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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에서 특종을 터뜨렸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쉬쉬하던 이야기들이 사실로 밝혀지자 청와대는 데꿀멍했고, 각 커뮤니티는 배를 잡고 웃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웃을 일일 듯 싶다. 특히 딴지의 자매언론인 조선일보의 반응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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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그 어느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좌우 대통합을 최순실 대통령께서는 해내셨으니, 이제 그만 겸양을 거두시고 모습을 내보이십사 권유드리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무당이 국정에 관여하는 것이 뭐가 터무니 없는 일이던가? 한국사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장면이 너무나도 많다. 대통령께서는 너무 당황해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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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 대소왕


왕이 여전히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던 고대에는 무당에게 중요한 정치적 현안의 해석을 묻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 때 신라 우두머리의 칭호였던 차차웅은 아예 무당을 일컫는 신라의 방언이었으니까. 이 중에서 주목할 기사가 하나 있다.



부여를 섬기라는 요구를 거절하다 ( 9년 08월(음) )

가을 8월에 부여왕 대소(帶素)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어 말하기를

“나의 선왕과 당신의 선군 동명왕은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나의 신하들을 꾀어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러 성곽을 완성하고 백성을 모아 거주하게 하여 나라를 세웠다. 대개 나라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은 어른과 아이가 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이 예(禮)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김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하여도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를 세운 날이 얼마 되지 않고, 백성과 병력이 약하니 형세에 부합하여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고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아직 예의를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왕자 무휼(無恤)이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기를

“나의 선조는 신령(神靈)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참언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던 까닭에 불안하여 도망해온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병력(兵力)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를 가볍게 여겨 멸시하니, 청컨대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는데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대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라 보고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무당)이 대답하기를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그 뜻은 ‘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고구려의 2대왕인 유리왕 시절의 고구려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사방으로 한사군의 세력이 압박을 해왔고, 시시때때로 선비족으로 대표되는 유목민족의 약탈도 있었으며, 특히 나와바리 1짱인 북쪽의 부여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당시 부여의 왕인 대소왕은 고구려에게 인질 요구, 복속 요구, 5만의 군사 파병 등 다양한 방면으로 고구려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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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복속요구를 함에 있어 대소왕의 '순리드립'이 유리왕의 아들이자 훗날 대무신왕이 되는 무휼의 '반인반신드립'에 막히는 장면을 담아내는 기사이다. 자연의 이치고 나발이고 신의 자손앞에서는 다 줘까!라며 패기를 부리던 초기의 고구려. 여기서 이미 약간 자존심에 타격을 받았을 대소왕은 침공을 명분을 더 쌓기 위해 무당에게 고견을 여쭌다. 무당이 해석한 무휼의 의미심장한 말은 대략 이러하다. "대소왕 너님은 병신임ㅋ" 세월이 흘러 결국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한다.


어쨌건 이렇듯 중대한 외교적 현안을 해석을 무당에게 맡기는 일은 오래된 전통이라 하겠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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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유리왕


한편 대소왕만 무당에게 의견을 여쭌 것이 아니었다. 유리왕도 그랬다.



가을 8월,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長屋) 늪 가운데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낼 제물에 어떻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임금은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임금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였다.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다.”

임금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니 곧 병이 나았다.



기원전 1년. 유리왕이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한 돼지가 달아 나자, 탁리와 사비라는 관료들이 감히 돼지의 영 좋지않은 곳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유리왕은 분노하게 된다. 유리왕은 그들에게 외치니, "참 나쁜 사람들!!" 그리고 그 둘을 구덩이로 좌천시켜 죽였다. 그런데 9월, 유리왕이 병에 걸리자 이를 진단하는 과정에서 무당이 일전에 돼지 잡은 일 때문에 병을 얻은 것이라 진단하였고, 유리왕은 무당을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였다.


