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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정답’이 추앙받는 사회가 된다. 각박하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것이고, 여유가 없다는 건 사소한 시행착오마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초의 시간과 한 푼의 돈 마저도 최대한 효율적이며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간다.


이런 ‘정답문화’는 삶의 곳곳에 침투해 있다. 짧은 여가시간에도 자기계발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공부하고, 그 공부를 위해 ‘가장 잘 가르친다고 여겨지는’ 강의를 찾아낸다. 어쩌다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가도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곳’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거기서 한 끼를 먹더라도 ‘가장 맛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낸다.


한 권의 책을 고르는 데에도 마찬가지다. 이 각박해진 세상에서 독서라는 행위 자체가 사치로 여겨지기도 하거니와, 그 와중에 시간을 내서 한권의 책을 고른다면 그것은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정보들이 압축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퍽 오랜 시간 동안 베스트셀러는, 어지간한 유명 작가의 책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자기계발서나 처세서, 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들이 차지한다.


그런 한편, 정답만을 좇는 삶은 참으로 지루하고 단편적이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눕더라도, 몸을 뒤척이지 않으면 피가 아래로 몰려 머지않아 불편해지듯이 말이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보석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알게 된 정보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영감을 얻기도 한다.


이 책, ‘세상의 모든 왕들’은, 이 사회에서 추앙 받는 ‘정답’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오히려 보석 같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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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다양한 역사 속에서 여덟 사람(엄밀히 말하면 한 분야는 형제가 왕이므로 사람 수로는 아홉 명)을 지목하고, 그 들을 각 분야의 ‘왕’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각 분야의 ‘왕’이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결말을 이야기한다. 이 8분야는 현재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도,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여겨져 온 것도 아니다. 각 분야의 왕으로 선정된 사람들도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랜 시간 오해를 받아온 유명 인사들도 아니다. 각 왕들에 대한 ‘전기’로 보기엔 막상 해당 인물 이외의 전후사정에 대한 이야기의 분량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사회과학서라고 보기엔 각 인물들 간 객관적 유사성이나 대립성이 강조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가득 채워져 있는 폭넓은 정보들은, 어떤 면에서도, ‘이 각박한 사회에서 대중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수식을 붙일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낯선 동네에서 무작위로 들어간 식당에 앉아, 주인장 마음대로 고른 반찬들로 이뤄진 두서없는 밥상을 앞에 둔 느낌을 받는다. 맛집 블로거들이나 SNS꾼들이 좋아할만한 화려한 플레이팅도 없고, 최근 유행하는 저탄수고지방 식단도 전혀 아니지만, 각종 지역 식재료와 주인장 나름의 고집이 담긴 반찬 구성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묘한 균형을 이루는 그런 밥상. 다른 지역에서 이런 류의 식당을 찾으려면, 무슨 검색어를 쳐야 할지도 모르겠는, 그런 독특한 밥상 말이다.


이 기묘한 밥상의 요리사인 저자 김진은 너클볼러라는 필명으로 딴지일보에서 활동해왔다. 필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야구 마니아이고, 오랫동안 음악 팟캐스트를 진행해온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첫 책이, 이토록 8가지 다양한 소재들로 구성돼 있음에도, 음악과 야구가 빠져있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다.


이 의아함은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그 밥상의 모든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슬며시 풀리고 만다. 그가 이름 붙인 마약왕, 비극왕, 처세왕, 첩보왕 등등의 명칭은 분명 서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막상 각 장의 내용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맥락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사회적 맥락은 결국 ‘권력’과 ‘욕망’, 두 가지 키워드로 일관되게 정리된다. 사실 저자는 이미 서문에서 이를 예고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모든 왕들의 뒤에 시대가 욕망의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과 ‘욕망’, 진보이론가들과 근현대 철학의 핵심을 요약하는 데에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들이다. 마치 메뉴판에서 ‘한방’, ‘천연’이 들어가면 대부분 맛은 별로 없는 것처럼, 이 두 키워드는 보통 지루하고 너무 무거운 글을 낳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자는 ‘한방’, ‘천연’이라는 단어로 다소 불편한 요리의 맛을 감추는 요리사는 아니었다. 책의 제목과 표지의 캐리커쳐가 주는 재기발랄함은 책의 내용에서도 꾸준히 유지되면서, 저자의 화법이 주는 편안함과 이면의 주제의식이 지니는 무게감이 균형 잘 잡힌 무게중심을 이뤄낸다. 


몇 년 전 어떤 도시에 처음으로 관광을 갔을 때, 나는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 갔다. ‘정답’을 찾았던 셈이다. 그 지역 특산물로 요리한 음식의 맛은 감탄스러웠지만, 한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너무 유명해졌던 나머지 한글로 써진 메뉴판과 친숙한 양념의 간은 다소간의 서운함을 남겼다.


그 이후, 의도치 않게 같은 도시에 몇 개월 간 체류를 하게 됐고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나는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들을 무작위로 들어가 보곤 했다. 상당수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다시 찾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한 몇몇 곳은 단골집이 됐다. 그곳들은 주로, 그 지역 주민들로 이뤄진 단골들과 식당 나름의 역사가 이뤄내는 총체적인 분위기가 음식의 맛과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주곤 했다. 그 단골집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대체로 내 기억 속에서 나만의 보석과 같이 빛난다.


이후, 같은 도시를 찾는 지인들이 ‘정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맛집을 물어보면 나는 그 단골집들을 추천했다. 지인들이 다녀온 후기는, 거의 절반 이상의 확률로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후기를 남긴 지인들은 대부분 나에게 서운함을 주었던 그 유명 식당을 선호했다. 결국, ‘정답’에 대한 태도와 그 정답을 벗어난 경우 어떤 속성에 가치를 부여 하는지는 사람마다 여건마다 각각 달랐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세상의 모든 왕들’은 나에게 그 지역 단골집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이 바로 당신이 찾는 ‘정답’이라고, 이 시대를 사는 누구라도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나처럼 이 사회의 ‘정답문화’에 지치고 그 ‘정답’들에 서운함을 느꼈던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신만의 자그마한 보석을 하나 품게 되리라는 기대를 해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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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