게 넉넉한 사이즈로 준비하자!)에 버터를 적당량 넣는다. 이 적당량이란 늬덜 엄지손가락 크기 하나 이상의 양을 말한다. 계량 따윈 없다. 아 씨바 물론 서울우유 버터 한 팩을 다 넣음 말도 안 되지. 엄지손가락(그저 대충이다. 정확할 필요 없다.) 하나를 1인분으로 생각하면 땡이다. 거기서 더 넣으면 입맛에 따라 조금 느끼해 지겠고, 덜 넣으면 깔끔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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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남자답게 대충, 박력있게 던져넣는다. 


도무지 실패할 수가 없다. 만약 느끼하면? 그럼 국자로 국물 맛 보다가 마늘 쬐금 더 넣고... 왜 라면 같은 거 끓일 때 거품 올라오잖아. 불 키우면 버터의 유지가 그런 식으로 올라온다. 그거 좀 걷어주고, 먹을 때 후추 좀 치면 된다. 너무 밍밍하면? 늬덜이 너무 알뜰해서 버터를 손톱만큼 넣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생기기 힘들다(옛날 정말 가난한 이들은 루를 볶을 버터와 밀가루가 없어서 밍밍한 국물에 만족해야 했지만 말이다.).


단, 끓이는 도중에 버터를 추가로 넣지는 말자. 왜냐면 국물맛을 내는 건 버터로 만드는 루지, 버터 자체가 아니거든. 이제 밀가루를 꺼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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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버터가 잘 녹고 있는지 슬쩍 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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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를 적당량 넣어주면 된다. 대략 한 줌 정도 되는데, 적당량이란 그저 늬덜의 취향을 따른다. 조금 넣으면 국물이 맑아지고 많이 넣으면 걸쭉해진다. 또한 적당량이란, 늬덜이 보기에 버터랑 섞여서 대충 찰흙(밀가루가 버터에 비해 많을 경우)이나 진흙(밀가루가 버터에 비해 적을 경우)이 될 양을 뜻하기도 한다. 계량 따위 신경쓰지 말고 알아서 몸에 장착돼 있는 눈과 두뇌를 믿어라. 그 양은 그냥 눈에 보이는 양이다. 


밀가루를 물에 개어서 넣느니 뭐 그딴 거 없다. 그냥 밀가루를 녹고 있는 버터와 섞어서, 즉석에서 익히는 동시에 반죽하는 것이다. 인스턴트 수프 때문에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수프=가루]라는 공식은 없다. 인스턴트니까 가루인 거지, 수프라서 가루인 게 아니다. 육개장사발면이 가루스프로 맛을 낸다고 해서, 육개장에 가루를 타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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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달달 볶아준다. 가만 놔두면 당연히 타서 눌어붙겠지. 당연하잖아. 그냥 당연한 상식의 과정을 따라가면 되는 거다. 이렇게 익고 있는, 버터와 밀가루의 결합체가 루다. 이 간단한 걸 왜 굳이 찾아 사서 쓰냐, 귀찮게. 


그런데도 양 조절을 실패해서, 가령 밀가루가 와락 쏟아지는 바람에 버터에 잘 붙지 못하고 막 타고 있다면? 그럼 불 잠깐 끄고 버터를 더 넣은 후 다시 볶으면 될 뿐. 국물맛이 좀 더 고소해지는 게 전부다. 루가 익는 시점이란 건, 황토색에서 진갈색 사이기만 하면 된다. 근데 그조차조 조절을 못해서 타고 있으면....? 가스렌지 불 끄는 법 알지? 끄고 물 넣어. 조금 진한 색 국물로 먹는 거지 뭐. 


위의 사진에 보듯이, 나도 사진 찍는답시고 조금 태웠다. 연기 피우며 바직바직 탄다고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말자. 루가 타서 생기는 올바른 결론은  '역시 요리는... 난 절대 안 돼'라는 자아비판이 아니라, 나중에 냄비 설거지할 때 그 부분에 힘 좀 더 쓰게 되는 거다. 먹지 못할 만큼 탄 루는 어차피 국물에 스며들지 않는다. 먹어도 될 정도라면 알아서 국물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부디 안심하고, 편한 마음으로 하자. 