왕의 심신안정과 옥체보존에 무당이 참여하는 것 또한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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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의자왕



6월에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 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 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660년 6월. 망국행급행열차를 타던 백제의 의자왕 시절, 나당연합군의 침략이 임박한 상황에서 귀신의 "백제는 망했어ㅠㅠ" 외침에 놀라 찾아 낸 거북이 등껍질에 써진 '둥근 달 초승달' 드립의 해석을 의자왕은 무당들에게 맡긴다. 그런데 의자왕은 답정너 짓을 하며 합리적인 해석을 내린 선무당은 죽여버리고, 어디서 데려왔는지도 모를 시골무당의 해석에 기뻐한다. 이것은 이 때 까지도 의자왕의 정세판단이 현실적이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는 사료이다. 무왕과 의자왕 시절 신라를 공격하며 취한 여러 성들과 전과들로 의자왕은 근거없는 자신감에 취해 나당연합군에 대비한 전쟁플랜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 같다. 그 결과 그가 준비했던 플랜들은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백제는 허무하게 패망해버렸다. 그러니까 선무당 말을 잘 들었으면 좀 더 위기감이 생기고 좋잖아.


국가 위기상황에 있어 무당에게 해석을 요하고 대책을 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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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숙종


이렇듯 정치에 아주 깊숙히 관여했던 무당들은 중앙집권화, 왕권강화 과정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려났고 왕, 왕비, 신하들 주변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른바 '비선실세'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고려 중기부터 이들이 궁궐을 드나드는 횟수가 잦아지고 그 수도 많아졌다. 이들이 궁궐을 드나들 수 있는 가장 큰 행사가 '기우제'였다.



햇볕이 내리쬐므로 무당이 비를 빌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송충이가 번식하여 온갖 제거 방법을 썼는데도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니 경방(京房)이 지은 『역전(易傳)』의 비후편(飛候篇)에서 말하기를, ‘녹(祿)을 먹는 자가 임금의 교화를 더하지 못하면 하늘이 충재(虫災)를 보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아무런 공적도 없이 주상께 근심만을 끼치고 있으니, 원컨대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물리쳐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임해원(臨海院)에서 용왕도량(龍王道場)을 열고 비를 빌었다.


 

숙종은 훗날 조선의 세조와 비슷하게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나, 세조보다는 조금 더 정통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1101년, 가뭄은 임금과 신하들의 덕이 부족해 하늘에서 내리는 벌로 여겨졌던 시대, 신하들은 가뭄 대책으로 '셀프인적쇄신안'을 건의한다. 그런데 숙종은 이를 가볍게 씹고 무당을 불러다가 기우제를 지냈다.


이전까지의 왕들은 가뭄이 들면 억울한 죄인을 재심하거나 석방하고, 곳간의 곡식을 풀며, 궁궐의 연회를 중지하고, 특히 왕의 '반성의식'을 치뤘다. "백성들아 미안 이거 다 과인이 부덕해서 생기는 일이야ㅠㅠ"라는 퍼포먼스로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행사였다. 왕이라는 자리는 원래 "이게 다 임금님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돌아도 어쩔 수 없는 위치임에도,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왕권이 신하들 주머니에서 들락 날락 거릴 정도로 점점 추락하는 고려 왕의 왕권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왕은 가오가 더 이상 상하지 않기 위해 무당들을 불러 기우제를 치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국가적 이벤트를 치르는 방향을 변경한 것이다.


국가적 이벤트에 무당들을 불러 주도케 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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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인종


무당들이 한번 궁궐에 드나들기 시작하자 점차 그 횟수가 잦아지게 되었고 당연히 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인종시절엔 아예 '또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냈다'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행사가 잦았고, 그 수도 수백 명에 이르게 되었다. 사단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인종 9년의 한 조치가 도루묵이 된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요즘 무당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여 과도한 제사[陰祀]가 날로 성행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관청에 명하여 무당 무리들을 멀리 내쫓도록 하소서.”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여러 무당들이 이를 걱정하여 재물을 거두어서 은병(銀甁) 100여 개를 사서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주었다. 권귀들이 아뢰기를, “귀신은 형체가 없으므로 그것의 허실(虛實)을 알 수 없으므로 완전히 금지하는 것은 편리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왕이 그렇게 생각하고 금지령을 완화시켰다.



1131년, 뜻 있는 신하들이 무당들을 내쫓자고 건의하자 인종은 받아들인다. 하루아침에 숟가락을 뺏기게 된 무당연합은 합심하여 당대의 권신들에게 막대한 로비를 퍼부었고, 결국 권신들은 이 조치를 완하기 위한 기적의 논리를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귀신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으니 무당들을 일단 놔두는 것도 괜찮은 일 같은데요?" 인종은 이 논리에 동조하며 금지령을 완하하였고, 이후의 상황은 그야말로 굿판 만난 무당세상이 되었다.


무당들이 돈을 모으고 여러 주요 인물들에게 로비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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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세조


이후 원 간섭기에 충렬왕은 병에 걸리자 원나라에 의원과 무당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원 황제는 "병은 무당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의사는 이전에 한 명 보냈는데 왜 또 징징대?"하며 약만 보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여간 무당이란 게 끼면 좀 재밌어진다.


고려가 멸망하고 엄격진지하기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조선이 들어섰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늘 불가와 도가, 무속신앙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세는 줄어들었을 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다. 후기에는 아예 서학, 동학까지 유행한 것을 보면 유학이라는 틀로 세상 만물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는 백성들에게 다소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무당들이 기우제를 봉행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아예 예조가 무당들을 직접 관리하며 주관하였다. 그런데 백성 뿐만 아니라 왕족들도 무당을 찾곤 했다.



8월에 세조 잠저(潛邸)의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내어 울었다. 잠저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의혹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옛 글에도 있으니 이는 잔치를 베풀 징조이다."


하였다. 무당에 비파(琵琶)라고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급히 달려와서 청하여 대왕 대비(大王大妃) 를 알현하고 말하기를,


"이는 대군(大君)께서 39세에 등극(登極)하실 징조입니다."


하였다. 대비가 놀라서 물으려고 할 때 무당은 더 고하지 않고 가버렸다. 



1455년, 세조가 아직 왕이 되지 않았던 때에, 세조의 집에 있는 가마솥이 스스로 울자 세조는 "얘들아 잔치각 떴다"하며 기뻐했고, 또한 비파라는 무당이 "수양대군이 39살에 왕이 될 상이로고"라며 예언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에피소드다. 그 해에 왕이 되긴 했으니 예언이 맞긴 맞았는데 어째 좀 꺼림찍한 에피소드다.


차기 군왕의 등극을 무당이 점지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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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연산군


무당하면 또 연산군을 빼놓을 수가 없다. 1505년에 연산군은 보은 사는 박수 김영신이 "내 몸에 귀신이 붙어 있어, 빈 그릇도 저절로 물이 차게 한다"고 주장하자 승지들을 시켜 사실인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과 무당이 얽힌 에피소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지평 권헌(權憲)이 아뢰기를,


"어제 전교에 ‘성수청(星宿廳)에 국무(国巫)를 둔 지 유래가 이미 오래다.’ 하셨습니다. 신 등도 역시 국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무당이 요망(妖妄)하여 우매한 민심을 미혹하므로 그 죄를 다스리자는 것인데, 하교에 이르기를 ‘요망한 중 허웅(虛雄)의 예와는 다르다.’ 하시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저 중은 한 지방에 있으니, 그 폐해가 몇 고을에 그치지만, 지금 만일 이 무당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앞으로 온 나라가 높여 믿을 것이니, 그 해가 요사한 중보다 더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무녀(巫女)라는 것은 모두가 요사한 술법을 사용하여 거개가 이러한데, 어찌 반드시 이 무당만 죄줄 것인가?"


하였다. 헌이 다시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1503년, 무오사화로 한바탕 궁궐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5년 뒤, 이 때의 연산군의 막장행각은 점차 도를 더해갔다. 그러나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갑자사화는 1년 뒤에 일어났으니 아직은 대간들이 이런 건의도 할 수 있던 시점이었다. 이 사건은 돌비라는 무당을 처벌하자는 권헌의 건의에서 시작된 사건인데, 참으로 묘하게도 이 돌비라는 무당은 귀신같이 잠적해버렸고, 그 집에서 찾아낸 것이라곤 부적 몇 장인데 이 부적이 왕의 비밀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나온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게다가 이 돌비라는 무당은 나라의 큰 무당인 국무(國巫)였다.  연산군은 '무당이 설치는 게 하루이틀 일이냐? 게다가 이 무당만 따로 죄 줄 수 없음' 이라며 권헌의 처벌요청을 기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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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돌비라는 무당은 중종이 들어서고 난 1515년에 이르러서야 죄를 받았다.