자, 이제 달달 볶아진 루를 품고 있는 냄비에 물을 넣자. 물은 늬덜이 결과적으로 먹을 수프의 양보다 적게 넣기만 하면 된다. 700ml니 뭐 그딴 거 없다. 왜냐. 끓이면서 여유롭게 첨수해가며 맛 조절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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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는 교범이나 공학 매뉴얼이 아니다. 걍 어떤 이가 만든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요리의 레시피가 어렵다면, 무조건 상식만 생각해라. 미리 끓여놓은 물을 넣는다는 둥 그런 건 그저 취향일 뿐이다. 예컨데 미리 포트에다가 끓여놓은 물을 넣는 것과, 차가운 물을 바로 넣는 것의 차이는 끓는 시간의 차이라는, 물리적 기초상식에 의존하면 그만이다.


설마 이렇게 끓여도 맛이 있을까 싶을지도 모르겠다. 



맛있다. 상당히 맛있다. 치킨수프는 이렇게 끓여도, 아니 이렇게 끓이기 때문에 맛있는 요리이고 늬덜이 할 수 있는 요리 중 '가성비' 즉 투입되는 실력 및 노력 대비 맛의 성과가 가장 뛰어난 요리다. 

물이 끓으면 치킨과 당근과 감자와 양파와 마늘을 싹 다 때려넣는다. 순서 뭐 그딴 거 없다. 남자는 직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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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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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



이제는 끓이는 일만 남았다. 알아서 물 조절해라. 끓이는 시간은? 늬덜 맘이다. 보통 외국 요리 사이트에 치킨수프 끓이는 법 찾으면 총 요리 시간 25분이라고 되어 있다. 웃기는 소리다. 위에 수프 얘기 써 놓은 거 봤지. 3시간을 끓여도 된다. 양파가 좀 물러지겠지만 그거야 먹는 사람 입맛대로지 뭐. 기본적으로 국물 요리라는 건 끓일수록 진국이다. 즉 늬덜이 국자로 떠먹어가며, 맛이 들 때까지 푹~~ 끓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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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고놈 잘 끓고 있구만. 뭐 심심하면 통마늘이나 숟가락으로 이겨주고 있덩가. 귀찮으면 걍 먹던가. 좀 덜 귀찮으면 미리 썬 채로 넣어도 되고... 마늘 꼴 보기 싫음 애초에 갈아서 넣던가... 


냄새 좋은 국물이 끓고 있자니 쐬주 생각 나누나. 남자는 욕망을 참지 않는다. 낮술 한 잔 해 준다. 대저 풍류란, 애써 멋을 부리고 돈을 쓰는 게 아니라 욕망의 순간을 배신하지 않는 것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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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간 맞춰주고, 수프 저으며 그럴듯한 요리사가 된 기분도 즐기다가 잠깐 집 밖에 나가서 담배도 한 대 피워 주고... 놀랍게도 이게 레시피의 전부다. 그래도 늬덜을 위해 함 정리해 보자.




재료준비 - 먹다 남은 치킨, 양파, 당근, 감자, 마늘


루 제조 - 버터랑 밀가루를 걍 쉐낏쉐낏 볶아


끓여보자 - 물과 재료 팍팍 투하 


완성 - 심심할 때마다 물이랑 소금간 조절해가며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됨




늬덜의 수준을 감안해 길게 썼을 뿐, 이게 끝이다. 


세상에 이보다 쉬운 요리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한 결과물이 영 맛이 없거나, 난해한 괴식이라면 찾아와라. 나한테 따지라고 오라는 게 아니다. 혼나러 오라는 거다. 늬덜한텐 화 내도 될 거 같다.



여담인데, 이거 여자친구에게 해 주면 즉빵이라는 본 기자의 개인적 경험이 있다. 일단 여자들이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있는데다가, 치킨수프라는 게 여성들의 입맛에 딱 맞기도 하고, 어떻게 끓여도 모양새가 그럴듯하게 나온다. 게다가 울나라 요리가 아니다. 외국의 요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꽤나 남자를 낭만적으로 보이게 한다. 무엇보다 맛있다. 그런 전차로 여친에게 치킨수프를 대접한 날 밤은 혼자서 베개를 끌어안고 외로이 잠들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참고해라. 


자 수프가 아직 끓고 있으니, 잡담 좀 더 해볼까. 듣기 귀찮음 패스하덩가. 여튼 여친이 인문학적 취향이 있는 편이라면, 치킨수프 떠 주면서 이 얘기 해줌 꽤 잘 통할거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뭘까. 닭이다. 왜 다른 유럽 국가들마냥 간지나는 사자나 독수리가 아니라 닭인지, 잠깐 역사구경 좀 해 보자. 귀찮은 사전 사항 다 넘어가고, 암튼 프랑스는 종교전쟁의 고통을 제대로 당한 나라다. 전통의 가톨릭 프랑스인과 신교도인 위그노 프랑스인들은 무려 4차에 걸쳐, 2세대에 걸쳐 같은 프랑스인들끼리 지독한 내전을 치렀다. 