 


이때 무녀(巫女) 돌비(乭非)가 국무(國巫)라 자칭하고 궁액(宮掖)을 드나들면서 재액(災厄)을 물리치는 푸닥거리를 하거나 신의 은총을 기도하기도 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궁금(宮禁)의 재화(財貨)로부터 어의(御衣)에 이르기까지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가 추국(推鞫)하여 죄주니, 세상사람들이 쾌하게 여겼다. 다만 대관(臺官)이 어의의 처치 문제로 난처하였다.



다음정권이 할 일 중에 하나를 선조들이 몸소 보여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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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숙종


숙종 또한 무당하면 빼놓을 수 없는 왕이다. 1683년, 궐 내에는 두질이라는 전염병이 돌았고 숙종 또한 감염돼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당시 시국은 비상이 걸렸다. 이 때 왕대비는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였는데, 숙종에게 다혈질 기질을 물려준 것으로 유력시 되는 인물로서 대비에 오르자 내내 숙종에게 간섭을 하곤 했었다. 그래도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정성이었는지, 숙종이 병에 걸리자 막례라는 무당을 궐에 들여 자문을 구하였다.



임금이 두질(痘疾)을 앓았을 때, 무녀(巫女) 막례(莫禮)가 술법(術法)을 가지고 금중(禁中)에 들어와 기양법(祈禳法)을 행하였는데, 대비(大妃)가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할 것을 청하고, 궁인(宮人)들을 꾀어 재화(財貨)와 진보(珍寶)를 많이 취하였으며, 출입시에는 항상 교자(轎子)를 타고 다녔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


임금이 비답하기를,


"요사(妖邪)스런 무녀(巫女)가 금중(禁中)에 출입하면서 난잡(亂雜)한 짓을 자행(恣行)한 한 가지 사실은 오랫동안 병중(病中)에 있었기 때문에 까마득히 몰랐는데, 이제 경의 소(疏)의 말을 보니 참으로 원통하고 놀랍다. 마땅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죄상(罪狀)을 안핵(按覈)하여 법(法)에 의거해 처치(處置)하겠다. 다만 자성(慈聖)의 위예(違豫)한 환후(患候)가 요사스런 무녀에게서 말미암았다고 말하는 것은 놀랍고도 의아(疑訝)하다. 자성께서는 평소에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하시어, 무격(巫覡) 따위의 불경(不經)한 일을 깊이 미워하시고 통렬하게 끊으셨으니, 어찌 무녀(巫女)에게 신혹(信惑)했을 리가 있겠는가? 단지 과매(寡昧)의 불효(不孝)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말로 자성(慈聖)께 누를 끼치게 하였으니, 더욱더 통탄스럽다. 이는 대개 여항간(閭巷間)에서 잘못 전문(傳聞)한 데서 나온 것이나, 알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는 경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무당이 권고한 치료법은, 한겨울에 명성왕후가 홑치마와 삿갓을 쓰고 물벼락을 맞는 것이었다. 이 처방 덕분인지 어쩐지 숙종은 병을 이겨내었지만, 명성왕후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버려 결국 그 해 12월 사망한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막례에게 죄를 묻는 상소에 숙종은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발생한 거고 또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혹하셨을리 없다"며 막례를 귀양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그런데 숙종은 왕족과 무당이 얽힌 사건이 발생하면 늘 모르쇠로 일관하는 타입이었다. 1696년엔, 숙종과 친남매간인 명혜공주가 성대한 굿판을 벌인 사건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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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에는 대기근이 성행했고, 역병이 창궐했다.

당시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믿었던 것은 굿 뿐이었다.

 


지평(持平) 이세재(李世載)가 상소(上疏)하기를,


"어제 수십의 인마(人馬)가 길에 잇닿은 것을 보고 물었더니, ‘명혜 공주방(明惠公主房)의 궁인(宮人)이 대내(大內)의 분부를 받아서, 소를 잡고 제수(祭需)를 장만하여 풍양궁(豊壤宮) 터에서 이틀 동안 신사(神祀)를 베풀고 파하였는데, 그 비용이 지극히 풍성하고 사치하였다.’ 합니다. 이렇게 주검이 길게 가득한 때에 천백 사람의 여러 날 양식이 될 만한 것을, 마침내 요사한 무당의 주머니로 돌아가게 하니, 원근(遠近)에서 지켜보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저 소를 잡아 신사하는 것은 모두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궁인을 시켜 범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나, 이것은 전하께서 모르시는 것인데 혹 궁노(宮奴)들이 사사로이 가탁(假托)한 것입니까? 또 광릉(光陵)의 침원(寢園)이 멀지 않은 곳에 따로 한 상탁(床卓)을 베풀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견주어 방울을 흔들고 북을 쳐서 설만(褻慢)하고도 무엄하였으니,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의 영(靈)을 욕되게 하고, 전하께서 선조를 받드는 덕에 누를 끼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궁임(宮任)·무녀(巫女)를 가두어 중률(重律)로 다스리도록 명하셔서, 듣기에 놀랍고 의혹되는 것을 풀어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신사는 매우 괴탄(怪誕)한 것이니, 내가 알고 모르는 것은 거론할 일이 아니다. 무녀는 해조(該曹)를 시켜 정배(定配)하게 하고, 궁임은 종중 과죄(從重科罪)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궁지(宮趾)에서의 음사(淫祀)를 내간(內間)에서 지휘한 일이 있었다면, 마땅히 그 실상을 분명히 말하고, 경개(更改)하는 뜻을 혼쾌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간에서 지휘하지 않았으나, 무녀(巫女)의 무리가 망령되게 스스로 가탁하였다면, 또한 마땅히 그 죄를 엄중히 핵실(覈實)해서 들은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 주어야 하는데, 성교(聖敎) 가운데, ‘내가 알고 모르는 것은 거론할 것이 아니다.’ 한 것은 매우 명백하지 못한 것이었다. 궁례(宮隷)와 무녀들 또한 엄중하게 핵실하지 않은 채 곧바로 과죄하게 하고는 비지(批旨)를 내리니, 인정(人情)이 모두 놀라고 의혹하였다. 이번 음사(淫祀)는 혹 내간(內間)에서 진실로 참여하여 아는 꼬투리가 있는데, 임금이 엄하게 금지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말았으므로, 대신(臺臣)의 바른 말을 듣고서 도타이 대하는 분부를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이(訑訑)028) 한 기색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듯하다. 대저 잘못이 있을 때나 고칠 때나 사람들이 다 알게 하는 것은, 진실로 밝은 임금의 성절(盛節)인데, 임금이 이 의리에 있어서는 번번이 용감히 고치는 아름다움이 모자라니, 근심스럽고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 사건에서도 숙종은 모르쇠로 일관하였고, 사관은 "임금이란 놈이 어중간하게 처리하니 졸렬하다 졸렬해"라고 신랄히 까고 있다. 훗날 명혜공주가 죽자 숙종은 명혜공주 무덤 근처에 있던 봉국사를 중수하여 무덤관리 일을 맡기기 까지 한다. 왕과 왕족의 권위를 침탈하는 행위는 설사 그것이 무당과 관련된 일일 지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던 숙종이었다.


왕가의 집안사에 무당이 관여하고 도와주던 일은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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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고종, 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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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 >


마지막으로는 그 유명한 고종과 명성황후를 꼽을 수 있겠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갈리지만,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볼 때 마치 러시아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이2세와 알렉산드라가 총애했던 괴승 라스푸틴에 비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전해지고 있다.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으로 몸을 피하게 된 충주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무녀 신령군은 이후 명성황후에게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훗날 고종에게도 영향력을 끼쳤다는 야사가 널리 퍼져있다. 특히 갑신정변을 거치며 더욱 신령군의 영험함에 감화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령군은 인사에까지 개입하였고, 신령군이 거처하던 북묘(관우묘)에는 한 자리 하고 싶은 어중이 떠중이 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이유인이란 인물이 있었다.