전쟁의 목적이 종교이다보니, 국가 자체의 의미는 중요시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과도 유리된, 지금 보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잔혹함이 횡행한 전쟁이다. 이렇게 혼란한 와중에 나바르의 군주 앙리4세는 프랑스 왕위계승 경쟁에 뛰어든다. 그는 위그노 신교도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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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기셨다. 털털하기로 유명했던 그 성격이 걍 보이지 않는가. 

아랫사람 입장에서 인간적으로 대하기도 참 편했던 분이라고 한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식견으로 앙리4세는 카톨릭 교도들이 수성하고 있는 파리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제 공격명력만 내리면 파리는 함락될 것이고, 그는 프랑스의 군주가 될 터였다. 그런데...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자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다. 앙리는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하고픈 야심가이기도 했지만 그 야심은 훌륭하게도 프랑스를 굳건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선한 의지와 결합되어 있었다. 여기서 파리를 유혈 접수하면 그는 정복자가 된다. 동시에 프랑스의 가톨릭 구교도들은 패배한 피정복민이 된다. 앙리야 일국의 군주가 되어 성공한 남자의 삶을 살다 죽으면 되지만, 프랑스라는 국가 자체는 불행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거다. 


앙리는 공격 명령을 내리는 대신, 이런 말을 한다. 



"파리는 미사(미사는 가톨릭의 의식)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있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리더니 갑작스런 선언을 한다. 



"나 이제부터 가톨릭 하지 뭐!"



앙리는 화통하게도 즉석에서 미사를 드리고 개종해버린다. 프랑스의 종교내전은 바로 이 순간 종식되었다. 위그노들은 어차피 신생 마이너다. 박해받지만 않아도 투쟁의 목적이 성취되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앙리가 속으로는 위그노라는 걸 뻔히 아는데, 개종했다고 해서 배신이 되진 않는다. 만약 위그노를 탄압한다면 그건 배신이겠지만. 앙리가 그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한편 구교도들은 더 이상의 희생(그것도 본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다 이긴 앙리가 거꾸로 자신의 종교를 (겉으로나마) 바꿔준 모습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가톨릭 세력의 음모와 협박, 감금, 암살 시도 등에 숱하게 시달려온 그 앙리가... 


앙리는 감격에 젖은 파리 시민들-방금 전까지는 적이었던-의 환호 속에 파리를 무혈 접수하고, 그자리에서 프랑스 왕위에 등극한다.


앙리는 이제 프랑스인들을 한 마음으로 통합해야만 하는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종교내전이 끝났어도 앙리 개인에 대한 지지가 생겼을 뿐 구교도와 신교도 서로 간의 앙금은 여전했다. 뭐 네 번이나 전쟁을 한 사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앙리는 갈등을 풀기 위해, 서양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물론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국가를 사적으로 소유한 군주와 귀족을 위해 존재한다. 이 상태에서 앙리는 <국가와 왕은 국민의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개념에 최초로 접근한다. 분열된 프랑스는 그에게 백성 일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주었고, 이 과제는 국가의 존재이유를 다시 생각하는 해답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 국가에서, 종교보다 더 중요한 백성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먹고 사는 문제다. 앙리는 왕위에 오르며 유럽사 최초로 백성에게 '공약'을 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모든 백성이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모여 닭 한마리를 끓여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



이건 당시의 유럽에서는 대단한 삶의 기준이다. 공약이란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게 백성들의 실질적 삶에 닿아있었다는 진일보도 대단하다. 그리고 이 공약은 정말로 현실화되었다. 앙리가 죽기 전에 프랑스는 거의 모든 국민이 일주일에 한 번 육식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지 불과 십 년 만에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거기에 더해 탁월한 군사/외교적 능력으로 프랑스의 영토를 넓히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재능에 노력을 더해 프랑스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행정가로서도 뛰어났다.


앙리는 사후 프랑스 국민들에 의해 '선량왕 앙리', '착하신 앙리'로 불렸으며, 이례적으로 '대왕'의 칭호로 존경받았다. 프랑스는 제국이었던 적이 없으며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군주를 대왕님으로 부르는 것도 참 어색한 일이다. 앙리에 대한 프랑스인의 사랑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앙리는 초유의 바람둥이였는데, 사료에 기록된 애인만 세어도 50여명에 달한다. 원나잇 스탠드는 뭐 일상이었고... 상대의 나이와 계급도 가리지 않았고 취향도 다양했으며, 멋지게도 왕의 권위를 내세워 관계를 강요하기보다는 로맨틱한 연애로 사랑을 얻어내는 걸 즐거움으로 여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앙리를 더 사랑했다. 프랑스인들의 기질이 좀 그런가 보다. 왜 클린턴이 르윈스키랑 스캔들 터졌을 때, 프랑스 내에서 클린턴 지지율이 급상승했던 일도 생각난다. 그때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어, 미국 대통령도 풍류가 뭔지 아네?' 정도였다.(물론  앙리 4세가 무능하거나 폭정을 일삼은 왕이었다면 프랑스인들의 그의 난봉꾼 짓을 멋으로 쳐 주진 않았을 것이다. "가지가지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이 닭이다. 맹수, 맹금류의 간지보다 이게 더 훌륭하지 않은가.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팀이 가슴팍에 하필 닭 한마리를 달고 뛰는 건 앙리4세 개인에 대한 국민적 애정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엔 프랑스는 군주가 백성을 상대로 최초로 공약을 내걸고, 그 공약이 지켜진 나라라는 자존심이 서려 있는 것이다. 역시 프랑스는 예로부터 유럽의 정치와 문화를 선도하는 나라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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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가대표 축구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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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마스코트도 당연하단 듯이 닭이다.



암튼 그래서 치킨수프의 유래를 따질 때 반드시 '앙리4세 가설'이 등장한다. 이 때부터 현재의 레시피가 정립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루(roux)가 프랑스어라는 것도 그렇고... 물론 전통 요리의 유래인만큼 확고한 증거는 없지만. 


참고로 닭은 소화가 잘 되고 살이 잘 찌는 고기이며 흔한 가금류라, 프랑스와 같은 전형적인 농업국가의 기층민들에겐 아주 좋은 육식거리이기도 하다. 닭은 동서양을 통틀어 보양식으로 여겨졌는데, 일례로 미국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감기에 걸리거나 골골대면 치킨수프를 끓여준다. 이렇듯 음식 하나에도 다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법. 




... 자 이제 다 끓었다. 떠서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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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자, 그럴듯하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빵도 좀 곁들여봤다. 저건 동대문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에서 사온 빵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바게트든 식빵이든 어떤 빵과 곁들여도 상관없다. 물론 빵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저 늬덜의 취향에 따를 뿐. 수프에 후추 살짝 쳐 주는 거 잊지 말고. 



아 참. 여친 앞에서 수프를 '씊~'하고 발음하는 실수를 하진 말자. 울나라 양식 레스토랑에서 같잖게 이 짓거리 하던데, 그딴 발음은 울나라 빼고 세상 어디에도 없다. 왜 수프를 수프라고 부를까? 그건 단순히 수프의 발음이 '수프'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수 - ㅍ" 정도가 될 테고. 뭔가 다르게 발음해야 본토스럽고 세련돼 보인다는 강박의 소산이 아니라면 아니 씨바 대체 수프에 대고 왜 씊씊 거리냐고. 왜 입안이 깔깔해서 침 좀 쳐야겠나부지?(단, 여친과 그날밤의 계획이 있는데 여친이 "씊~"하면 그냥 따라서 '치킨씊'이라고 해주는 센스는 발휘하자. 여친도 강요된 겉멋의 피해자일 뿐.)



자 다 먹었냐. 남은 건 그대로 두거나 아님 냄비째 냉장고에 뒀다가 생각날 때 다시 끓여서 허기를 달래면 된다. 그럼 이상 남자의 요리 첫빠따, 치킨수프 강좌를 마치려고 한다. 


기억해라. 요리는 어렵지 않고 수프는 더욱 그렇다. 치킨수프를 끓여보면 요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며, 요리의 본질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부담갖지 말고 해 보자. 남자는 직진이다. 실패한들 담배 한 갑을 잃어버릴 뿐. 늬덜은 할 수 있다. 못 하면 나한테 혼나러 와라. 






P.S로 담 편 예고. 


진정한 남자라면 여자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다음 편은 미역국이다. 긴장해라. 요리 난이도는 <미취학 아동 수준>으로, 침팬지 레벨인 본편의 치킨수프보다 조금 높다. 부디 늬덜의 몸에 인간의 피가 흐르길 빈다.





그럼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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