전 시독(前侍讀) 김석룡(金錫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유인(李裕寅)은 먼 지방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요사스러운 좌도(左道)의 무당과 점쟁이의 잡술로 외람되이 폐하(陛下)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10년도 안되어 정경(正卿)에 이르러서 집안이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의 사람됨이 겉으로는 고지식한 것 같지만 속은 실로 비루하고 거짓이 되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세력만 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본부의 정무(政務)에 대해서도 또 모두 마음 내키는 대로 망령되게 시행하여 규정을 어겼으니, 판사(判事)는 주임관(奏任官)인데도 제 마음대로 바꾸어 차임하였고, 죄인이 이미 정배(定配)로 재결되었는데도 질질 끌면서 발배(發配)하지 않았습니다. 적체된 옥안(獄案)을 열흘 안에 건성건성 마감하고 망령되게 사사로이 단안을 내려 착오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길에서 올린 청원서를 해당 관리에게 보내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다 보니, 걸핏하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징계하도록 결재 받은 사람을 도망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혹은 사가(私家)에 관원을 보내어 증인 공초를 작성하기도 하고 드디어는 법관(法官)으로 하여금 집에 가서 신문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그가 행한 정무는 겉으로는 공적이지만 속으로는 사적이어서 편벽되게 듣고는 남몰래 간사한 짓을 하였으므로 법부의 비난 여론이 비등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멋대로 행하여 나라를 배반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악당의 무리와 편당을 지어 서로 구제하였으니, 단지 사적인 것만 알고 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의 죄를 징계함으로써 모든 관료들을 경계시키고 법을 보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위를 벗어나 사람을 논하였으니, 심히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1898년, 법부 대신 이유인에 대한 탄핵이 올라온다. 그 이유인 즉슨 '무당과 점쟁이의 잡술로 폐하의 총기를 흐리고,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여 졸부가 되었고, 일처리가 아주 아주 개판이다' 였다. 사실이라면 파직이 아니라 죄를 줄 정도의 조목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지위를 벗어나 사람을 논하였으니, 심히 취하지 않는다'라는 비답을 내린다. 이 얘기를 현대식으로 좀 바꿔보자면, '의혹만으로는 파직시킬 수 없다'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이유인이라는 자는 신령군의 추천으로 들어온 자였다. 이유인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신령군은 그를 불러 시험해보았고, 이유인은 북악산으로 신령군을 데리고 가 진짜 귀신을 불러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귀신은 사실 이유인이 고용한 건달들이 변장한 것이었고. 그 이후 이유인은 여러 고관대작을 거치면서 금강산 일만 이천봉에 굿을 해야 한다는 둥 하며 내탕금을 빼갔으니, 실로 엉망진창이라 할 만 하다.


이유인은 결국 고종에게 사직을 청하였으니, 어찌된 일인지 고종은 극구 만류하였다. 이유인은 이후 궁내부에도 들어가고 여러 사건에 피고로 제소되나 끝까지 고종의 비호를 받았다. 이러한 정황증거로 볼 때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신령군에 얽힌 야사들이 결코 소설이 아닐 것 같다.


정부의 인사에 무당이 개입한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우리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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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즐겁고도 슬픈 일이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지금도 끝없이 터지는 패러디 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폭소를 하고, 한편으론 실록에서나 볼 법한 일을 라이브로 보고 있자니 슬프기 그지없다.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에 적용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역사학의 필요성을 깡그리 날려버리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허망한 교훈만을 남겨주는 일을 보자니 슬프지 않을리가. 또 한가지 슬픈 것은, 필자는 무속의 역사를 흥미롭게 생각해왔다. 향토사 및 민속사에 있어 무속자료가 지닌 가치는 매우 귀중하고, 구한말 해외 연구자들도 한국의 무속신앙을 자세하게 기록해왔다. 이제 무속관련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 조롱거리로 전락하진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아니 뭐 그래도 괜찮다. 최순실 대통령께서는 반인반신이시니 남은 임기동안 잘 하시겠지.


다만 그 분의 봇에게는 드리고 픈 하나의 사료가 있다. 1384년 8월 10일, 우왕 10년의 기사다. 이 때 고려는 끝없는 왜구들의 침략과, 원 명 교체기로 혼란한 국경과, 이인임 일파의 막장 정치행각이라는 3중고로 망하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우왕이 교외에서 사냥을 하였다. 밤에 궁궐로 돌아오는데, 생황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무당놀이를 하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풀에 맺힌 이슬 같구나.”라고 탄식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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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사퇴하세욧! >





빵꾼


편집: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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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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